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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Sep 18. 2022

여름의 끝자락을 지켜주는 음식들

거실 에어컨이 두 번 고장 난 뒤로는 그대로 방치해두었다. 그 덕분에 11년째 선풍기로 여름을 나고 있다. 아이들 방 두 군데 에어컨 작은 것을 설치해 두었지만, 올여름엔 한 번도 그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나이 탓에 더위에 적응한 것인지 아니면, 매일 적어도 30분 이상 스피닝 자전거를 탄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그냥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덧 여름의 끝을 잡고 있다. 옛 어르신들은 겨울에 찬바람이 부는 방에서 냉면을 드셨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겨울에 시도해보지 못했다. 여름에 먹는 평양냉면은 시장기와 갈증을 동시에 해결해주는 음식, 아니 음식이라기보다는 약에 가깝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는 것은 아쉽지 않지만 평양냉면을 자주 접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 길을 나섰다.

늘 평양냉면 국물을 대하면 숙연해진다. 한 모금 깊이 입안에 넣고 그 국물이 만들어지던 시간을 음미한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처음 평양냉면을 대할 때의 신선한 그러나 절망적인 추억을 떠올린다. 무맛의 맛에 저으기 당혹스러워했던 기억과 함께 조금씩 익혀가면서 서서히 그 맛에 깊이 빠지던 프로세스들이 밀려온다. 애초에 처음 이 음식을 만들었던 조상들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이 기막힌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서로 웃음 지었을 모습을 상상한다. 


늦더위로 생긴 땀방울을 가라앉히는 동시에 메밀의 향이 가슴 깊이 밀려온다. 한 끼니 속에 숨어있는 식재료를 만들어내던 사람들의 수고로움과 뜨거운 주방에서 국물을 만들어내던 사람들의 정성이 담긴 거룩함을 생각한다. 한 끼니 안에서 위로를 받고 아늑해지며, 일상의 팍팍한 무게를 덜어낸다. 국물의 깊이는 느끼는 자의 몫이라. 어느덧 수심 100m 정도 되는 깊이 중 5m 근처에 도달했다. 앞으로 95m를 더 느껴야 한다는 숙제를 떠올리며 슬며시 즐거운 미소를 짓는다. 



명태는 상태에 따라 생태, 동태, 북어(건태), 황태, 코다리, 백태, 흑태, 상태 등으로 불린다. 생태는 싱싱한 생물 상태를 이르며 동태는 얼린 것, 북어(건태)는 말린 것이다. 황태는 한 겨울철에 명태를 일교차가 큰 덕장에 걸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얼고 녹기를 스무 번 이상 반복해 노랗게 변한 북어를 말한다. 얼어붙어서 더덕처럼 마른 북어라 하여 더덕북어라고 불리기도 한다. 코다리는 내장과 아가미를 빼고 4~5마리를 한 코에 꿰어 꾸덕꾸덕 말린 것이다. 그밖에 하얗게 말린 것을 이르는 백태, 검게 말린 것을 이르는 흑태, 딱딱하게 마른 것을 이르는 깡태 등이 있다. 성장 상태에 따라 어린 명태를 애기태, 애태, 노가리라고도 한다. 잡는 방법에 따라 그물로 잡은 것은 망태(), 낚시로 잡은 것은 조태()라 이르며, 잡힌 지방에 따라 북방 바다에서 잡힌 것을 북어(), 강원도 연안에서 잡힌 것을 강태(), 함경도 연안에서 잡힌 작은 것을 왜태()라고 한다. 함경남도에서 섣달에 잡힌 것은 섣달받이, 동지 전후에 잡힌 것은 동지 받이라고도 한다.  짝태는 명태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빼고 소금에 절여서 넓적하게 말린 것으로 원래는 북한말이다. 


지난 더운 여름을 식혀주던 생맥주에 짝태를 만난다. 처음에는 마른 짝태를 먹다가 치과진료를 다녀온 뒤 잘 구운 짝태를 물에 담가봤다. 씹는 촉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졌으며, 바다에서 헤엄치던 질감을 물에 적시니 오히려 더 느낄 수 있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은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도 생각나는 맛이 되었다. 시원한 생맥주를 한잔 마시고 구운 김에 물에 적신 짝태 한 점과, 계란말이 한 조각, 마요네즈에 적신 고추 슬라이스에 짝태 껍데기 한 조각을 올리고 매운 양념을 올리고 연한 간장에 찍어 한 입 먹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생맥주가 쓸고 간 황량한 입안을 가득 채우는 맛의 향연 앞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다음 할 일은 명확하다. 했던 일을 되풀이한다. 첫 한잔의 생맥주 중에서도 가장 앞서 마신 한 모금의 효용가치가 가장 크다. 그렇다고 뒤 따르는 한 모금들이 결코 맛으로 뒤처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더위를 털어내는 효용은 앞선 한 모금이 우선이다. 짝태는 생각보다 양이 많아한 끼니를 넉넉히 커버한다. 하루 동안 더위를 덜어내고 신선한 잠을 한 모금 청한다. 한 끼니가 선물이자 축복이며, 약이라는 꿈을 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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