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나들이

가을의 정취 속에 추억을 소환하다

by 새로나무



1995년 한남동에 살던 시절부터 청계천 고가도로는 없어서는 안 될 길이었다. 중앙분리대가 없어 약간 아슬아슬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빠르고 단순했다. 고가도로를 없앤다고 했을 때 교통대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처음 청계천 길이 오픈되었을 때 도심 한가운데로 맑은 물이 흐르고 양쪽으로 산책할 수 있는 길이 생겨 아이들과 여러 번 갔다. 여름에 아이들이 물에 뛰어들어 물장난을 하고 놀던 모습이 선하다.


사람들과 어울려 일을 하고 그 속에서 서로 깊은 정을 쌓고 다시 헤어지면서 아쉬움을 달래는 시간에 만약 음식이 없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할 것인가? 음식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이고 잠깐 동안 그 음식 앞에 건조한 낮의 일들을 잊게 만들며, 한 끼니 든든하게 채워줌으로써 잠깐 동안 무념무상의 상태로 이끌어준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걱정도 어떤 불안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청계천 개울물 수면 위로 도심의 불빛들이 은은히 비친다. 빛이 비치는 각도는 불빛의 성격에 따라 달라서 걷는 동안 다양한 불빛들을 보게 되었다. 사선으로 길게 뻗은 빛줄기는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계속 이어진다. 잠시 앉아 그 불빛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억제한다. 밝은 도심을 조금 벗어나니 벽은 덤불이 올라있고 수양버들이 하늘거리며 다른 나무들이 조그마한 숲을 만들고 있다. 그 숲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아늑한 기분을 느꼈다. 잠시 동안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내 마음도 다른 모든 일과 상념으로부터 해제되어 오직 내가 디디는 발걸음과 청계천 이 둘만이 대화를 나눈다.


청계 2가 옆은 종로 2가다. 1987년 대학에 입학한 뒤로 종각 서점에 들러 책을 보고 고르는 낙으로 자주 왔었다. 4층인지 5층인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책 향기 속에서 보물 찾기를 하는 낭만을 느낄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청계천 3가. 바로 옆 종로 3가에는 역시 지금은 사라진 <뮤직랜드>가 있었다. LP판을 사기 위해 한 달에 두세 번 들렀던 곳이다. 서울음반과 데카와 도이치 그라모폰 등의 LP판들을 스무 장씩 사서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와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느긋하게 누워 원하는 음악을 듣던 추억도 아득하다.


밤공기가 찬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다. 모두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있고 나 역시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만 빼면 참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몇 쌍의 연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단에 걸터앉아 담소를 나눈다. 약간 취한 사람도 가끔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산책 겸 운동 겸 나온 사람들이다. 코로나는 확실히 사람들의 통행량을 줄여놓았음을 느낄 수 있다. 1년에 한두 번은 청계천을 걷는데 그때에 비해 사람들은 많이 줄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보내고 강릉으로 고등학교를 유학을 가면서 어머님께서 선물해주셨던 빨간색 금성 카세트로 처음 접한 FM을 통해 그동안 단편적으로 들었던 팝의 세계는 쓰나미처럼 나에게 밀려왔다. 고3 올라가며 더더욱 분발하라고 사주신 삼성 mymy 카세트로 처음 들은 곡이 Murray Head의 <One Night In Bangkok>이었다. 소리에 관한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아 그 노래의 전주가 얼마나 웅장했던가, 지금도 뇌리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 4가 세운상가를 찾았다. 1980년대 후반 소형 미니카세트는 젊은이들의 필수품이었다. 지금은 대한민국산 전자제품이 월등히 앞서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추세지만 당시만 해도 일제 소형 카세트는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이 세운상가 안을 누비며 소니, 아이와 카세트를 연신 비교하고 이걸 들어보고 저걸 들어보면서 무엇을 살 것인지 갈등했었던 기억도 아득하다. 뛰어난 음질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둥지를 만들고 음악을 듣는 재미에 흠뻑 빠진 기억이 새롭다. 음질에 대한 갈증은 더 좋은 음질로 채울 수 밖에 없다.


어느덧 밤 10시를 넘어서고 평화시장을 지나고 있다. 벽에 붙은 잎들이 하나둘씩 줄기들과 이별을 준비하는 모양을 보며 가을의 끝자락에 와있음을 새삼 실감한다. 길은 잠시 멈춰서 있어서 깜짝 놀라다가 왼쪽으로 커다란 돌 징검다리가 있다. 돌을 하나씩 밟으며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물을 쳐다본다. 지나온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저기 흐르는 물과 같은 흐름이라고 감정이입을 잠시 해보았다. 지금 그 물의 흐름을 지켜보는 지금 이 순간이 그 물에게도 지금 이 순간이다. 우리는 그렇게 순간을 잠시 마주치고 흘깃 쳐다보고는 각자의 갈 길을 간다.


이제 왼쪽으로 꺾어지면 종암동으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왕십리로 가는 길이다. 이왕 길을 나섰으니 쭈욱 청계천 길을 걷는다. 왕십리에서 전철을 탈 것인지 아니면 한강변으로 나갈 것인지 생각하다가 오늘만 날은 아니니 왕십리 정도에서 걸음을 멈추기로 한다. 청계천 8가는 왠지 그 이름만으로도 아득하다. 처음으로 턴테이블과 스피커, 앰프를 사서 자취방에 설치하고 매일매일 지지직거리는 바늘의 움직임 속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별다른 희망의 열정을 찾지 못했던 나를 따뜻하게 위로했다.


코로나로 움츠려 든 마음을 잠시 펴고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흠뻑 신선한 공기도 들이켰다. 지나간 시간들을 밟으며 쌀쌀한 기운을 밀어내고 따스하고 아늑한 기운을 채웠다. 도심의 불빛은 물에 반사되며 작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파장을 만들어냈다. 작은 숲들과 수양버들과 나뭇잎들은 돌과 시멘트 길의 차가움을 능히 덮고도 남았다.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서로 거기에 있고 서로 걷고 있음으로써 서로에게 안심을 선물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빛나는 추억 하나를 건져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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