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탈출기(2)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점점 겁이 나기 시작하였다. 어서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하는데.
오늘 새벽 2시에 탕게로 가자는 이유는 물건을 내 차에 싣고 가자는 것일 거고, 탕게에 내일 가게 되면 물건 운반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ᄅ면, 탕게에서 나중에 스페인으로 나갈 때 다른 일을 부탁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탕게에서 다른 주요 도시인 카사 블랑크, 페스, 라바트로 운반해 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짐을 다시 챙기고 서둘러 같이 나오는데(저그 형은 이미 타띠안으로 출발했고) 또 계속해서 설득하였다. 아부지집에 가라, 친구 집에 자라, 그냥 같이 탕게로 가자. 그런 설득에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난 죽어도 엘호시마에 가서 구경해야 한다고 버텼다.
결국 내가 이겼다. 그 녀석 왈, 그래 그러면 니 갔다가 내일 꼭 탕게로 와야 한다.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다 문디 자슥아. 헤어지는데 그 녀석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필요하면 돈을 좀 줄까 하더라고. 운반책 수고비를 선불로 주려는 모양이다. 보니까 200 디럼 지폐를 한 무더기 갖고 있었다. 그래 봐야 미화 20불짜리 아닌가. 자식아, 난 미화 100불짜리 한 무더기 갖고 있는데. 니돈 따윈 필요 없어.
집을 나와 길이 갈라지는 산 윗길에서 헤어졌다. 난 엘호시마로 들어가고 그 녀석은 반대방향으로 갔다. 가면서 생각해 보니 도저히 모로코 구경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스페인 나가는 마지막 배 시간이 10시인데 지금이 거의 8시이고, 적어도 9시 50분까지는 가야 하고, 배 타려면 반대방향으로 다시 나가야 하는데, 저 녀석이 나를 의심할 수도 있다 말이야. 왜냐면 내가 지 사진 찍었지, 탕게 집 주소도 있지, 셀폰 번호도 있지, 모로코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다는 걸 저 녀석도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평상시와 달리 비상시에는 송곳날같이 샤프하게 돌아가는 내 머리로 여러 가지 대안을 정리해 보았다.
1. 편하게 저 녀석 소원 들어주고 모로코 구경 다하고 나가는 방법
2. 모로코 경찰에게 신고해서 도움을 받는 방법
3. 수도 바라트로 가서 미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
4. 사하라 사막이고 뭐고 구경 포기하고 오늘 저녁에 모로코를 탈출하는 방법
2번은 도저히 안돼. 만약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면 그 일당들 일망타진할 때까지 나를 모로코에 억류하여 뒤에 대질 신문하고 현장조사에도 가야 되고.
3번도 똑같이 절차가 복잡할 것 같았다. 혹시 CIA 애들한테 취조나 당하지 않을련지. 결론은 4번으로 저녁에 배 타러 가는 방법인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였다.
결론이 모로코 탈출로 정해지자 10분쯤 엘호시마 방향으로 가다가 차를 유턴해서 낮에 들어온 방향으로 달렸다. 주위는 칠흑같이 깜깜하고, 산길은 비포장도로 속도를 낼 수도 없거니와 잘못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007 영화에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에 땀을 쥐며 아까 헤어진 그 녀석 마을을 통과하는데 마음이 무척 쪼려왔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을을 통과하는데 어느 놈이 따라오면서 차 뒤에서 헤드라이트를 깜빡거렸다. 직감적으로 그 놈임을 느끼면서 차를 세웠다. 나의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빨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녀석이 다가와서 씩 웃으면서 하는 말, 니 왜 다른 방향으로 가는 거지? 그 말에 이 녀석이 나의 의도를 100% 간파하고 처음부터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그걸 염려해서 좀 있다가 차를 돌리려고 했는데 배 시간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차를 일찍 돌렸던 것이었다.
스페인 가는 배 타러 간다고 차마 말할 수는 없고 해서 둘러대었다. 이틀 동안 연속 야간 운전했더니 더 이상 운전하기 힘들어 큰 마을 티따안의 호텔에 가려고 한다. 잘되었네, 너그 형 집이 티따안에 있다는데 거기서 자게 해 줄 수 있나? 그렇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건 안되고, 대신 그 녀석의 셒샤안 친구 집에서 자라고 하였다. 싫어! 결국 그 녀석이 그ᄅ면 티따안 호텔에 가서 지한테 전화해서 어느 호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하였다. 알았다. 알려줄게. 그러나 속으로는 호텔은 무슨 호텔, 배 타러 가는데.
그 어두운 산길을 밤에 운전하는데 앞에 트럭이 천천히 가면 꼬부라진 산길에서 추월하지 않으면 배 시간이 너무 임박했다. 한번 진짜 위험하게 추월했는데 몇 초 차이로 마주오는 차와 충돌을 면할 수 있었다. 배고픈 건 참을 수 있는데 과연 저 녀석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을련지. 보니까 지역마다 나와바리를 관리하는 조직이 있는 것 같았다. 저그 형이 티따안맡고 저그 친구는 셒샤안맡고 지는 탕게 맡고. 그러면 지금쯤 티따안에 전화해서 내 차를 보면 추적하라고 연락을 분명히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달리면서 하느님이 참 원망스러웠다. 비록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나쁜 죄를 많이 지었지만 왜 이런 멋진 여행길에서 나를 벌하려 하시는지. 다른 세상 사람들도 나와는 다르지만 각자의 다른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겠지. 그렇게 별의별 죄을 지으며 사는 게 우리 인간들의 세상이니까.
자라보고 놀란 맘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법이라고 했나, 달리다가 내쪽으로 차를 대고 헤드라이트 켜고 있는 차를 보면, 혹시 그 일당이 아닌지 겁나고, 혹시 내 뒤를 따라오는 차는 없는지 백미러를 돌아보고, 마치 첩보 영화 속에 쫓기는 주인공처럼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였다.
배 시간에 촉박하게 타띠안을 통과해서 항구 세우타로 가는데 한참 달리는데 지명이 CEUTA가 아니고 SEBTA였다. 야, 이상하네. 길도 보니까 아침에 내가 온 길이 아니었다. 지도는 가이드북에 있는 지도라 지명 표시가 없었다. 시간은 없지만 길을 놓친 것 같아 중간에서 할 수없이 유턴해서 다시 타띠안 시내로 들어가서 CEUTA 가는 길을 물어보니 SEBTA로 가면 된다고 하였다. 다시 아까 그 길로 달렸다. 뒤에 따라오는 차는 없어서 한시름을 놓았는데 만약 오늘 배를 못 타면 분명히 저 녀석들이 나를 찾아 헤맬 것 같았다. 내가 지 정보를 다 가지고 있는데. 그리고, 잡히면 마지막 칼부림을 한바탕 해야 되나. 요새 한국 조폭영화를 많이 봐서 어떻게 칼싸움하는 건지 대강은 아는데 한 번도 안 해 본 칼부림을 제대로 할 수나 있을련지.
급할 때 길을 잘 모르는 것이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는 건지 이렇게 당해보니 절실히 알 수 있었다. 길 끝까지 가니까 톨게이트가 있어 CEUTA를 물어보니 계속 쭉 가면 된다고 하였다. 가니까 차들이 줄을 서서 모로코 출국 수속을 밟고 있었다. 들어 올 적에는 검색이 없었는데 나갈 때는 마약 탐지견을 데리고 차 트렁크를 열어젖히고 일일이 수색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녀석이 나 모르게 차에다 무얼 숨겨놓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이민국을 통과하고 마지막 빠져나가는 경찰 체크 포인트에 일렬로 서 있는데 그 녀석이 입은 줄무늬 티와 비슷한 것을 걸친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저 멀리서 차 안을 하나씩 보고 내 차 서있는 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녀석이 벌써 여기까지 미리 손을 썼나 싶었다. 분명히 나를 보면 그냥 칼로 찌르고 도망치겠지 하면서 바싹 긴장하고 있는데 내 차 앞에서 와서 보니까 다행히 그 녀석이 아니었고, 찾는 인물이 내가 아닌지 한번 흘낏 보고 그냥 지나갔다.
세관 수속을 마치고 배를 타러 Ceuta 항으로 들어가니까 너무 늦어 배를 탈 수가 없었다. 천상 내일 새벽 첫 배를 타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 있는 곳은 스페인 영토 Ceuta라 모로코 구역이 아니어서 조금은 안도하는데, 늦은 시간에 호텔 가기에도 조금 꺼림칙한 점은 호텔 숙박 명부에 이름과 차 번호판을 기재해야 하는데 혹시 그 녀석이 근처 호텔 프런트에 전화해서 일일이 알아보지는 않을련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차를 배 선착장 가까운 파킹장에 대놓고 차에서 몇 시간만 죽치고 바로 새벽 첫 배로 스페인으로 건너 가는 게 좋을 듯싶어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오늘 하루에 일어난 일들을 곰곰이 더듬어보니, 현지인들의 생활상들을 사진에 담아 보려고 했던 나의 과한 욕심이 이런 대마초 딜러의 수작에 빌미가 되어 스스로 위험한 구덩이로 떨어진 것은 아닌지? 그 녀석이 던진 미끼에 내가 덥석 물지 않고 피해 갈 수는 없었는지? 이런 모로코 탈출이 최선의 선택인지?
차 안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북아프리카의 수정처럼 맑은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촘촘히 박혀 제각각 반짝이고 있었다. 운명이란 게 피할 수 없는 잘 차려진 아침 밥상처럼 마주 해야 한다면 당분간 아침을 건너뛰어야겠다.-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