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를 보며 나를 인식하다
<61일 차: 아쉬탕가는요>
<62일 차: 무릎 통증으로 얻은 마음수련>
하타요가는 다른 요가보다 내게 좀 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오래 버텨야 한다거나 힘이 들어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요가가 아닌데도 이토록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건 바로 내 무릎 때문이다.
전에도 썼지만 하타요가에는 아쉬탕가나 빈야사에 비해 좀 더 구부리고 꺾고 꼬는 등의 동작이 많다. 그 과정에서 지난 수련동안 살짝씩 스치는 정도로 지나갔던 통증들을 정면에 두고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면 다른 관절이나 근육들은 수련을 거듭하면서 차차 부드러워지고 나아질 것 같은 기대가 있는 반면에, 내 오른쪽 무릎은 영 가망이 없어 보인다. 정말이지 너무 아프다.
3,4년 전에 요가를 할 때에도 이 무릎의 통증 때문에 요가를 관뒀었다. 정형외과를 가니 ‘슬개골 염증’이라고 했다. 아마 평생 달고 살아야 할 거라고.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방법이 있다면 무릎 위의 허벅지 근육을 단련해 무릎이 아닌 주변 근육을 이용한 움직임을 쓰는 방법이라고 했다.
이번에 요가를 시작할 때엔 살짝 통증이 있긴 했지만 다리에 근육도 제법 붙고 허벅지도 튼튼해졌다고 느꼈던지라 예전만큼의 통증은 이제 겪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헌데 오늘 뜬금없이 예전처럼 오른쪽 무릎이 너무 아파오는 거다. 특히 다누라아사나 동작(배를 땅에 대고서는 어깨와 가슴을 들어 올리고 무릎을 굽힌 채 활처럼 몸을 뒤집는 동작)을 할 때에 그 통증이 제일 심하게 느껴진다. 아무 생각 없이 하다가 발등을 잡고 뒤로 들어 올리는 순간 속으로 ‘아악’하고 얕게 내뱉을 정도의 통증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미간은 찌푸려지고 몸에 힘이 빠졌다.
‘아. 싫다…’
사실 이전부터 서서 하는 활 동작이나, 우르드바다누라아사나 등 무릎을 구부려야 하는 동작들을 하면 조금씩 아프긴 했다. 하지만 그냥 외면했다. 이 이상의 동작들은 안 하겠지 싶어서. 하더라도 살짝씩 피해 가면 되겠지 싶어서. 언젠가는 반드시 통증을 마주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의욕이 없어진다.
‘고질병’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동작인데 통증 때문에 포기해야 할 때엔 꽤나 많이 낙담하게 된다. 요가 강사를 할 것도 아니고 기인이 될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할 수 있는 건 하나씩 마스터하고 싶었던 나였기에 더 기운이 빠지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런 게 마음수련인가. 안 되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인 뒤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나아가는 이 행위가 어쩌면 마음 수련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고 힘들지만 그래도 계속해야 하니까 무릎을 살살 달래주는 동시에 다른 곳의 근육을 키워 힘을 보조해 주면서 천천히 나아가자고 다시 마음을 먹었다. 기운 빠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별 수 없으니까. 그래도 당장은 평생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일이 있단 건 속상한 일이긴 하다.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알고 있고 이미 수십 번 경험한 나이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이런 걸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서글픈지도 모르겠다. 유쾌하진 않다.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그런 서글픔을 겪는 과정 역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힘들어도 할 만하고 보람되기도 하다. 나는 요즘 요가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인생 역시 요가를 하듯 자신의 모자람과 한계, 장점, 운 등을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알아가며 그럼에도 해볼 만하고 견딜만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사람이 완벽할 수 없고, 다 잘할 수 없다. 자신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우회의 선택들을 하든 포기라는 선택을 하든 할 만한 것들을 찾아 꾸준히 그냥 걸어가 보는 거다. 정면돌파가 영영 불가능하면 측면 돌파도 해보고, 안되면 포기하고 다른 것(동작)에 힘쓰는 것도 괜찮은 일 일거다.
이즈음 되니 드는 생각, 나는 아마도 사는 게 덜 괴롭기 위해 요가를 하는 것 같다.
<63일 차: 요가매트를 장만하다>
드디어! 드디어 나도 내 개인 요가매트를 장만했다. 헤헤. 여태껏 요가원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요가매트를 썼었는데 언젠간 바꾸자 바꾸자 말로만 했던 거를 하타요가를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행동으로 움직이게 된 거다. 하타요가에서는 얼굴을 매트 가까이 가져다 두는 동작이 많기 때문이다. 공용으로 쓰는 매트에 직접적으로 이마나 턱을 갖다 대려니 살짝 찝찝했다. 무엇보다도 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냄새 때문에 더 숙일 수 있는 동작인데도 매트에 이마나 턱이 닿기 싫어 나도 모르게 살짝 띄워 간격을 두기도 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다른 이들의 땀냄새, 발냄새까지 맡으면 때때로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거기다 더해 여럿이 오랜 기간 사용하다 보니 매트가 닳아서 많이 미끄러웠다. 동작에 조금씩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흐름에도 방해가 되었고 넘어질까 봐 신경이 쓰여 집중력이 종종 흐트러지기도 했다. 다운독을 할 때에 손이 미끌리지를 않나, 전사자세를 할 때에 발이 미끌리질 않나. 위태위태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아. 안 되겠다. 개인 매트를 사자!’
검색에 들어갔다. 요가매트도 종류가 왜 이렇게 많은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 나는 이래서 쇼핑이 싫다. 방대한 종류 중에서 디자인, 가격, 활용도 등등을 고려하다 보니 고민은 끝도 없이 길어지고… 결국 요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쓰는 브랜드의 매트를 사기로 결정했다. 허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 두께와 색상을 선택해야 한다. 더불어 스트랩이나 가방은 필요가 없는지도 고민해야 한다. 아아. 끝이 없는 고민. 나는 이런 곳에 시간을 쓰는 걸 못 견뎌한다. 내심 버리는 시간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이 기억은 리셋이 되어 언젠가 또 똑같은 고민으로 같은 시간을 더 써야만 한다. ‘좋아. 고민해! 고민하고 얼른 결정해!! 너에게 하루의 기한을 주겠다.’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자신의 취향에 맞는 요가매트를 골랐다. 때마침 봄 할인가로 팔고 있더라. 사실 가장 사고 싶었던 브랜드가 두 개 있었다. 요가를 하는 사람들은 다 알법한 유명한 해외 브랜드 두 군데. 그러나 뭔가… 내가 지금 요가에 쏟는 열정이 글쓰기에 기인한 게 20프로 정도 된다면, 글쓰기가 끝나고 나서도 이 요가를 계속할지 안 할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아 무턱대고 비싼 제품을 지르기가 망설여졌다. 게다가 이제 겨우 6개월 차인데 20만 원 가까이하는 비싼 요가매트를 굳이 사야 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요가가 아니라 매트가 주가 되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이 요가 매트를 쓸만한 적정 수준이 되었다고 판단될 때 사보자고 결심했다. 어차피 요가매트도 적정 사용기한이 있다고 하니까, 실컷 쓰다가 슬슬 닳기 시작할 때쯤 제일 좋은 요가매트로 바꿔 봐야지.
근데… 그런 날이 과연 올까?
하하하하하
모쪼록 잘 부탁한다. 나의 새로운 요가 친구!
<64일 차: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
하타요가 시간이다. 가벼운 듯 힘든 하타요가. 아직 무릎이 성치 않으니 무릎을 접거나 힘이 들어가 버티는 동작이 있으면 적당한 각도로 무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너무 잘하려 애쓰지 말고, 안된다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천천히 되는 만큼만! 느린 호흡으로 차분차분 진행하는 요가이니만큼 호흡도 끊기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지난 과거의 일을 떠나보내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과거의 사람들, 아팠던 기억들, 깊숙이 패인 상처들,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들. 모두 하나씩 하나씩 가볍게 해서 보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개인적으로 바치는 기도도 병행하는 중인데 아마 이 요가일지를 다 쓰는 날이면 그 기도도 거의 동시에 끝이 날 것 같다.
길고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돌을 쌓아 올리는 마음으로. 불안과 두려움, 슬픔을 공들여 보낸다.
오늘은 호흡과 함께 그것들을 날려 보낸다는 마음으로 몸의 명상을 진행했다. 이게 맞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세를 잡고 구부리고, 버티며 호흡을 하는 동안 내뱉는 호흡마다 천천히 천천히… 고요하게 지난 얼굴들을 하나씩 보내주었다. 늘 말했듯이 이걸 한다고 해서 직접적인 문제가 해결이 된다거나 마음이 순식간에 가벼워지진 않을 거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부정적인 기억은 무의식 속에서 잔여물로 남아 있을 테니까. 다만 인지하고 바라보고 보내주는 방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달라져 있을 거라 믿을 뿐이다.
오늘도 탑을 쌓듯 하나하나 동작을 쌓았고 공들여서 기도했다.
봄비가 내린다. 연둣빛 초록잎이 순하게 흔들린다. 하늘과 바람과 계절이 이젠 그래도 된다고 응원해 주는 기분이 든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새로이 발견하는 것에 또 친절하게 바라봐준다.
잘 가라. 나의 지나온 시간들.
<65일 차: 실수와 실패가 내 전부는 아니듯>
아침부터 배탈이 났다. 으아- 쉴까. 하는 생각에 양치를 하며 한 20초간 고민했다.
‘그냥 갈래.’
전에도 한 번 배탈이 난 채로 요가에 간 적이 있다. 배탈이 났을 땐 배를 따뜻하게 해 주는 게 좋으니 요가 시작 전 손을 따뜻하게 비벼 아랫배와 윗배에 살포시 얹어 덥혀주고 살짝 하복부를 조인다. 하복부를 살짝 조이는 이유는 그 상태에서 호흡을 하면 몸의 체온이 조금씩 올라가는 기분이 들어서다. 이 상태로 요가 시작 전까지 유지하며 호흡을 한다. 그리고 요가를 하는 동안에도 그 상태를 유지하며 여러 동작들과 함께 몰아붙이면 어느 순간 배탈이 난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오늘도 역시 원장님의 빈야사 시간은 화끈한 매운맛이다. 간단한 스트레칭부터 시작해서 수리야나마스카라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빈야사. 몇 번의 플로우를 반복하면 땀이 뚝뚝 떨어지고 어느샌가 힘이 빠지며 살짝씩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그러다 오늘은 집중력이 흐트러진 나머지 아도무카 스바나 아사나에서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순서인데 혼자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말았다.
“왼쪽 다리~”라고 말하는 원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왼쪽다리 들어 올려요~”라고 거듭 말하시기에 잠시 의아해하던 순간, 앗. 별안간 정신 차리고 보니 나의 왼쪽 발이 바닥에 있는 게 보인다. 내게 하는 말씀이었던 거다.
‘호오. 완전 정신을 놓았네. 집중하자. 집중해.’
황급히 다시 자세를 고치고 플로우를 따라갔다.
저 실수 아닌 실수는 나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단체 활동에서 혼자 지목을 받거나 주목을 받는 것을 티는 안내도 거북해하는 편이다. 물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이런 경험은 나의 어린 시절 수치심에 관련된 기억으로 자꾸 나를 데려가는지라 현재의 일과 상관없이 혼자 살짝 울적해질 때가 있다. 유쾌하지도 않은 기억으로 자꾸 소환되는 건 그 시절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받고 위로받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상처를 누군가 치유해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불쾌한 기억이 다가오면 두 눈 똑바로 바라보고 두 팔 벌려 안아주려 노력한다. 간만에 오늘도 그런 날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렇게 사는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란 거다. 내 친구 남편도 샤워를 할 때면 한 번씩 수치스러운 기억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나빠지곤 한단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원인이 무엇이건, 이런 감정이나 생각들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이것들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마치 비가 오면 땅이 젖는 것처럼. 젖어버리고 축축해지는 걸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저 ‘아. 오는구나. 수치심이란 녀석이.’ 하고 바라보고 인사하는 수밖에.
‘왔구나. 어김없네. 충분히 쉬다가 가.‘ 하고 잘 보내주면 그만이다. 수치심도, 잠깐의 실패도 그저 왔다 가는 것들일 뿐 그것들이 나의 전부는 아니니까. 당장의 나는 ‘요가를 하고 있는 나.’ 이것만이 가장 명백한, 지금의 내 모습이다.
이토록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나란 사람. 생의 끝까지 잘 이끌어 가려면 체력이 좋아야 한다.
그러니 뭐가 되었건 운동을 합시다. 움직입시다. 불완전하고 어설픈 각자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