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 청하기 연습과 거절당하기 연습

자녀 독립 근육 키우기 #8

by 하다

초등학교 3학년 첫째는 매주 월요일마다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 A4용지를 꽉 채운 급수표를 가방 속에 넣어놓고 매일 똑같이 따라 쓰는 숙제를 한다.


지난주 일요일 저녁, 갑자기 첫째가 다음날 할 받아쓰기 시험이 생각났는지 허겁지겁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가방에서 무언가 찾기 시작한다.

"이상하다. 분명히 가지고 왔는데? 첫째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방에서 새어 나온다.


"뭐 안 가지고 왔어?'

"어, 받아쓰기 표가 없어"

"학교에서 안 가지고 왔어?"

"이상하다. 분명히 가방에 넣어놨는데" 첫째의 대답과 함께 울먹임이 시작된다.​

"나 숙제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어엉~~~" 급기야 눈물을 글썽이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일요일 저녁 교실로 찾아갈 수 없는 노릇이고, 선생님께 급수표를 달라고 전화도 할 수 없다. 반쯤 포기한 상태로 '그냥 내일 일찍 학교 가서 공부해'라고 말하려는 찰나! 같은 반 친한 친구 아이가 생각났다.​


"그럼 반 친구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 첫째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지금 9시인데, 자고 있을 거 같아. 싫어" 라며 첫째는 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나는 아이가 내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혹시나 친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닐지? 자기가 부탁한 도움을 거절 하진 않을까? 친구와 놀 때를 제외하곤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 경험이 거의 없는 데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는 흔치 않은 남자아이이기 때문에 더더욱 도움 요청이 어려웠을 것이다.​


"시원이 혹시 친구가 싫어하거나,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응 ㅠㅠ"

"시원아. 만약에 시원이 친구가 받아쓰기 급수표가 없다고 시원이에게 연락하면 도와줄 거야?"

"응, 도와줄 거야"

"그럼 도와주고 나서, 시원이는 기분은 어떨 것 같아?"

"몰라"

"응. 아무 생각이 없어. 그냥 도와주는 거야. 친구도 마찬가지야. 시원이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 친구도 도와줄 거야. 그리고 그 친구가 도움을 안 줄 수도 있어. 그건 시원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 상황이 되지 않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걱정하기 말고 전화해봐"

"응 알았어" 첫째는 대답을 했다.


시간이 10분쯤 지난 후 나는 친구한테 전화를 했는지 궁금해 아이에게 물었었다.


"친구한테 전화해봤어?"

"아니, 전화 말고 문자로 보냈어. 답장이 아직 없어."

"문자가 안 오면 전화를 해도 돼"​


답장이 오지 않아 전화도 해봤지만 대답이 없다고 한다.​


이젠 엄마가 나설 때 인가? 다행히 어린이집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라 그쪽 엄마에게 카톡으로 직접 연락을 했고 필요한 받아쓰기 급수표를 5분도 되지 않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아이 전화기가 다른 방에 있어서 못 봤나 보네요."

첫째 아이의 부탁은 답장 없는 전화로 거절이 되었다. 거절의 이유는 너무 단순했다. 친구가 부모님과 다른 것을 하고 있어서 전화기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


사실, 내가 처음부터 나서서 친구 엄마에게 연락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아이에게 도움을 청할 용기와 거절당할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성인이 되고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야 한다. 갓난아이는 자기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울음으로 대신한다. 부모는 배고프다는 건지, 졸리다는 건지, 응가가 마려운 건지, 틀린 답을 하나씩 걸러내면 마침내 필요한 걸 찾아낸다. 하지만 몇 마디면 쉽게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다 큰 어른들은 갓난아이보다 도움 청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혹시나 내가 이 부탁을 했는데 상대가 불편해하면 어떻게 하지? 혹시 내 부탁을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하지 못하는 것, 특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도움 요청하는 것과 거절하는 것이다.


본인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기 위한 요청만 아니라면 언제나 도와달라고 해도 된다. 하지만 이때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은 "승낙되지 않을 수 있다"라는 것이다.

당신이 [도와달라고 할 자격]이 있다면 누군가는 [도움을 주지 않을 자격]도 있는 것이다. 즉 당신의 [도움 요청이 거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기억해야 할 거절의 의미는 [도움을 줄 것을 거절] 한 것이지, 사람을 거절한 게 아닌 란 것이다.


부탁의 답변은 YES 또는 No. 답은 하나이다. 하지만 그 대답의 이유는 수백 가지다. 전화 소리를 듣지 못해서, 지금 내가 너무 바빠서 혹은 몸이 아파서, 너무 재미있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놓칠 수 없어서, 아이들 밥을 차리고 있어서 등...​


내가 가장 도움 요청을 하지 못했을 때는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신입 때였다. 아무리 일을 해도 줄어들지 않는 일,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일이 많다, 도와 달라'라고 부탁해도 됐건만 밤을 새우고 주말 내내 일을 했지만 결국 몸과 마음은 망가져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너무 힘들게 된다. 너무 잦은 부탁은 불편함을 될 수 있지만 꼭 필요한 것은 해야 한다.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땐 정중하고 예의를 차려야 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이 거절일지라도 그것을 단지 "지금 제가 그 도움을 드릴 수 없네요"라며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절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정중히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것을 도와야 할 것인지 아닌지를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기꺼이 도울 수 있다면 언제든 그렇게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내가 도울 수 없을 때, 하고 싶지 않을 때이다.

거절은 그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지 도움 요청한 사람을 거절하는 것이 아닌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거절한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요청을 하는 사람이 싫어서 거절하는 것도 괜찮다. 거절의 이유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당신을 멀리하거나 싫어한다면 차라리 그 사람과 거리를 멀리하라고 알려주고 싶다. 한 번의 거절로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옆에 둘 필요가 없다. 당신은 존중받고 사랑받을 가치와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받아쓰기 숙제지만 도움을 요청하고 거절당할 기회를 주는 것 또한 자녀 독립 근육을 키우기 위한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