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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호 Nov 15. 2024

요가가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아

<56일 차: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아쉬탕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힘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간밤에 꿈을 너무 험한 걸 꿨습니다. 무서웠어요. 혹시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질까 봐 걱정도 되었고요.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건 이루어지지 않건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요. 그저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불안감은 걱정이 되는 무언가가 있고 현실에서 준비가 되지 않을 때에 주로 증폭이 되곤 하는데 제가 꾼 꿈은 준비 같은 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불안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이, 시간이, 운명이 그렇게 데려간다면 겸손해야 하는 게 맞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불안할 필요도 없으니 그저 오늘을 눈이 부시게 지내면 되는 겁니다. 지금을 사랑하고 내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맛있는 걸 먹고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기분이 금세 휙 바뀌며 맑아지진 않잖아요. 우울하고 두려웠던 기분이 맑음의 스위치를 누르면 바로 딱! 맑고 가뿐하게 변하지는 않을 겁니다. 애초에 우리에겐 스위치란 게 없기도 하고요. 서서히 스스로를 맑게 풀어주기 위해 요가를 갑니다. 


 간밤에 엉긴 마음들을 아쉬탕가를 하며 솔솔 풀어 저 멀리 날아가게 두고, 잠을 설치느라 뻐근해진 온몸을 땀을 흘리며 풀어주러 가야겠어요.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구석에서 고요히 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일찍 나서야 해요. 뒷자리 구석부터 자리가 꽉 차거든요. 평소보다 5분 일찍 집을 나섭니다. 다행히 입구와 가까운 구석에 자리가 남아있습니다. 매트를 펴고 가만히 앉아 살살 몸을 푸는데 하염없이 하품이 나옵니다. 역시 피곤한 겁니다.

 ‘아. 오늘은 하다가 금방 힘이 풀릴 지도…’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못하면 못하는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하면 됩니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다만 오늘은 힘들지만 정성껏 몸을 꾹꾹 누르고 어설프지만 호흡을 담아 마음속 엉긴 것들을 풀어내고 싶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신경 써서 정성스레 동작들에 임해봅니다.


 머리서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동작들을 꼼꼼히 하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삐그덕 대고 덜컹거리는 동작들은 아직 존재하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성스럽게, 호흡을 담아.


 사바아사나-


 모든 동작을 끝을 내고 팔다리에 힘을 풀고 누웠습니다. 잠이 옵니다. 사바아사나 때 살짝 잠이 드시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저는 오늘 처음으로 잠이 들 뻔했습니다. 새벽 내내 고단하긴 했나 봅니다. 잠드는 것만큼이나 기분 좋게 내려놓고 몸에게 휴식을 주었어요. 옆으로 몸을 굴리고 차분히 일어나 두 손을 가슴 앞에 합장합니다.

 “나마스떼”

 “감사합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3월의 봄꽃이 조금씩 피기 시작했습니다. 팝콘처럼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모습들을 보면 에너지가 충만해짐을 느낍니다. 오늘은 햇살도 좋고 공기도 좋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비교적 마음이 안정되었고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 하루도 성실하게, 눈이 부시게, 사랑하며.

 그렇게 살기를!

 요가 덕분입니다.




<57일 차: 만사 다 싫지만 요가는 간다>

 무기력하다. 우울하다. 날씨도 우중충하다. 봄인가. 봄인데 날씨는 왜 이 모양이지. 흐리다. 해가 안 보인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내재된 우울감이 있다. 만성화된, 친구와도 같은 우울감. 아직까지 병원에 가지 않는 건 ‘난 우울증이 아니라구!’ 하는 판단이 아니라, 그럼에도 끼니는 잘 챙겨 먹고 울면서도 빨래는 개키고 밀크티도 만들어 먹고 친구도 만나고 요가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있는 게 많다. 그 밖에도 잔잔바리로 펼쳐 놓은 일들이 많다. 하지만 이 우울감이 지속되어 늪으로 끊임없이 빠져드는 기분이 든다면 그땐 꼭 병원을 가보려 한다.


 심심할 때, 스스로가 궁금할 때 심리학 책을 자주 빌려 읽었다. 그러다 마음에 들면 구입을 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구입한 책들이 꽤 된다. 아마 중고서적에 팔지 않았다면 책장 두 칸 정도는 찼을 거다. 아무튼 내가 하고픈 말은.  나는 ‘불안장애’에 해당하는 어떤 고질적인 병 같은 게 있는 것 같단 거다. 최근 빌려 본 불안장애 아동에 관한 책을 보니 내가 그러한 아동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공감 가는 게 많았다. 기질적으로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기질을 조금은 상쇄시켜 주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아마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안타깝게도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편은 아니다. 자세히 쓰고 싶지만 여기에는 쓰지 않을 것이다.


 내 성격 중 다행스러운 건 이런저런 힘든 일을 겪어도 혼자 울고 화내고 글 쓰고 털어버리지 주위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힘들게 하진 않는 것 같단 거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들 때엔 전화하자마자 엉엉어엉엉 울어버리기도 한다. 보통은 나름 혼자 글을 쓰고 취미활동을 하며, 격한 감정들은 이리저리 다듬고 정제된 몇 개의 문장 정도의 일들로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 때때로 잘 안될 때가 있다. 요즘이 그렇다. 마음 정돈을 하고 스스로 중심 잡는 게 최근 3-4년 동안 꽤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요즘 들어 잘 되지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내 안에 남들도 너무 많고 때때로 내가 나를 괴롭히는 기분도 든다.


 강제적으로 이런 감정이나 생각들을 오프(off)시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다른 것들을 하려니 만사 다 의욕이 없고 귀찮다. 강제 오프시키지 않으면 내가 감당 못할 불안들이 나의 그릇을 범람하고 흘러넘쳐 결국 가까이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봐야 한다.


 강제적으로 오프 시킬 수 있는 것들 중에 최고는 움직이는 거다.

 몸을 움직이는 것.


 요가를 시작하기 전에는 산책이나 헤비메탈을 들으며 격하게 동네 뒷산 오르기를 하며 머리를 비워 내 곤했는데 (헤비메탈을 듣는 이유는, 걸으며 답도 없는 이런 상황들을 막 욕하고 싶지만 밖에서 욕을 할 순 없으므로, 나 대신 f*ck을 외쳐 귀에 꽂아주는 쇠맛 그득한 음악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귀에 피가 나는가 싶을 정도로 음악을 들으며 바깥 운동을 하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요즘은 요가를 간다. 메탈 듣다가 요가라니 너무 중간이 없나 싶지만 요가는 절대 정적인 종목이 아니닷!


 오늘은 하타요가. 가지런히 스트레칭 비슷한 동작들로 시작하다 점점 스스로가 기인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동작들로 나아간다. 아직 다 잘하진 못하지만 기존의 요가들보다 더 구부리고, 뒤로 꺾고, 비틀고, 버티는 동작들이 많다. 이걸 다 해내시는 선생님을 보면 정말이지 어떤 신성한 존재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이왕 여기에 발을 담근 것. 언젠간 나도 저렇게 될 때까지 다녀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모른다. 번복할 수도 있다. 그저 대단한 것 없이, 정기적으로 약을 먹는 대신에 요가를 가는 거다.


 오늘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명상법을 만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좀 뿌듯한 하루였다. 첫 시작 시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하는데, 마음이 유독 탁하고 어지러웠던지라 마음속에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고 나서 환기된 빈 방 한가운데에 고요히 나만의 촛불을 다시 켜보는 상상을 했다. 산소가 없어 답답했던 가슴의 방에 시원한 공기가 통한다. 단 하나의 촛대에 뿅~ 하고 마음속 불씨를 하나 켜서 가만히 가만히 바라보는 상상을 했다.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마음으로 하타요가에 임했다. 물론 너무 힘들 때엔 불씨 따위 생각이 나지 않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그 불씨를 가만히 피우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유독 후굴을 많이 하는 날은 누운 자세에서 무릎을 구부려 가슴팍으로 끌어안는 동작들을 하는데, 나는 이렇게 마음이 힘들 때엔 이 동작이 너무너무 반갑고 좋더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이렇게 꽉 끌어안는 일이 잘 없으니까.  '기특한 녀석. 오늘도 끝까지 열심히 해냈군. 잘하고 있어!' 하고 셀프 칭찬도 해주면 좋다. 이만해도 기분이 살만하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어제 집에서 드디어 머리서기 비슷한 흉내를 냈다! 비록 벽에 등을 대고 시도한 동작이지만 난 생 처음으로 지구를 들어 올렸다… 하하.


 마음이 무기력하고 힘든 분들 요즘 많을 줄로 안다. 비교당하기도 쉽고 가만히 내 일만 할 뿐인데도 세상은 존재 자체로 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숨만 쉬어도 후려침을 당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후려치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혹은 그것들에 휩쓸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고. 아무튼, 이런 세상에서 온전히 내 정신을 보존하며 산다는 건 참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뭐 해답이 있냐고? 요가를 하면 스스로를 보존하며 오똑 설 수 있으니 요가를 추천하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오산… 그런 게 있을 리가.


 그저 이런 시간과 시선, 소리와 문자, 형태와 장소에서 벗어나 작고 작은 매트 위에서 자신을 만나는 건 의외로, 이따금씩, 위로가 되는 행위란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위로가 되지 않더라도 그런 것들로부터 강제로 스스로를 차단시켜 잠시라도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셨으면 좋겠다. 아니 무엇이 되었건 자신만의 호흡 공간, 자신만의 아가미가 될 수 있는 어떤 한 가지를 꼭 가졌으면 좋겠다. 작은 공원의 벤치라던가 문구점 앞의 고양이 쓰다듬기라던가 바닷가 어느 카페에서 멍 때리기라던가 남산 계단 끝에 가만히 서서 바람의 속삭임에 춤추는 나뭇잎 소리를 듣는다던가 옥동자 먹을 때 초콜릿만 남겨놓고 마지막에 먹어보는 등 나만의 아가미 하나쯤은 가져보았으면 좋겠다.


 그런 것들을 하나씩 갖춰보면 조금씩 내가 보이고 나를 아는 재미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그런 것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다시 우울감에 젖을지도 모르고.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줏대 없이 말을 이랬다 저랬다 뭐 어쩌란 거냐고 생각하겠지? 맞다. 삶이 어떻다 저떻다 이게 좋다 아니다 말하기엔 나는 경험이나 연륜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부족한 나라도 확실한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그건 바로 경험만큼 깨달음에 좋은 건 없단 거다. 깊이 있게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통해 경험하고 몸으로 깨닫는 것만큼 좋은 건 없더라. 내가 직접 아는 것. 내 몸으로 아는 것. 그것만큼 확실한 깨달음이 있을까?


 그러니 지금 내 얘기도 하등 쓸모없고, 넘쳐나는 자기 계발 영상도 자신이 직접 겪는 것 만 못할 거다.


 제 글 읽지 마시고 그 시간에 하드 하나 더 사 먹고, 책상도 한 번 더 닦고, 저녁메뉴 따위를 즐겁게 고민해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편의점에 신상맥주가 뭐가 있는지, 요즘 주말 조조영화는 뭐가 있는지, 쌀밥에 현미를 섞을지 보리를 섞을지 따위를 생각해 보는 걸 더 추천드립니다.


 약간 싸구려 위로 같죠?

 네. 싸구려 위로예요. 여기 제 글은 공짜니까요.

 하하하하하!



<58일 차: 하수는 치열하게 요가를 한다>

 요가 58일 차. 대략 5개월의 시간.

 아니 벌써 5개월이라고?! 새삼 이렇게 쓰고 보니 놀랍다. 반년을 가까이 다니고 있다니 벌써? 흠. 대견한 노릇이다. 내가 이렇게나 길게 운동을 다니다니!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했거늘 요가가 나랑 어느 정도 합이 맞는 운동인가 보다. 아니, 사실 명상과도 가깝지. 나는 명상이 절실히 필요한 인간이다. 매일 나를 가다듬고 스스로 정 맞히며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의 숙명과도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막연한 생각이지만 아마도 내가 가진 미성숙한 인격과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갭이 스스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나를 낮춰 겸손한 게 아니라 나는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고약하게 늙어서 사람들이 수군대며 피하는 괴짜 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 삶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최소한의 젠틀함과 사회성을 가진 노인이 되고 싶다. 그래, 나는 이왕이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남들한테 좋은 게 아니라 나한테도 좋은 사람. 그럼 자연스레 좋은 어른이 되리라고 믿는다. 내가 좋은 게 남한테도 좋은 거고 내가 싫은 게 남한테도 싫을 수 있단 걸 알아가는 거지. 무조건 적인 법칙은 아니지만… 쉽게 말하면 공감과 배려를 지금보다 더 많이 갖춘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어진 사람까지는 못 되는 그릇이란 걸 알기에 그나마라도 배우고 노력하고 싶은 거다.


 이런 걸 어릴 때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모른 채로 살았다. 자신에게 가혹했고 무작정 견디는 게 자랑이라 여겼다.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강한 거라고 생각했던 지난 내가 있다. 전에도 썼지만 나는 맹수와 가까웠다. 한데 그걸 남에게도, 특히나 동생들에게도 은연중에 강요하는 나를 발견했다. 녀석들은 그런 나를 늘 무서워하거나 빡빡한 사람으로 생각했더랬다. 나도 그때의 내가 너무 별로다(그럼에도 나와 사귀어준 지난 남자친구들에게 감사).  그런데, 뒤늦게 나를 돌아볼 시간들이 생겼다. 피할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은 나를 고통으로 몰아넣어 스스로의 알을 갈기갈기 찢게 만들었다. 그 알은 내가 만든 알이기도 하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옳다고 믿었던 그것들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짓이겨 밟고 갈기갈기 찢는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났고 어찌 되었건 나는 스스로 알을 깨뜨렸다. 소설 ‘데미안’에서도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하나의 세계를 대차게 깨뜨렸다. 그런데! 그러면! 되게 뭔가 멋있을 것 같지만 아니다. 깨긴 깼는데 약간 메추리알 껍질을 까듯 자꾸 뭐가 손에 묻어 있는 느낌이 든다. 깼는데 아직도 이제 막 깨뜨린 어설픈 내가 있다. 털도 아직 다 자라지 않았고 보송하지 않은 축축한 작은 새처럼. 그래서 계속 계속 그 잘잘한 껍데기들을 털어내고 씻어내고 골라내고 있다. 고맙게도. 요가가 그 과정에서 아주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중이다.


 5개월 차 요가 애송이. 오늘은 빈야사다. 원장님의 강하고 뜨거운 빈야사. 도대체가 저 카리스마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체구는 작지만 지난 수련의 시간 동안 겹겹이 쌓아온 단단한 근육들에서 오는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그럼 왠지 모르게 목소리도 더 커질 것 같고 쉽게 쭈굴 해지는 마음도 덜 할 것 같다. 뭐든 금방 회복할 것 같고 빨래도 설거지도 후루룹 뚝딱 해치울 것 같고 전반적인 일상생활에서의 에너지가 쉽게 방전되지 않을 것 같다.


 오늘도 자만해서 요가를 갔다. 일부러 구석진 곳에 매트를 펴고 ‘아. 오늘은 조금 쉬엄쉬엄 가볼까? 한 20년 요가를 다닌 은퇴한 할아버지 컨셉으로 요가를 하고 싶다. 그럼 아마도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물 흐르듯 동작을 할 수 있겠지.’ 따위의 생각으로 매트에 앉았고 시작한 지 10여분 만에 그 생각은 저 멀리 도망갔다.

 ‘어이쿠. 내가 꿈도 야무졌네.’

 물 흐르듯 편안히 따위가 하수에게 될 턱이나 있겠는가. 전력질주 한 사람 마냥 숨을 헐떡이게 되는 게 하수의 요가다. 일단 빈야사 플로우 몇 번 하고 나면 태양 경배 자세에서부터 어지럽다. 수업의 중, 후반정도 되면 간혹 가다 어지러워 눈앞이 아찔해 올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랬다. 혹시라도 쓰러질까 봐 나도 모르게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우 정신 차려. 어우 어지러워.’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차투랑가 단다아사나시에 상복부에 힘이 풀리며 배가 먼저 땅에 닿으려는 걸 안간힘을 써서 버텼고 뒤 이은 업독에서 다운독까지의 동작도 영혼의 멱살을 붙잡으며 이어 나갔다.

 ‘하자. 하자. 헉. 헉. 이것만 더. 헉. 이것만 해보자.’

 모든 플로우가 끝나고 사바아사나- 심장이 요동치고 호흡이 가쁘다. 모든 신체기관에 힘을 빼본다. 그랬더니 심장과 호흡, 두 가지만 느껴진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가쁜 호흡만이 느껴지는 내 몸을 가만히 지켜보며 이런 말을 해준다.

 ‘잘했어. 수고했어. 천천히 천천히 릴랙스-‘

 빈야사 플로우 중에 치열하지 않은 순간은 처음과 끝뿐이지만 치열하게 버틴 만큼 뿌듯함도 따라온다. 치열하지 않게, 몸에 익어서, 쉬엄쉬엄 물 흐르듯이 편안한 요가를 하는 날은 오기는 올까? 뭐,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런대로 괜찮다.



<59일 차: 요가가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아>

 아침부터 마음이 괴로웠다.  지난 주말 20년 지기 친구들을 만났고 그간 못 만난 동안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했었다. 서로 좋은 일 힘든 일 이야기하다 나를 조금 힘들게 했던, 하지만 꼭 겪어야 할 진통과도 같았던 그 이야기를 했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친구들에 대한 따스함 반, 무거운 이야기를 했던 나에 관한 후회 반으로 뒤섞였다.


 오랜만에 만나서는 괜히 무거운 이야기를 했나. 너무 간추려 이야기해서 어떤 부분에선 아이들이 오해를 가지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 마음이 눅눅해지려 하기에 엉덩이를 떼고,

 요가를 갔다.


 요가원에 가는 길에 나를 괴롭게 하는 이 감정의 본질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슬픔’이었다. 나는 사람이 슬펐더랬다.


 하타요가 시간이다. 하타요가는 기존의 빈야사, 아쉬탕가와 다르게 골반이나 기타 관절등의 가동 범위를 좀 더 넓게 쓰기를 요구하고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요가이다. 처음 시작은 가볍게 가볍게, 기존에 하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느낌으로 이루어졌다.


 ‘요가하면서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하자. 슬픔을 가볍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했던 말들을 주워 담을 순 없지만 내가 그것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아니다. 아예 다음부턴 나의 힘듦은 이렇게 요가를 하며 혼자 소화시키고 아끼는 사람들에겐 즐거운 이야기만 하는 게 좋겠다.’ 따위의 생각으로 오늘의 요가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면… 내가 너무 슬프잖아.’


 나는 살면서 너무 많은 짐을 안고 살았다. 말할 곳이 없었고, 스스로가 다 소화를 시키며 살 수 있다 믿다가 결국엔 토해냈던 지난날이 생각났다. 만약 내가 친구라면, 친구 혼자 힘듦을 감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있을까? 친구가 힘든 얘기 하는 것을 만류하며 탓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나는 친구들이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같이 생각하고 궁리하고 답이 없을 땐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여행 가고 힘내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더라. 아마, 그렇다면, 내 친구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그게 나와 친구들이니까… 부끄러웠다. 나는 내 친구들을 믿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스스로에 대해 아직까지도 박하게 구는 걸까? 부끄러웠다.


 ‘어라. 요가를 하면 괴로운 마음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네. 하긴 애초에 그럴 리 없잖아. 설사 이곳에서 다 털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요가를 할 때 그때뿐이지 내 현실이 바뀌진 않는다고.’


 사실 요가원에 나설 때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다. 요가가 나의 상황을 바꾸어주진 않을 거라고. 요가가 내 마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순 없다고. 요가를 가는 내 마음에게 달린 일이지 요가에게 달린 일은 아니라고. 그러다 별안간, 어처구니없게도 너무나도 쉬운 동작에서 뒤뚱거리며 고꾸라졌다. 갑자기 스스로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부끄러움도 잠시,  딴생각하느라 몸에 힘이 풀려 스르륵 고꾸라지는 자신에게 맥 빠지게도 웃음이 났다.


 ‘에고. 한두 번이냐. 다시 바로 잡아하면 되지.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

 ‘어?…괜찮아?’

 ‘그래. 괜찮아. 잠시 못나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고 잠시 무거워져도 괜찮아. 다시 웃는 얘기 하면 되니까. 즐거울 수 있으니까 괜찮아. 다시 또 어깨 펴고 씩씩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 괜찮아.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아. 어차피 완벽한 사람은 없고 현명하게 살리란 건 욕심과도 같아. 나는 계속 어리석을 거고 실수할 거야. 누구나가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것에서 또 무언가를 배울 거고 실수해도 그뿐. 나는 계속해 나갈 거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다른 날 같으면 쉽게 좌절했을 텐데 요가를 하며 마음근육도 조금씩 탄력을 가지나 보다. 고꾸라져 낙담하는 게 아닌 한번 탁 풀리듯 웃으며 바로 자세를 가다듬는 내 모습에서 무언가를 배운 느낌이다. 그래. 나는 앞에서도 계속 기록을 했지만, 이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요가를 해오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 인생에 대입하니 낙담할 이유가 없다. 그냥 내 실수에 한 번 웃고 다시 고쳐 앉아 또 나아가면 그만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인생. 지금 내가 요가를 대하는 마음처럼 실수해도 괜찮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되니 괜찮다는 마음으로. 잠시 그럴 수 있으니 천천히 다시 일어나 그냥 계속 나아가보자는 마음으로 살아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가가 모든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다만, 요가를 하며 조금씩 몸으로 배우는 것들이 마음까지 뿌리 뻗어 나아가 나를 일으킨다. 나를 다독이고 처연하게 한다.


 요가 선생님의 “다시, 제자리, 테이블 자세로 돌아올게요.” 하는 말처럼. 인생 역시 고꾸라지고 못나 보이더라도 한 번 탁 웃고, 다시 나만의 안정된 낮은 자세를 찾아 거기서부터 또 차근차근해 나아가면 되는, 그뿐인 일들일 거다.



<60일 차: 모처럼의 즐거운 요가>

 오늘은 힘도 솟아나고 몸도 덜 떨리는 즐거운 요가였다. 이렇다 할 어려운 동작도, 마음의 복잡함도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크게 할 말이 없다. 매일매일 오늘과 같은 컨디션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 요즘 집에서 따로 하체 운동을 하고 있다. tv를 보거나 멍 때릴 때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펴고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동작이 은근 요가할 때에 도움이 많이 된다. 하체가 조금 더 단단하게 받쳐주는 느낌이 나고 복부 근력에도 적잖이 도움을 준다. 허벅지에 근력이 붙으니 자연스레 무릎에도 부하가 덜 걸리는 느낌이다. 시간 날 때마다 종종 해야겠다. 나이 들수록 하체 힘이 중요하다니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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