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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Aug 02. 2021

더위 피난 - 팥빙수의 추억

수원화성행궁 앞공방거리


팥이라는 단어 안에는 수많은 감정과 추억들이 들어있다.

1년에 한 번 한겨울에 먹던 팥죽은 달지 않은 단맛이 가득했다. 

걸쭉한 죽도 맛있었지만 찹쌀로 빚은 새알의 쫄깃한 식감은 

한겨울 골짜기에 몰아치는 찬바람을 저 멀리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더운 여름날 얼음을 갈아 만든 팥빙수는 얼마나 맛있었던가?

팥에 듬뿍 들어간 설탕 때문이다. 달달한 팥과 연유, 콩가루들이

얼음 알갱이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내는 맛은 단순히 시원함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동안 먹었던 개별적인 팥빙수들의 모습이 여름날의 추억들과 함께 한꺼번에 밀려온다.



20여 년 전 수원화성 행궁을 복원하면서 이 골목은 아무것도 건축하지 못하도록 규제했었다고 한다. 

점점 사람이 떠나고 그래서 시에서 이곳을 공방거리로 만들기 위해 작가들을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조성된 골목 가게들의 임대료는 처음에 15-20만 원 하다가 지금은 150-200만 원 한다고. 

그래서 점점 공방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고 가게 <단오> 사장님은 말씀하신다. 

임대료 걱정 안 하고 장사할 수 있는 곳은 불가능한 일인가?

조금만 잘되면 급하게 임대료를 올리는 탐욕을 제도적으로 억제할 수는 없는가?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는 결국 자영업자와 그 가게에 오는 손님에게 밀려오고 

최후에는 임대사업자에게도 밀려온다는 것을 잘 몰라서 이러는 것인가?

초창기부터 가게를 운영해오셔서 그런지 하실 말씀이 많으시다.

들어드리는 것만으로 어떤 도움을 드릴지 알 수 없지만 깊이 공감하게 된다. 


아주 오랜만에 달큼한 팥빙수를 먹었다. 옛맛이 살아있다. 

거친 얼음들은 더위를 씻어내기에 충분하다. 

요즘은 얼음 알갱이들을 아주 미세하게 분쇄하는 것이 유행이지만

난 그래도 거친 얼음 알갱이가 더 좋다. 

손으로 돌리던 팥빙수 기계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 때는 얼음 가는 기계를 직접 사서 집에서 갈아먹었던 추억도 같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진한 커피를 못 마시므로 처음에는 아예 1/4샷을 주문했다. 

지금은 그대로 원샷 혹은 투샷을 주문한다. 

그리고 따뜻한 물을 한 컵 달라고 해서 커피를 희석해서 마신다. 

짙은 커피 향이 옅은 커피 향으로 바뀐다고 해서 커피맛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옅은 커피맛은 입안에서도 위에서도 부담이 없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먹고 다시 찬 팥빙수를 먹는다. 

나의 입은 분명한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아메리카노는 더욱 커피맛을 내고 팥빙수는 더욱 단맛을 낸다. 

이 상호작용 안에서 나는 조금씩 허물어진다. 

이런 걸 휴식이라고 하나 아니면 힐링이라고 하나 

어디 외딴곳이나 멋진 곳에 가야 휴양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있는 곳 혹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모두 휴양지라고 생각한다. 


짙은 재즈 선율에 매혹적인 목소리가 흐른다. 

창밖은 찌는 듯한 더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밖이 보이는 창가 좌석은 그 극명한 경계선 사이가 주는 아늑함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이 더위에 맞선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실내 곳곳에 장식된 물건들은 아기자기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숨은 그림을 찾듯 인테리어 소품 하나하나를 관찰한다.  

오래전 보았던 도기를 감싸고 있는 전선들 목각인형과 솟대, 

그리고 매달려있는 헝겊인형들이 계속 선풍기 바람에 춤을 춘다.

한 사람의 생각이 만들어놓은 공간의 깊이를 음미하다가 

살짝 졸음이 밀려온다. 

한가로운 오후 한나절 시간은 여유롭게 흐른다.  

프랜차이즈 가게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저렴한 임대료에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며 

만들어갈 자영업자들의 천국을 꿈꾼다.  

그런 천국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일상의 작은 휴식 공간을 그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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