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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Feb 22. 2022

지노 배낭여행기 - 49일의 세계일주 29

명장들의 무덤터 - DEIR EL MEDINA

오늘이 룩소 관광 3일째다. 오늘도 신전 3군데 돈다.  날씨 때문에 진짜 힘들다. 신전까지는 차로 가지만 가서 내려서 카매라들고 신전 한바퀴 돌고나면 진이 다 빠진다. 그런데 오늘 가는 곳 중 한군데가 마음에 든다. 왕족의 신전이나 무덤이 아니고 평민들, 주로 왕들의 신전이나 무덤 조성 하는데 동원된 일꾼들의 무덤이란다. 보통 사람들의 무덤이라니 구미가 당연히 땡기제.  돈도 냈는데  열심히 보러 다녀야지.



지도에서와 같이 DEIR EL MEDINA가 KINGS VALLEY에 가까이 있다. 이 말은 왕가의 계곡에 있는 수많은 왕족의 무덤을 만드는데 동원된 일꾼들이 그 계곡 가까운 곳에 거주했다는 이야기다.



 

주거지터와 무덤터. 산 중간에 굴 같이 생긴 곳이 일군들의 무덤이란다.



남아있는 주거지터.  



그들이 모시던 신. 왕들이나 귀족들이 모시는 신하고는 틀리는 모양이다.



이런 왕들의 신전이나 무덤에서 보이는 찬란한 그림들이나 조각품들이 바로 이들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단순한 노동자부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시 이집트 최고의 화가나 조각가나 건축가같은 명장들이

자의던 타의던 왕을 위하여 일생동안 그들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한 덕분에 3천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이

그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전 본당. 왕들의 신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종교의 자유는 있었는지 평민들도 자기들의 신들에게 봉헌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들어가 본 평민의 무덤인데 안에 공간이 작아 10분이상 있지마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분묘안에 있는 그림이다. 놀랍게도 왕실 분묘 속에 있는 그림과 동일하다. 단지 왕이 아니고 평민 복장인것만 다르다. 당연하겠지. 왕실 분묘의 그림을 본인이 그렸으니 동일 할 수 밖에. 어떻게 이런 그림을 남길 수 있었느냐 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다.


고대 이집트 역력이 1년을 3개 시즌으로 나누고 1시즌을 4개월로 하고 1개월을 3주로 하고 1주를 10일로 하는데 왕실 분묘 공사에 징집된 기능공들은 1주에 8일은 의무적으로 왕실 신전내지 분묘공사에 봉사하고 이틀은 쉬는데 이들은 이 쉬는 날에 왕처럼 영생을 위한 이런 본인의 분묘 공사를 자발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일도 분업적으로 나누어서 했는데 무하마드 화공은 그림 전문으로 그림만 그려주고, 알리는 석공으로 분묘 내부 공사를 맡고, 히멧은 조각 전문가로 석상을 만들어 주고 이런 식으로 이웃끼리 상부상조로 분묘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왕실 상부에서 이를 허락해 주었기에 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했을텐데 기능공 전부를 허락해 주지는 않았을 테고. 지금 현재 룩소에서 공개하는 평민 분묘는 3개뿐이다. 이걸로 봐서도 당시 개인 분묘를 가질 수 있었던 평민은 명장중의 명장만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분묘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산 책에서 카피해서 보여 주는데 악사가 하프 연주를 멋지게 하고 부부가 흥에 겨운 모습이다. 그러니까 평민 중에서도 어느 정도 신분 상승이 된 기능공이 아닐까 싶다. 그 밑에 죽음의 신 ANUBIS가 미이라에게 심장을 먹여주는데 전편에서 이야기한대로 “최후의 심판” 저울질에서 깃털보다 무겁지 않아 이를 통과했기 때문에 심장을 가지고 사후세계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같은 분묘안에 있는 그림인데 남자 시종들이 주인에게 시중을 들고 있다. 그 밑에 작은 그림을 보니 고우영화백의 그림이 연상된다. 고화백도 고대 이집트에서 태어 났어면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까 필경 징집되어 왕실 분묘나 신전 공사에 일생을 다 바쳤을것 같다. 그려면 그 양반 좋아하는 술도 못했을거고 우리는 삼국지나 무대, 무송, 반금련이 나오는 수호전도 보지 못 했을텐데. 참 다행이었는데 그 양반도 이제는 가 버리고 없으니 그의 만화를 볼 수 없는 것은 다행이 아니다.  



그 다음에 본 것은 폐허가 되어 버린 람세스2세 신전이다. 람세스2세의 거대 석상이 발은 저렇게 떨어져 나가 있고



몸통은 저렇게 딩굴어져 있다. 조각이라도 맞추어서 세워 놓으면 좋을텐데. 별 특별히 보여 줄게 없어 걍 넘어가고



마지막으로 본 것이 HABU TEMPLE인데


HABU 신전에 있는 석상인데 왼쪽 머리없는 것이 람세스3세이고 오른쪽 원숭이 머리를 한 석상이 람세스3세가 봉헌한 신 THOTH 신이다. 돌맹이 색깔이 틀리는데 이것은 화강암이고 보통 붉은 색 석상은 사암이다. 화강암이던 사암이던 대리석이던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





    파라오의 저주


1920년대의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여 미라를 꺼낸 발굴자들이 연이어 불운의 사고로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현재까지 내려오는 한여름의 납양특집같은 오싹한 이야기이지만 ,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미신같은 소문을 부정하며 그런 사고를 당한 관련자들의 사고를 우연한 일치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파라오의 저주중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이런 것이다. 1920년경 이집트 룩소 왕가의 계곡에서 왕릉 발굴의

재정 후원자인 영국인 부호 카나본 백작인 조지 허버트(

1866-1923)의 지원하에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1874- 1939)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으려고 이곳 저곳을 파헤치고 있었다. 투탕카멘은 이집트 신왕국 18왕조의 13대 파라오로, 재위기간은 기원전 1332년부터 1323년으로 약관 18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투탕카멘의 미라는 황금가면상으로 덮여 있다는 소문으로 많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려고 탐을 낸 왕릉이다.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1874 - 1939)


1922년 11월 카터는 새로운 발굴을 시작하였다. 그후 사흘째 되는 날에 무덤으로 통하는 새로운 계단을 발견하고 영국에 있는 물주 카나본 백작에게 전보를 때려 2주일뒤에 발굴현장에 도착하였다. 흥분한 두 사람은 처음으로 무덤으로 통하는 계단을 통해 무덤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혀 도굴당한 흔적이 없는 온전하게 보전된 왕의 무덤이었다. 금빛 찬란한 유물들이 석실에 가득차 있었고 그 옆에는 상형문자로 새겨진 점토판이 놓여 있었는데 “죽음은 그 날개로 파라오의 평안을 교란시키는 자를 모두 죽이리라” 라고 씌여 있었다.  발굴 인부들이 보면 동요할 것 같아서 카터는 이 점토판을 숨겨 버렸다.


발굴한 새로운 무덤은 그후 조사로 그렇게 찾아 헤매던 투탕카멘의 무덤으로 판명되었다. 전반적인 발굴조사를 마치고 1923년 2월 17일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여 첨으로 무덤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이때부터 파라오의 저주가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최초 공개후 2개월 뒤에 카이로에 머물던 카나본 백작이 알수없는 이유로 고열에 시달리다 12일만에 숨을 거두웠다. 그가 숨을 거둔 그날 밤에 카이로시 전체가 전기가 나간 정전상태이었다고 한다. 그날 영국에 있던 카나본 백작의 집에 있던 애완견 폭스테리어가 갑자기 짓기 시작하더니 곧 즉사해버렸다는 것이다.


카나본 백작의 죽음으로 각 신문사들이 앞뒤 다투어 파라오의 저주를 신문지상에 떠들어댔다. 투탕카멘 무덤 공개에 초청받았던 미국인 고고학자 아서 메이스란 자가 카나본 백작이 죽은 뒤 몸에 이상이 있다고 호소하더니 곧 혼수상태에 빠지더니 카나본 백작이 죽었던 카이로 콘티넨탈 호텔에서 사망하였다. 카나본 백작과 친분이 있었던 미국의 민간 금융업자 조지 J. 굴드가 카나본 백작의 부고를 접하고 카이로에 왔다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둘러보고 이튿날 고열로 누웠다가 그날 밤에 사망하였다.


조엘 울이라는 영국의 실업가는 무덤을 견학하고 귀국도중 고열로 사망하였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X선 촬영한 영국인 아치볼드 더글라스 라이드 사진기사도 1924년 영국에서 사망하였다. 이렇게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에 협조한 13명이 사망하였고 1929년에는 이 수가 22명에 이르렀다. 1929년 그해 카나본 백작의 미망인도 벌레에 물려서 죽었고, 하워드 카터의 비서 리처드 베델은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발굴 당시 투탕카멘의 미라를 검시한 의사 더글라스 테리 교수와 알프레드 루카스도 1925년에 심장발작으로 급사하였다.


투탕카멘 무덤 발굴이후 하워드 커터에게도 신경쇠약 증상이 나타났다고 했는데 카터가 가끔 <완전히 얼빠진 상태>로 보였는데 의학적 진단이 곤란했다고 한다. 카터는 66세인 1939년까지 생존하였다.


그후 파라오의 저주에 관하여 여러 연구 논문들이 발표되었는데 혹자는 파라오의 저주를 그대로 받아들여 불가사의한 사차원적인 현상으로 간주하였고, 혹자는 파라오의 저주와는 관계없이 우연의 일치로 인한 사고사로 치부하여 파라오의 저주를 한 줌의 재처럼 날려버리기도 하였다.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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