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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Mar 27. 2022

추운 봄소풍 녹여주는 국물

백숙(白熟)이란 원래 고기나 생선 등을 물에 넣고 끓인 요리를 총칭한다. 현대에 와서는 주로 닭고기를 푹 삶아 내놓는 음식, 즉 닭백숙을 일컫는다. 간혹 닭 이외의 다른 조류(주로 오리)가 들어가기도 한다. 색깔이 들어간 양념을 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닭을 삶아서 내놓는 것이 정석이다. 다만 국물이 느끼해지고 잡내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늘은 많이 넣는다. 그 밖에 넣는 재료는 황기, 대추, 양파, 대파, 옻나무, 음나무 정도다. 


재작년에 정부기관 국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안 된 벗이 퇴직을 하기로 했다고 연락이 왔다. 우리 나이가 벌써 그럴 나이인가 싶다가 문득 아니 국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왜?라고 의문을 품자, 그동안 깊이 고민해왔는데 틀에 박힌 공무원 생활을 떠나 좀 더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일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나로서는 감행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새로운 분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기존 일을 하며 쌓아두었던 자산과 내공을 모두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하다. 나는 그게 겁난다. 익숙한 길을 접고 새로운 길로 발걸음을 내딛을 용기는 아직 아스라한 저편에 머물러 있다. 


3월 중순인데도 사방에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맘 때면 피었을 개나리와 진달래도 보이지 않으니 벚꽃과 목련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쌀쌀한 기운이지만 그래도 바람이 불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다섯 시간 걸어갈 동안 시간은 정오를 지났는데도 쌀쌀한 기운은 녹을 생각을 않는다. 





얼어붙은 몸을 녹여줄 음식이 간절하다. 처음 가보는 식당. 백숙이면 다 같은 백숙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다. 한두 가지가 아니고 대략 15가지 약초를 넣어 끓이고 있었다. 이미 한번 끓이고 잠시 불을 꺼두었다가 다시 불을 지핀다. 펄펄 끓는 국물의 쉼 없는 운동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게 안 진한 약초 향기는 오늘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온 것이다. 한 사람을 한 번에 설명할 수 없듯이 오랫동안 내공을 쌓아온 음식도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국물 맛을 보면 그 음식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맛있는지 얼마나 몸에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아 사람도 이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다.


국물 한 모금 입안에 문다. 입안에서부터 장 저 끝자락까지 아늑하고 따뜻한 온기가 동심원처럼 퍼져간다. 

계속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그 사이에 백숙 먹기 좋게 같이 끓였던 약초들을 거두신다. 모양이 제각각이고 뭔가 몸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이 즐비하다. 생각 같아서는 하나씩 하나씩 그 명칭과 사물을 물어보고 싶지만, 알려줘도 다 잊어버릴 것만 같다. 기름기 적당한 국믈의 질감은 기름지지 않고 아주 깔끔하고 선명한 인상을 입안에 남긴다. 냄비에 자석이 달린 것처럼 점점 더 국물 쪽으로 몸이 끌려간다. 어느새 뒷목에 땀이 흥건하다. 얼음에게 신경을 달아준다면 이런 느낌일까? 어릴 적 눈밭을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연탄아궁이로 지피는 아랫목에서 된장국을 먹으면 느껴지는 그런 녹는 느낌이 밀려온다.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 장군이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 강상류로 올라가 어느 밥집에서 국물을 먹으며 하는 말 "백성들의 국물은 깊고 따스했다"은 진리처럼 생각된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국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백숙 국물이 나를 만져주고 있다. 나도 이 국물처럼 깊고 따스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풍의 추억을 뒤로하고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다. 봄소풍의 아스라한 추억이 한동안 먹먹한 가슴을 두드릴 것 같다. 봄소풍에 붙어있는 백숙 국물의 진한 향기 역시 한동안 입안에 맴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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