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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Nov 02. 2020

깊은 가을 속으로

화악산 애기고개

가을이 되면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다. 후렴 부분에 "... 가을에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라고 부른다. 통기타의 아르페지오와 멜랑꼴리 한 가사 그리고 박인희의 우수에 찬 보이스가 어우러진 그 노래는 정말 가을의 쓸쓸함이 진하게 울어 나오게 했다. 그 당시가 아마도 20대 초반, 그러니까 문학적 감성이 한층 고양되어 있을 때였다. 지금은 다 머리가 벗어지고 배가 나와 뒤뚱거리지만, 당시 친구들도 감성적 호르몬이 가장 풍부하게 분비되는 시기여서 박인희의 그 노래에 매료되어 있었다. 사실 그 노래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박인희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인 노래이다. 그 노래가 만들어지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오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고 박인환에 잠시 초점을 맞추고 가겠다. 박인희가 '세월이 가면'을 자신의 분위기에 맞게 편곡해 불렀다면, '목마와 숙녀'는 당시 무명 음악인이었던 김기웅의 곡을 배경으로 시를 낭송한 일종의 낭송곡이었고, 1974년 음반으로 출판되었다. '세월이 가면'은 1956년 박인환이 죽기 전 배우 겸 가수였던 나애심이 처음 불러 세상에 나왔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목마와 숙녀'는 청계천 중고 책방에 돌아다니는 시집에 불과했다. 박인희의 이지적인 보이스에 의해 낭송되는 그 시는 한창 물 오른 우리들의 감성을 쥐어짰다. 우리는 그 시를 외워 친구들 앞에서 인생의 방랑자처럼 고독을 씹듯이 그럴싸하게 낭송을 하기도 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중략 ... 가을 속으로 떠난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중략...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중략 ...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중략 ...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중략... 인생은 외롭지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중략...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특히 마지막 구절은 감성의 절정이었다. 얼마 전에 인터넷 포털에서 박인희의 근황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옛날 생각을 하며 '가을이 가면'과 '목마와 숙녀'를 유튜브에게 찾아 들었는데 차이는 있지만 역시나 아직도 나의 감성을 자극해주었다.

박인환 시인

한국전쟁이란 광풍이 휘몰아친 후, 모더니즘이 서울 한복판에서 활활 타오를 때의 주역이었던 박인환은 알코올과 고독과 허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그 속에서 서른한 살 혈기왕성 할  나이에 프란츠 슈베르트처럼 요절한다. 그의 문학적 도반이었던 김수영은 한국전쟁의 중심에서 허우적거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가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는, 그렇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시간을 겪은 후 그 모더니즘 세계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던 시기였다. 박인환과 김수영은 북한이 점령한 서울에 남았지만, 박인환은 천운으로 인민군에게 잡히지 않았고, 김수영은 운명처럼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전쟁터로 끌려나갔고... 아무튼 언 듯 보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김수영도 박인환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였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모더니스트의 마왕인 박인환과는 레벨이 달랐지만 김수영도 한 때는 세상이 인정하는 아웃사이더였다. 그들에 대해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지만 주제가 아니기에 여기서 방향을 돌려야겠다.          


그렇게 가을이 우리에게 고독과 멜랑꼴리로 유혹하여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한 후 사색의 시간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산과 자연으로 내몰기도 한다. 가을은 산에 가기 적격이다. 빌딩 숲 사이에서 낙엽을 밟는 것은 멀어져 간 어느 여인을 상기시키지만, 산길에서 밟는 낙엽 소리는 내면의 나를 소환한다. 가을 산은 화려하지만 차가운 바람이 곧 엄습해 오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마지막 몸부림이며, 그런 사실을 알기에 인생의 고독에 탐닉하게 된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그 고독은 마치 발바닥에 밟히는 낙엽 부서지는 소리처럼 그렇게 내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누군가 내게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한 곳을 선정해 달라고 물어올 경우가 종종 있다. 단풍놀이 차원의 가을 나들리는 용문산 상원사 부근이 으뜸이며, 가을의 진한 쓸쓸함을 느껴보고 싶다면 양동면 매월리 마을 풍경과 임도를 권한다. 전자는 상원사 주변과 입석리 마을로 나가는 약 1킬로미터 도로변으로서 만산홍엽의 진면목을 확인시켜주는 환상적인 코스이며, 후자는 추수가 끝난 후의 한적한 마을과 황갈색 낙엽송으로 뒤덮은 임도로서 색다른 가을 풍경을 선사라며 무엇보다 자신을 점검하는 차원의 내적 여행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긴 가을은 다른 세 계절과 달라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서 해마다 다른 풍경을 연출하므로 나의 시각이 해마다 같을 수는 없다.


아무튼,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가을을 만나기 위해 나는 버스를 타고 무작정 가평 용수동으로 들어갔다. 가을 단풍이라면 오래전부터 명성이 자자한 명지산이 있지만 나는 그곳을 지나쳐 애기고개 들머리인 도솔천사 정류장에서 홀로 내렸다. 정류장 바특이 사찰로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긴 혓바닥을 내밀고 있다. 사실 여기는 허니문 시간도 없이 시작부터 오르막이다.          


텅 빈 도로를 뒤로 하고 200여 미터 콘크리트 비탈길을 오르면 도솔천사와 고개로 오르는 삼거리가 나온다. 배낭도 추스르고 GPS도 작동시킨 후 솦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늦가을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콧속 깊이 파고든다. 언제나 그렇듯 두터운 정적이 감돌고, 초행이 아닌데도 설렘이 엄습한다. 그리고 태양이 보일만한 시간이지만 사위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며 이슬 맞은 낙엽이 숲길을 수복이 덥고 있었다.


손님 대접도 없이, 무례하게도 숲길은 처음부터 비탈면으로 나를 마중한다. 숨이 서서히 가빠지기 시작했다. 낙엽 밟는 소리와 다소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즉흥곡처럼 서로 박자를 맞추며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더 오를수록 상승 곡선을 그리던 숨소리는 어느 순간 등속이 되어 평온성을 유지하고, 그 과정에서 낙엽 밟는 소리가 합쳐져 중저음의 화성이 만들어진다. 타악기처럼 멜로디는 없지만 가만히 가슴으로 들어보면, 차이콥스키 사계 중 10월, 가을의 노래의 멜로디가 쓸쓸하게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게 가을의 속도를 붙잡고 아쉬워하는 작은 욕망이 발끝을 스치는 낙엽소리에서 발화된다.

2018년 11월 3일 / 적목리에서 오르는 애기고개

그렇게 오르다 길이 급격히 꺾어지는 부근에서 뒤를 돌아다보면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 눈부신 파란 햇살이 명지산 주능선 봉우리에 반사되고, 그 밝은 세상은 어두운 이 계곡의 실루엣과 맞닿아 마치 스크린이 올라가는 것처럼 하늘을 반쪽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산 그림자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만 아직은 태양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진중했다. 그 어둠은 능선 안부에 오를 때까지 계속된다.


간혹 보이는 단풍잎도 이제 시들어 가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푸레나무와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들도 떨어지는 적갈색 낙엽을 하염없이 쳐다만 보고 있다.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을씨년스럽지도 않다. 그저 가을의 쓸쓸함이 공기처럼 살아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쓸쓸함이며 나는 그저 숨을 죽이고 그 길을 걸을 뿐이다.


갈지 자 길을 몇 번 오르면서 태양이 잠시 보였다 사라지지를 반복한 후, 이내 숨이 잦아들면서 파란 하늘이 본모습을 드러냈다. 능선 안부에 오른 것이다. 이제야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세상이 눈부시게 밝아졌다. 오래간만에 찾은 나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비탈은 이제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이다.

2018년 11월 3일 / 애기고개

잠시 동남쪽 방향에 펼쳐진 화악산 지맥 능선을 조망한 후, 다시 9부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진 길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발목이 푹푹 빠지는 가랑잎과 20여분 씨름을 한 나는 드디어 애기고개에 당도했다. 마루금은 넓은 헬기장이며 화악산 중봉에서 시작해 애기봉을 거쳐 수덕산으로 가는 능선 안부에 위치하고 있다. 부근에 있는 명지산이나 화악산처럼 등산객들이 잘 찾지 않는 외진 곳이다. 산에 대한 명성을 따지지 않고 산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찾아다니는 덕후급 산악인들이나 오르는 곳이다. 자칭 지맥꾼이라 부르는 부류가 그들이다.  산에 좀 다니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간혹 보게 된다.


아무튼 마루금에서 잠시 쉬며, 화악산 응봉에서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홍적고개에서 북배산까지 이르는 능선의 실루엣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은 후 나는 내리막 숲길로 움직였다. 화악리에서 나가는 두 시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늘어지게 쉴 형편이 되지 않았다. 다음 버스는 3시간이 지난 후에나 들어오는데 그 시간을 사용할 자신은 내게 없었다.


이 애기고개도 옛사람들이 다녔던 고갯길이다. 화악리에서 적목리로 넘나들던 지름길로서 이 지역에 많이 상주하던 화전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난번 글에서도 화전민에 대해 소상하게 기술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삶의 흔적은 이곳 가평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 지역에 있는 높은 산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 지역의 특성이라고 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화전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농경의 한 형태였다는 방증이다. 사실 소작이나 종노릇이라도 못할 형편이라면 당시 경제 사회적 환경으로 볼 때 민생고를 해결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죄를 지은 사람들도 피신할 곳은 산속 밖에 없었을 것이다.

2018년 11월 3일 / 애기고개 마루

마루금에서 10여분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 길이 본래의 옛 고갯길이고 오른쪽 길이 내가 가야 할 임도로서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옛 산판길을 확장한 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임도 속으로 접어들었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돼지 창자 같이 꼬불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약 두 시간은 가야 화악리 날머리에 도착할 수 있다.


바싹 마른 낙엽들이 흙길과 수풀 위에 님비곰비 쌓이고 있지만, 아직도 중력을 거부하는 빛바랜 이파리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고, 그 와중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은 이파리들이 투명한 햇살을 받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말라비틀어진 가랑잎들이 바람에 휘날리다가 멀지 않아 눈 속에 갇혀 이 땅 어디엔가 떠돌겠지만, 아직은 그 시간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피안으로 가는 길은 고독하다.


그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니 바람소리가 들린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 그 바람에 스치는 이파리 소리, 길 위를 구르는 가랑잎 소리, 발길에 차이는 소리, 그리고 이 공간의 소리에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가 얹혀 내면 저편에서 파문을 일게 한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중에서도 귓가를 스치는 소리가 일정한 파동으로, 지친 영혼을 위로하듯 잔잔하게 내면으로 스며든다. 당신은 그 바람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 소리가 내면으로 잦아드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가만히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발걸음의 감각은 사라지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그리고 그 어떤 사유도 생성되지 않는,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어떤 삼매의 영역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람소리를 쫒아 가면 어떤 욕망도 발원되지 않는다. 그저 바람소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바람이 되는 나를 잠시라도 느껴볼 수 있으리라.


이 숲길에서 만나는 가을은, 도심의 빌딩 숲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조경수의 일종인 은행나무와 단풍나무와 느티나무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편의 단편영화를 보듯 짙은 여운을 남기게 한다. 도심의 가을에서는 잠시 감상적 경계선을 그어주지만, 이 숲 속의 가을은 영혼의 소리를 일깨워준다. 빌딩 숲 속의 가을은 삶의 여정을 떠나지 못하지만, 이 텅 빈 산속의 가을은 나의 내면의 문을 열어 나를 걷게 한다.


그리고 가을은 술병에서 별이 떨어지고, 술병이 바람에 스러지는 소리를 듣고, 그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울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감성과 연민이 교차되지 않더라도, 인생의 어떤 전환점에 홀로 서있는 듯한, 화려하고 행복했던 세월이 흘러가고 그것을 아쉬워하는 듯한,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인식하고 쓴 소주 한잔을 입속에 털어 넣는 듯한 마음의 변화가 급격하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심적인 변화는, 그 허무와 고독은 모더니즘의 경향을 거부하고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점검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준다. 인생은 태생적으로 허무하고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곧 무명으로부터의 탈피라는 것이다. 허무와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시라.           

2018년 11월 3일

그렇게 가다 보면 임도의 후반부에 도달하고, 생각지도 않은 마지막 가을 풍경과 만난다. 노란색에 가까운 갈색 낙엽송 군락이 산 능선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흑갈색 활엽수와 푸른색의 잣나무와 그리고 진노랑색의 전나무가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어우러져 독특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 그림에서의 주인공은 단연 진노란색 전나무였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풍광에 넋을 놓고 있었다. 마지막 몸부림인 듯, 가을의 끝자락에서 전나무는 남은 기운 한 올까지 모두 발산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을은 돌이킬 수 없는 공간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지 모른다. 시간은 멈추고 나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가을은 나를 붙잡아 세워놓고 자신의 속살을 보여준다. 세속의 시간을 멈추게 하고 한낮 통속적인 잡지에 불과한 나를 돌아보게 한다. 누구든 한 인생을 몇 개의 문장으로 결정지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은 복잡한 회로를 단순화시켜 소박한 삶의 의미를 농축해 내는 동기를 만들어준다. 가을 속 깊이 매몰될수록 그 에너지는 상승한다. 가을의 끝은 겨울이리라.


그렇게 나는 가을 산에 갇혀 4시간 동안 헤매다 빠져나왔다. 계곡으로 접어들어 가다 보면 내리막길도 완만해지고 사방댐도 보인다. 그리고 멀리 전봇대도 보이고 농가 지붕도 시야에 들어온다. 독한 위스키처럼 진했던 가을 향기가 아직도 해독되지 않고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깨질 것 같은 파란 하늘이 나를 보며 '오늘도 욕봤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나는 그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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