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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07. 2017

치매가 아니라 다행이야

내가 뭐 하려고 했었지?….

마트에서 장을 보다 한참 동안 냉장고 앞에 서있었다. 무언가 반드시 사야 할 것이 있어서 오긴 왔는데 뭘 사려고 했는지 아무리 끄집어내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요새 생각할게 많아서 그런 거라고, 아까 마트 입구에서 어깨를 부딪혔던 사람 때문에 순간 정신이 다른데 팔린 것이라고, 이건 노화의 과정이 절대로 아니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며 다시 마트를 한 바퀴 돌았다. 놀랍게도 처음에 들어왔던 장소로 돌아가니 내가 두부를 사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 두부였어. 그럼 그렇지. 이걸 왜 잊겠어.”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마음속으로 ‘두부, 두부, 두부, 두부를 살 것. 두부.’ 이렇게 여러 번 머릿속에 두부를 각인시켰다. 이제 잊을 리가 없을 테니 안심하고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나 며칠간의 식단을 짜고 이것저것 바구니에 담는 동안 어느새 나는 또 새하얗게 두부를 잊었다. 중요한 건 사지도 못한 채 마트를 벌써 두 바퀴나 돌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또다시 두부가 생각났다. 다음번엔 샛길로 새지 않고 바로 직행하여 결국 세 바퀴 돌아본 후에야 두부를 담아올 수 있었다.


어휴, 이건 내 머리가 늙어 가는 게 아닐 거야. 사람이 그럴 때도 있잖아.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하면서 프라이팬을 새로 사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기 무섭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벌써 몇 번째 하는 말인지를 세어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족히 6번 정도 똑같이 반복된 것 같았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프라이팬의 상태를 보고 새로 사자고 다짐하고, 등 돌리고 나면 바로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이쯤 되니 어떤 핑계를 댈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이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휴… 나 벌써 치매 인가 봐.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메모지에 프라이팬 살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리고‘이 소재로 글 쓸 것’이라고 또 적어놓았다. 이제는 돌아서면 또 잊을 것을 확신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항상 다이어리를 몸 가까이 두고 지낸다. 아주 사소한 스케줄도 모두 적어놓고 작은 아이디어가 생각나도 무조건 적어놓는다. 심지어 대화가 재미있으면 웃음을 참으며 기록한 후에 웃기도 한다. 이렇게 박장대소하면서 웃어도 며칠 후 왜 웃었는지 잊은 경우가 허다했다. 많은 것을 기억하려면 무조건 적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의 기억력보다 메모에 의존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진짜 큰 병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정말로 내가 늙어버린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이런 걱정을 털어놓았더니 친구는 자신은 빨래를 냉동실에 넣었다고 하기도 하고, 다른 친구는 생각나는 것을 다이어리에 써놓아야지 다짐했는데 그 다이어리를 까맣게 잊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를 키우는 친구는 5분 전 있었던 일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전화 다시 건다고 말하고 며칠 동안 연락이 없는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정말 깜박 잊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만 늙어 가는 게 아니라는, 나는 치매가 아니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알아야만 하고 신경 써야만 하는 것들이 그만큼 늘어났단 증거라 생각했다. 이 망각은 퇴화의 과정이 아니라 더 아는 게 많아져서 겪게 되는 발달의 과정이라 여기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릴 때는 사람과의 관계나 내가 처리해야 하는 것들의 영역이 그렇게 넓지 않았다. 성인이 되면서 고민해야 하는 것들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차마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그런 일들을 수없이 마주하면서 머리는 더 복잡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사소한 것들을 지워버리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고생하는 나의 뇌가 대견하기도 하다. 

두부나 프라이팬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만 잊어줘서,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가치들은 여전히 머릿속에 잘 남겨두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억할 수 있어서. 엘리트였지만 지금은 모든 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살 수 있어서. 그래서 정말 다행이다. 




서로 다른 우리가 공존하는 이 시간,

그 시간 속의 일상과 단면을

이야기하다.

그리다.

나누다.

 writing_ jinhee  X  drawing_ p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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