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1초를 빌려사는 삶

[나는 의사가 되기로 했다_chapter2]

by 이진규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남긴 격언이다. 어제가 있으면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간다. 만약 내일이 없다면? 오늘 잠자리에서 눈을 감는 순간을 끝으로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을까?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나는 왜 기적적으로 살아난 걸까? 그저 운이 좋았던 걸까?’

내 운이 얼마나 극적이었는지를 되짚어 보았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택시에서 내려 낯선 새벽 거리를 네 시간이나 헤매다 간신히 집을 찾아야 한다. 손상으로 12시간 넘게 방치되었음에도 뇌척수액을 바닥으로 줄줄 흘리며 숨이 붙어 있어야 한다. 얼마 전 들어온 인턴이 술자리에서 외쳤던 자기 집주소를 누군가 기억해 내야 하고, 그 집에 무작정 찾아갔을 때 문을 열어줄 집주인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개두술이 가능한 신경외과 의료진과 중환자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우연과 필연이 기적처럼 맞아떨어졌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아니, 양심이 찔린다. 기적을 경험하고도 기적임을 알아채지 못한 사람에게 더 이상의 기적은 없다.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내 앞에 두 갈래 길이 놓였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치부하며 눈과 귀를 닫고 원래 살던 대로 앞만 보며 더욱 치열하게 사는 길, 혹은 내게 기적을 보여준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의 뜻을 기억하며 사는 길. 중간은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진짜 신이 있는 걸까?’


어딘가 불편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데 도대체 어디에 뭐가 있단 말인가. 확실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빠 손에 이끌려 간 교회에도 없었다. 내 눈에 교회사람들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착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처럼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믿고 싶진 않았다.


과학을 배우고 이성의 세계에 눈을 뜬 내 마음속에는 합리주의가 자리 잡았다. 실험으로 증명된 과학적 사실 외의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종교란 살다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기대고 싶은 인간의 욕구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나름 좋은 점도 있었다. 나는 시험기간에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이따금씩 교회를 찾았다. 티 없이 깨끗하고 신성한 분위기 속에서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찬양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솔직히 내가 그때 말을 너무 심하게 하긴 했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엊그제 친구에게 홧김에 뱉었던 말도 반성해 본다. 그때, 곧게 빗은 생머리에 분홍빛 머리띠를 하고 청순한 원피스를 입은 채 앞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여성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앞모습이 궁금해 미치겠다.

‘예배 끝나고 말 걸어 봐야지’

아뿔싸, 간식받으러 간 사이에 그녀가 사라졌다. 다음 기회를 노려보기로 한다. 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다.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다. 일단 신이 있다고 가정해 보기로 했다.


‘그럼 신은 어떤 존재일까?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 삶의 의미를 결정짓는 중요한 질문 앞에서 ‘신’이라는 존재가 등장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그날부터 닥치는 대로 신에 대해 파고들었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부터 시작했다. 각 종교는 나름의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중 가장 거슬리는 것이 기독교였다. 일단 지독한 문어체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가로되', ‘~하나이까’, ‘~하시니라' 읽을 때마다 툭툭 끊기는 느낌에 몇 번이고 읽던 성경책을 덮었다. 게다가 빼곡히 적힌 조그마한 글씨는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힌트는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렇다. 기독교에서의 신, 하나님은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내가 아는 사랑은 서로를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데이트하고 뽀뽀하는 그런 모습뿐이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분명 내가 알던 사랑이 전부는 아니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깊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간이침대에 쪼그려 누워있는 누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는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 가져다준 음료수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옆에는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직접 끓여 보내주신 보신탕 국그릇과 엄마가 정성껏 만들어 보낸 오리고기반찬통이 놓여 있었다. 책장 위에는 병원 목사님이 손수 써주신 편지와 둘째 큰 아빠가 챙겨준 천마가루, 그리고 사촌누나가 박스채로 가져다준 초코땡 과자가 있었다.


정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내 주변은 사랑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병실을 사랑방처럼 채워주었던 고마운 이들의 따뜻한 마음과 포항에서 서울까지 수시간을 달려와 병문안을 기꺼이 감내해 준 수고스러움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중환자실 앞 노숙의 날들 속에서도 내가 눈을 떴다는 소식만으로 뛸 듯이 기뻐했던 누나가 있었다. 내가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 한다면 병간호를 위해 생계를 포기할 각오를 했던 아빠도 있었다. 그리고 큰 사고 소식에 털 끝만 스쳐도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절망 속에서도, 내가 결국 이겨낼 거라는 믿음을 끝내 잃지 않았던 엄마가 있었다.


그 어느 것 하나,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이해한 사랑이었다. 암흑 같은 절망 속, 희망의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자리에 잔잔히, 그러나 은은하게 내리쬐는 따스한 생명. 늘 곁에 있었지만 익숙함에 묻혀 알아채지 못했던 것, 그러나 그 무엇보다 소중해서 오늘의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랑을 몰랐던 예전의 나는 죽었구나. 지금의 나는 사랑이라는 큰 빚을 지고 1분 1초를 빌려 살고 있구나. 두 번째 인생은 그 빚을 사랑으로 갚으며 살아야겠다.’


나는 마치 전쟁에서 패배한 병사처럼 이성이라는 무기를 내려놓았다. 나에게 두 번째 삶을 허락한 신이 사랑이라면, 최소한 내가 이해한 사랑이 그것이 맞다면, 나는 기꺼이 항복하기로 했다. 아니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따뜻하고 더 좋은 것은 없었으니까. 차가운 이성보다 따스한 사랑이 내게 훨씬 소중했으니까.


1분 1초를 빌려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가는 지금도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랑하고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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