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사가 되기로 했다_chapter2]
“진규야, 잘 지내지? 과 사무실 선생님이야.”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 대학교 학과 사무실 선생님의 전화였다. 내가 풋내기 과학생회장이었을 때, 여러모로 세심하게 도와주셨던 정말 은인 같은 분이다.
“네, 선생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응, 이번 졸업식에 학과 대표 기수단으로 학생회장이었던 너를 추천하려고 전화했어. 이번 졸업식 참석하지?”
“음... 아... 졸업식이 언제죠?"
“다음 주 금요일이야. 우리가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조금만 일찍 오면 될 것 같아.”
“네 선생님, 다음 주에 봬요.”
에라 모르겠다. 일단 질렀다. 한쪽 눈을 감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내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대학 내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우리 화공과를 대표해 졸업장을 받는 기회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
1주일. 좋다.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면 된다. 아니 반드시 되게 할 것이다. 아직 가까운 물체와 먼 물체를 구분하지 못하고 절뚝거리며 걷고 있지만, 처음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발전이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과 똑같다. 1주일. 이번에도 충분하다.
목표는 단순했다. 적당히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자연스럽게 걸어가 계단을 올라 물건을 내려놓고 돌아오면 된다. 그게 전부였다. 옛말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날부터 물리치료사 선생님과 비밀 훈련을 시작했다. 가벼운 물건부터 시작했다.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부터 하나씩 고쳐나가야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자꾸만 왼쪽으로 몸이 기울어 넘어지다 보니 왼쪽 다리에는 크고 작은 멍들이 가득 생겼다. 계단 오르내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루에 계단 두세 칸을 100번씩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지루하고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연습의 연속이었지만, 그 반복 속에 조금씩 나아지는 내가 있었다.
‘여기가 학교 대강당 단상 계단이다. 넘어지면 평생 놀림거리다. 큰일 난다.’
재활치료실에서 나 혼자 다른 세계에 있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 걸음에 집중하고 있다. 비록 겉모습이 달라졌어도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한다. 이미지 트레이닝 속 나는 진심을 다해 걸었다.
드디어 물리치료사 선생님의 도움 없이 가벼운 물건을 들고 혼자 걷기에 성공했다. 특훈 4일 차였다. 목표가 가까워지는 느낌에 가슴이 뛰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림돌이 더 있었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아빠가 아침 회진을 마치고 급히 떠나려던 주치의 선생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포항까지 다녀오려면 주치의의 외출 허락이 필요해서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주치의 선생님은 일단 알겠다며 자리를 떠났고, 얼마 뒤 돌아와 조심스레 말했다.
“아버님, 제가 교수님께 말씀드려 봤는데 아직 회복이 덜 되었다고 안된다고 하시네요.”
“아니에요, 선생님. 저 연습 엄청 해서 이제 잘 걸어요. 어떻게 안될까요...?”
나는 아빠와 주치의 선생님의 대화를 엿듣다가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끼어들어 고집을 피웠다.
“음... 그럼 이렇게 하시죠.”
한동안 고심하던 주치의 선생님은 누가 몰래 듣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졸업식이 포항이라고 하셨죠? 새벽 일찍 출발하세요. 제가 아침 회진 때, 교수님께 어디 산책 가셨다고 말씀드릴게요. 대신, 저녁 먹기 전까지 꼭 오셔야 해요.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께는 제가 미리 말해 놓을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주치의 선생님의 따뜻하고 정감 가는 이야기에 아빠는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선생님은 살짝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를 더 남기고 병실을 떠났다.
“제 개인 번호 알려드릴게요. 혹여나 넘어지거나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 바로 전화하셔야 합니다. 꼭입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졸업 정말 축하드려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담당 교수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출을 허락해 주었다가 혹여나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나라면 하루 종일 신경 쓰였을 것이다. 더구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전공의 업무 가운데 굳이 성가신 일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안됩니다.’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치의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사람 냄새가 났다. 은밀히 전하는 비밀 작전과 수줍게 건네는 축하 인사 속에 선생님의 진솔한 매력이 묻어났다.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비밀은 우리 사이를 더 끈끈하게 했다. 나는 환자와 함께 울고 웃는 선생님의 모습에 든든한 내 편이라고 느꼈다.
삐리리리리. 새벽녘 고요한 병실에 울려 퍼지는 알람 소리가 졸업식 비밀 작전의 서막을 알렸다. 우리 가족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누나는 내게 안경알 없는 뿔테 안경과 베레모 모자를 씌워줬다. 이리저리 각도를 고쳐봐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이 정도면 됐다고 안타까워하는 누나를 애써 달랬다.
잔뜩 긴장한 탓이었는지, 차에 오르자마자 스르륵 눈이 감겼다. 잠결에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익숙한 캠퍼스 풍경이 보였다. 고향에 온 듯했다.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 캠퍼스 모습과 예전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내가 원래 있던 곳, 마음껏 뛰어놀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차. 아직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긴장의 끈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중요한 미션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다시 한번 양 주먹을 꽉 쥐고,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실으며 연습을 해본다.
“진규...? 진규 맞니...? 진규야...!”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학과 사무실 선생님은 내 모습을 몇 번이나 다시 훑어봤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떡해'라고 중얼거리며 내 팔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뒤에서 바라보던 우리 가족도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어머님,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우리 진규 오늘 졸업식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확실히 에스코트할게요.”
선생님께 졸업식 진행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듣고, 학위복으로 갈아입은 뒤, 졸업식장에 들어섰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 자리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했을 때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믿기지 않는다. 내가 졸업이라니.
“어...? 누구...? 진규형...?”
“에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친한 후배들이었다. 나를 못 알아본 모양이다. 멀어지는 후배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머리는 괜찮다고 했지만 마음은 아프다고 했다.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내가 괜한 욕심을 낸 건 아닐까?’,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평생 남는 졸업사진에 이런 모습으로 찍히는 게 맞을까?’ 졸업식은 활기차고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어둡고 가라앉았다.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야, 이진규! 땅 꺼지겠다. 네가 뭐 잘못한 거 있냐? 얼른 사진 찍어줄게. 쳐져 있지 말고 당당하게 웃어!”
누나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얼른 서보라고 했다. 못 이기는 척 지나가는 동기를 붙잡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름 한껏 웃어보지만 아직 얼떨떨한 표정이다. 그래도 누나 덕분에 사진 몇 장을 건졌다. 씩씩한 누나가 든든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그동안 물리치료실에서 갈고닦았던 실력을 보여줄 차례다. 학과 깃발을 양손으로 꽉 쥐고 들어본다. 꽤 무겁지만, 못 들 정도는 아니다. 깃발을 들고 가볍게 몇 걸음 걸어본다. 다행이다. 연습한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규야, 우리가 위에서 보고 있을 테니까 언제든지 안 되겠으면 말해.”
부모님은 그저 걱정, 또 걱정이다. 우리 가족은 위층 객석에 앉아 졸업식을 지켜봤다. 아무도 모르는 우리만의 올림픽이었다. 피땀 흘린 시간을 무대에서 인정받는 선수들처럼,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행렬을 따라 걸었다.
행렬은 물 흐르듯 순조로웠다. 하지만, 나는 물 밑에서 발버둥 치는 백조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방심할 수 없었다. 단상에 올라 깃발을 꽂아 넣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그 어떤 월드컵 결승전이나 올림픽보다 긴장되고 손에 땀을 쥐는 순간이었다.
‘휴, 끝났다. 다행이다.’ 이제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단상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왼쪽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휘청거렸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찰나, 왼쪽 팔을 뻗어 땅을 짚고 다시 균형을 잡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걸었다. 위에서 지켜보던 가족들과 옆에 있던 학과 사무실 선생님만 천국과 지옥을 오갔을 뿐이었다.
졸업식의 마지막은 화공과 건물에서였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주임교수님으로부터 졸업장과 성적 우수상, 최우수 연구상을 받았다.
첫 발을 내딛는 것만큼 지나온 길을 매듭짓는 일은 중요하다. 양손이 가득한 채로 졸업식장을 나설 수 있어 좋았다. 수년간 치열하게 공부했던 내가 강의실 곳곳에 묻어 있어서 더 좋았다.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겠지만, 후회는 없다. 내 삶에서 가장 빛났고, 행복했으니까.
크게 다친 모습으로 졸업식에 와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내 손에 쥐어진 모든 것들, 그리고 빛나는 순간들이 내가 잘나서 얻었다고 착각할 뻔했다. 내 힘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내 곁에는 학과 사무실 선생님, 동기들, 선배들, 교수님들이 있었고, 물리치료사 선생님과 주치의 선생님,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직소 퍼즐의 한 조각처럼, 하나라도 없었다면 내 삶의 그림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치의 선생님과의 비밀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정말 기분 좋은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라러로루러' 100번을 뱉어본다. 원래 있던 곳에 돌아가기까지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