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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Oct 20. 2021

바르셀로나 2018년 6월

아내의 버킷리스트 들어주기

  만약에 한 곳만 더 가고 나서 유럽여행을 끝내야 한다면 어디를 가고 싶으냐고 아내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바르셀로나를 가고 싶단다.

그녀의 바람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바르셀로나로 올 수 있었다. 스페인 이곳저곳을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 곳에 머물면서 바르셀로나와 근교 여행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동거리도 만만치 않거니와 아이를 데리고 피곤한 여행을 하기 싫었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하여 그라시아 지역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빌렸다.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주변지역을 여행 리스트에 올렸다. 히로나, 시체스, 몬세라트를 가기로 하고 나머지 3일은 바르셀로나에 있다가 로마로 넘어가는 일정이다. 그라시아의 아파트는 세 식구 지내기에 딱 알맞은 크기의 스튜디오이다.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과 식기세트가 갖추어져 있고 동네는 한적하며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걸어서 갈 수도 있다.     


  6월의 바르셀로나는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아파트에 짐을 풀고 동네 산책을 나가본다. 아주머니 두 분이 운영하시는 조그마한 빵집이 있다. 아하, 내일 아침에는 이곳에서 신선한 빵을 사다 먹으면 되겠구나. 골목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골목을 요리조리 지나가니 조그마한 광장이 나오고 주변에는 카페와 식당들이 있다. 옳지,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먹어야겠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니 12시간 비행이 피곤이 몰려온다. 스페인의 저녁식사는 보통 9시는 되어야 시작을 하니 그동안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한다. 아까 봐 둔 식당에 가서 빠에야를 먹으려고 하니 그건 없다고 한다. 아니 이럴 수가. 스페인 식당은 모두 빠에야를 메뉴로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하니 웨이트리스 언니가 웃으면서 다른 메뉴를 추천해준다. 오징어, 야채튀김 뭐 그런 거였는데 우리 입맛에 좀 짜다. Poco sal이라고 미리 말해야 하는 걸 깜박했다.

스페인 음식이 짜니 Poco sal이라고 하면 좀 덜 짜게 해 준다고 그렇게 공부해가지고 와서 정작 실전에 써먹지를 못했다. Sal은 소금, Poco는 조금이라는 뜻.     

  빠에야를 먹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는 조금 실망했지만 '내일 먹으면 되지'라고 달래 본다. 만족스럽지 못한 스페인에서의 첫 식사를 끝내고 산책 삼아 이번엔 큰길까지 나가 본다. 길 건너에 슈퍼마켓이 보인다. 내일은 돌아오는 길에 들려서 맥주를 사다 놓아야겠다.     



  피곤하지만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밖은 아직도 어둑어둑하다. 새벽이 되려면 아직도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선선한 새벽 거리에는 아직 인적이 없다. 어제 봐 두었던 빵집에 가서 크루아상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아내와 아이도 깨어나서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제 제법 커버린 아이는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부모가 정해서 가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대안을 놓고 상의를 하면서 여행을 해야 한다. 대체로 가고 싶은 곳을 정하면 나는 최적의 동선을 짜는 것으로 역할 분담을 하게 된다.      


  첫날의 일정은 자전거나라 투어를 신청해서 까사밀라부터 시작해서 까사 바뜨요를 거쳐 구엘공원을 돌아보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일정을 끝내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해야 하는 일정이다. 여행 첫날 숙제처럼 꼭 봐야 할 것 들을 모두 보고 나서 나머지는 놀멍 놀멍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더니 딸아이와 아내가 미끼를 덥석 문 까닭이다. 이렇게 가우디에서 시작해서 가우디로 끝내고 나니 체력이 방전되어 버렸다.

모두 다 좋았지만 아내는 성당을 특히 좋아했다. 성당에 가만히 앉아 천장의 장식을 보고 스테인글라스를 보며 하루를 평안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아이는 다른 일정 때문에 일찍 공원을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할 정도로 구엘공원을 좋아했다. 아직은 너무 어려서 성당 구경과 미술관이나 박물관 구경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어린 나이에도 예술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영재들이 있지만 콩 심은 데 콩이 나지 팥이 나겠는가. 아직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둘째 날은 일찍 일어난 아이의 손을 잡고 빵집으로 간다. 마음에 드는 빵을 진지하게 고르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할머니들이 빙그레 웃는다. 말을 통하지 않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웃음이다. 오늘은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구엘공원을 다시 가보고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시간의 제약이 없어지니 마음이 여유롭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아직 매표소에 사람이 없다. 공원 문은 열려있고 사람들은 그냥 들어간다. 아침에 일찍 왔더니 의도치 않게 무료입장의 혜택을 받은 셈이 되었다.(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원래 아침 일찍 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무료입장이라고 하네요) 오전 내내 공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멀리 공원 바깥까지 돌아보기도 했다. 오전에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고 나니 당연히 체력 방전, 오후에는 쉬고 싶은가 보다. 숙소에서 낮잠을 한숨 자고 나서 저녁에 시내에 나가보기로 했다. 아이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동안 아내와 나는 커피를 한잔 내린다. 커피 향이 작은 스튜디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아내는 향에 취해서 비실거리더니 아이가 자고 있는 침대 옆에 가서 눕는다. 아하 이래서 스페인 사람들이 시에스타를 즐기는구나 싶다.    


  저녁시간이 되어도 해가 길다. 람브라스 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카탈루냐 광장을 중심으로 위쪽으로는 그라시아 거리 아래쪽으로는 람브라스 거리가 이어지고 있다. 람브라스는 모래라는 뜻이고 예전엔 이곳이 바닷가 모래밭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람브라스의 끝은 바다로 이어진다.

없는 것이 없다고 자랑하는 보케리아 시장에서 과일주스를 마시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커다란 하몽을 한 덩이 가져가고 싶지만 세관에서 당연히 압수될 것 같아서 포기한다. 아주 오래전에 하몽하몽이라는 스페인 영화가 있었는데 내용이 산만해서 그랬는지 줄거리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목만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냥 '몽'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단어들이 나른해지는 것 같다.



스페인에서는 하몽이라고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프로슈토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만드는 방법도 같고 생김새도 같은데 둘은 다른 거라고 양쪽 모두 우긴다.

‘아니 돼지 뒷다리로 염장해서 만들면 그게 그거지’라고 하면 펄쩍 뛴다. 돼지도 다르고 소금도 다른데 어떻게 같은 음식이 될 수 있냐며 검지 손가락을 흔든다.(검지 손가락을 흔드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아주 강한 의사표현이라서 이탈리아에서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손동작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의 모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데 일단 다섯 손가락을 모은다. 모인 손가락들이 하늘을 보게 한 후 앞뒤로 조금 흔들어 주는 제스처를 취한다. 경상도 사람들이 쓰는 '쫌'과 용례가 비슷하다.


사례 1. 바쁜 젤라토 가게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한참 고민을 하고 있으면 점원이 예의 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쫌, 빨리 골라라" 이런 뜻이다.

사례 2.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 이 때도 이것을 쓸 수 있다. "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런 뜻이다.

사례 3. 식당에서 바빠 보이지도 않는데 내 주문만 받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쫌, 주문 좀 받아가라. 나도 배고프다". 유럽의 식당에서 한국과 같은 스피드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원래 주문도 오래 걸리고 식사도 오래 걸리고 계산도 늦게 걸린다.


https://brunch.co.kr/@jinho8426/89


여기서 프로슈토라 하면 프로슈토 크루도(Prosciutto Crudo)를 의미하고 있다. 요리하지 않고 염장된 상태 그대로인 날것이다. 처음에는 약간 비린맛이 있어 먹지 못했지만 자꾸 조금씩 먹다 보니 이젠 아주 익숙하게 먹을 수 있다. 특히 멜론과 함께 먹으면 '단짠'의 맛이 환상적으로 어울린다. 생햄을 먹지 못하다면 프로슈토 코토(Cotto)를 드시면 된다. 조리되었다는 뜻이다. Cooked.


람브라스 거리에서 저녁도 해결하고 이곳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엿'같은 것을 파는 뚜론 가게에도 들려본다. 딸아이는 돌아가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겠다고 몇 봉지 사달라고 한다. 그걸 본 아내는 동네 아줌마들과 나누어 먹겠다고 몇 봉지 산다. 그렇게 고르다 보니 제법 봉투가 묵직해지고 점원들은 입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내일은 기차를 타고 몬세라트를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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