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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Jun 15. 2016

지노 배낭여행기 - 네팔 중국편 16

시안 1일

2013년 5 월 3 일( 금 ) 맑음  


시안 센양 국제공황과 시내는 70킬로미터 떨어져있다. 비행기가 늦게 도착해서 버스가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버스는 많이 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직행버스로 편도 27원(미화 4불50전)으로 갈 수 있다. 시내 중앙통에 내리니 소문대로 숙박업소 삐끼가 몰려 드는데 영어로 호객하는 사람 한명도 없다. 아까 공항에서 본것하고 하나도 틀림이 없다. 앞으로 남은 12일간 중국 여행에 문제가 좀 있겠다 싶다. 그 무거운 배낭과 카매라매고 몇 집을 돌고 나서야 한군데 정했다. 한 열군데 돌았는데 영어되는 숙박업소가 하나도 없다. 너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소통이 안된다. 네팔같으면 숙박업소는 무조건 영어는 다 된다. 영어의 세계 공용화 꿈이 중국에서 완전 박살난다. 결국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단인방유?(單人房有:single room) 를 한자로 수첩에 적어주면 대답이 有는 있는거고 沒有는 없는거다. 한자 몰(沒)과 有를 붙여 "메이요"라 읽고 없다는 뜻이다. 有하면 다음은 "온수가능?(溫水可能)" 그리고 또 有하면   "WI-FI可能?" 이렇게해서 진짜로 피곤하게 잘 곳을 구하긴 구했다. 옛말이 틀린게 하나도 없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지 않았나. 궁즉통(窮卽通)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시안의 중앙통인 종루와 고루


아침에 일어나 일단 시내지리나 익힐려고 카매라만 챙겨 가지고 나왔다. 다행히 숙소가 중앙통 금방이라 일단 눈에 띄는 종루와 고루를 찾아 갔다.


   종루

종루 야경

사진은 어제 밤늦게 도착해서 찍은 종루 야경이다.  14세기 명나라때 만든 것으로 종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망루였다. 현존하는 중국의 종루에서 규모가 제일 크다고 한다. 종루 누각은 정사각형으로 종루 높이는 약 40미터이다.


종루위에 달린 저종은 711년 당나라때 주조된 "징윤종"이라고 한다.


종루안에 조그마한 공간에는 온갖 종에 관한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종루

지금은 이 종루를 중심으로 사통팔방으로 길을 통하게 되어 망루에 올라 가 보면 동서남북으로 잘 꾸며진 시안시내를 보게된다. 여기가 거의 중앙통이라고 보면 된다.


종루에 올라서 사방으로 둘러본 시안 시내



  고루

고루

종루에서 약 500m 서쪽으로 가면 고루라 해서 종루하고 거의 비슷한 건물이 있다. 역시 14세기 명나라 유물로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 준다고 해서 고루라 한다. 야경도 멋지다. 둘다 합쳐 50원짜리 표사면 망루 위에까지 올라 갈 수 있다. 일단 올라 가 보면 동서남북 대로가 시원하게 뚤려 있고 현대식 고층건물이 큰 키를 자랑한다.


(사진은  종루에서 바라본 고루)


(고루의 야경사진)


고루에 전시된 각종 북

고루에 오르면 큰북에 24절기를 각각 써서 전시해 놓고 있다. 종루는 아무래도 소리가 크서 주간(성문을 여는 새벽부터 성문 닫는 시간까지)에 시간을 알려주고 고루는 은은한 북소리로 야간(성문이 닫혀 있는 시간)에 시간을 알려주는 역활을 했다고 한다. 누각 면적은 종루하고 동일한데 높이는 고루가 34m로 40m의 종루보다 낮다.


(고루에 전시된 큰 북)


(각 처마밑에 형형색색의 불을 밝혀 밤에 보면 화장한 미인이다)




   세계 4대 고도(古都) 시안(西安)


중국 역사에서 시안을 수도로 정한 왕조가 가장 많고 그 기간도 가장 길다. 주요한 왕조만 살펴보면 하 -은-주로 이어오던 역사에서 기원전 11세기 서주(西周)를 시작으로 기원전 221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秦)나라, 기원전 206년 역발산기개세의 항우를 해하의 전투에서 멸하고 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서한(西漢), 581~618년의 수(隋), 618~907년의 당(唐)까지 무려 1100여년동안 약 13개의 왕조의 튼튼한 수도였다. 그런 장구한 세월동안 수도로 이어왔기 때문에 이태리의 로마, 그리스의 아테네, 이집트의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古都)로 손꼽힌다.


이집트 카이로 근방의 피라밋


중국 시안성


이태리 로마의 콜롯세움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언덕




  시안성벽에 올라


시안성 망루에 올라

시안에 가면 꼭 가보라고 추천하는 곳이 시안 성벽이다. 현존하는 중국 성벽 중에 보존 상태가 제일 양호하다고 한다. 현존하는 것은 명대에 조성된 성벽으로 높이 12m 너비 12-18m  총길이가 14 km가 되는 직사각형 성벽이다. 모양은 동서로 길쭉한 장방형으로 동벽은 2,590m, 서벽은 2,631m, 남쪽 장벽은 3,441m, 북쪽 장벽은 3,241m로 전체 둘레가 약 14km 정도이다. 성내의 면적은 총 12평방킬로미터로 명대이후 증축된 당나라 장안성의 1/7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성벽 높이가 12m로 꽤 높아 보인다)


시안성 망루

시안성은 동서남북으로 4문이 있는데 예전에는 신분에 따라 통과할 수 있는 문이 각각 달랐다고 한다. 특히 남문인 영녕문(永寧門)은 황제 전용문인데 남문으로 들어온 일반인이 역사상 예외로 딱 한명 있었다는데 그가 바로 인도가서 율법공부하고 돌아온 현장법사로 황제가 친히 남문에서 맞아들였다고 한다. 서문인 안정문(安定门)은 당나라때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주로 서역 상인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문인 장악문(长乐门)은 각 지역에서 올라온 공물이 통과하였고 북문인 안원문(安遠門)은 외교 사절단들이 출입했던 문으로 전해진다.


시안성 서문인 안정문

나는 서역상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세계 여행 배낭족은 되니까 나도 서문으로 들어갔다. 공짜는 아니고 입장료 40원 받는다. 서문을 사진에서처럼 안정문(安定门)이라 한다.


시안의 서문 안정문(安定门)


성문안의 돌계단

성문으로 들어가서 12m를 올라가는 돌계단이 가파른데 그래도 안나푸르나 산길에 비하면 양반이다. 천천히 올라 성문위에 서보니 사방이 훤하다.


시안 성안 도로

그래서 성벽위에 올라가면 자전거 대여해주는 곳이 있다고 했는데 자전거 타고 둘러 보라는 말이었구나. 14km를 어느 시절에 걸어서 가보나. 덜렁거리는 카매라달고 자전거도 탈 수 없고. 보니 젊은애들은 끼리 끼리 자전거 빌려서 잘 타고 놀고 있다. 성벽 위를 좀 걷다보니 새로운 건 하나도 없다. 가도 가도 지겨운 인생길같은 사막길이다. 평지 트레킹 좀 하다가 내려왔다.


(폼나는 깃발과 등걸이)


시안 성벽 위의 이정표


실크로드 대형 지도

성벽 위로 올라 가서 기념품점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저런 대형 실크로드 지도가 결려있다. 시안을 출발점으로 해서 돈황-우루무치-알마티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향하는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서역남로가 뻗어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바그다드, 이스탄불, 예루살렘, 카이로, 알렉산드리아까지 해로를 이용하여 로마, 베니스까지 연결된다. 언젠가는 나도 꼭 한번 걸어 가고 싶은 길이다.





  시안 사변 - 중국 근대사의 획기적인 사건


중국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 바로 여기 시안에서 발발하였는데 보통 시안사변이라고 부른다. 역사가들은 종종 그런 표현을 자주 한다. 만약 그 때 시안사변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더라면 중국의 근대사가 과연 어떻게 흘러 갔을까하고 <IF> 즉 만약에 말이야라는 가정을 하곤 한다. 시안사변의 큰 줄거리는 이렇다.


                   (시안사변의 주역 장제스와 장쉐량)


시안사변이 발발한 1936년 당시 중국의 정세는 국민당 총통인 장제스(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모택통이 이끄는 공산당군을 코너로 몰아부쳐 홍군은 9600km를 걸어서 옌안으로 탈출하여 대장정을 마치고 겨우 숨통을 돌리려는 상황이었다. 중국의 동북지방(만주)을 통치하던 장쉐량(張學良)은 일본군의 만주침략으로 그 근거지를 잃고 장제스의 휘하로 들어오게 되어 당시 동북군 총사령관으로 장제스에이어 서열 2위였다. 일본군의 만주침략으로 이에 대항할 목적으로 국공합작(장제스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연합)을 요구하는 여론이 중국내에 고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통인 장제스는 우선 공산당을 먼저 소멸하고 차후에 일본군에 대항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어 장쉐량의 동북군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1936년 12월 장제스가 전용기편으로 지지부진한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으로 날아 왔다. 동북군의 총사령관 장쉐량이 서북군 지휘자 양호성(楊虎城) 장군과 모의하여 장제스를 체포 감금하였다. 일종의 국민당 내부 군사 쿠데타였지만 장쉐량의 의도는 국민당 총통이 되어 권력을 잡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장제스를 설득하여 공산당과 휴전하여 국공합작으로 먼저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설득하여 국공합작을 주장하였지만 다른 일부 강경파 동북군 장교들은 바로 장제스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장쉐량의 반대로 장제스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연민의 정이 모든 것을 박탈당하다


장제스를 설득하여 국공합작의 초안을 작성하여 장쉐량은 연금을 풀어주고 총통과 함께 자진하여 난징(남경) 국민당 정부로 들어가서 쿠데타의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10년 금고형과 5년간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으나 다음날 장제스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 날부터 장쉐량은 장제스에 의해 가택 연금상태로 들어가서 1950년 대만으로 건너가서도 가택연금되어 있다가 장제스가 1975년 죽고 난 뒤 16년이 지난 뒤 1991년이 되어서야 연금이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자유의 몸으로 1995년 하와이로 이주하여 살다가 2001년 하와이 호놀루루 자택에서 103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연민의 정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장쉐량과 장제스의 반쪽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쑹메이링은 first lady로  장쉐량은 동북군의 사령관으로 각각의 길을 갔지만 서로 죽을 때까지 연민의 정을 끊지 않았다고 한다. 1936년 시안사변때 구금 체포된 장제스를 제거하자는 강경파의 주장을 묵살하고 장제스를 살려 둔 것이 "쑹메이링을 과부로 만들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라는 훗날 장쉐량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고, 대만에서도 가택 연금된 장쉐량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것도 쑹메이링의 압력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쑹메이링은 대만에서 거주하다 장제스가 죽고 3년 뒤 1978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2003년 106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사망하였다. 죽기 2년전 장쉐량의 하와이 사망소식을 접한 정신이 말짱한 할매 쑹메이링은 침대에서 대성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쑹메이링이 장쉐량보다 한 살 위다.





   시안사변의 최대 수혜자는 모택동


하여간 시안사변의 덕을 톡톡히 본 인물이 모택동이었다.만약 시안사변이 없었더라면 당시 조직의 기반을 잃은 옌안 홍군은 장제스의 공산당 싹쓰리 전략에 곧바로 무력화되었을 것이 확실시되었는데 시안사변으로 국공합작이 되어 충분한 시간을 벌어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국민당군을 대만으로 밀어 부치게 되었다. 그래서 또 다른 가정은 만약 시안사변이 없었더라면 대만도 지금처럼 본토와 분리되지도 않았고 중국이 모택통이 아닌 또 다른 인물에 의해 통일이 되지 않았을까하고 가정해본다.





  시안의 여러 풍경들


악주연주단 동상

성벽 근처의 악단들이 연주하는 형상을 조각한 청동상


훈수두는 김흥국

여가놀이에는 장기 한판이다. 특이한게 졸이나 다른 말들의 크기가 전부 동일하다는 것이다. 호랑나비 김흥국이는 언제 중국 시안들어왔는지 국수 한그릇 땡기면서 장기 훈수에 열심이다.  


( 시안 기차 역전을 지나가는 성벽)


노천 이발소

시안 성벽따라 장사하는 노천 이발소 모습으로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저런 노천 이발소가 있었다


  상가 거리마다 옛 고풍스런 건물을 세워놓았다


한류가 중국 서부 시안까지 불어왔다. 이훈 미용실 시안 분점.  


시안의 도교사원

무작정 시내를 걷다가 여행책자에도 없는 사찰이 있어 들어 가 보니 매우 큰 절이다. 불교나 유교 사당도 아닌것 같아 도교사원 같았다. 한국 관광객이 좀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성황전 설명이 한국말로 되어있다. 성황전 사진을 찍으러하니 관리인이 찍지마란다. 내가 제일 미워하는 넘이 이런 사람이다. 사진 좀 찍는다고 성황전이 탈나니?


그래서 성황전 사진은 없고 안에 맨눈으로 들여다보니 관우 비슷하게 생긴 인물조상이 있고 좌우로 한쌍씩 있는게 사천왕상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신인이라고 한다.


사찰 입구에 기암괴석으로 장식해 놓고


재물과 부를 기원하는 재신전이다. 여기서 간구하게 기원하면 물질이 이루어 지는가?


재신전 앞 대형향로에서 잘타고 있는 향불


처마밑 연등불을 잡아보고


여긴 다른 제전인 것 같다





  시안의 시장통에서


옛 시장 상인모습을 청동조각상으로 설치

대강 보고 나오다가 아까 본 고루쪽으로 다시 올라 가다 고루 뒤에 있는 엄청난 시장통을 만났는데 여기가 오히려 구경할게 더 많았다. 일단 먹거리 특히 주전버리할게 엄청 많아 주전버리 좋아하는 주변머리 없는 사람은 여기 시장구경만으로도 한 이틀은 족히 보낼 수 있을거다. 시장통 중앙에 청동으로 그 옛날 장사꾼들의 모습을 청동상으로 세워 놓았다.  찐계란 파는 아지매가 무료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여름에 시원한 냉차파는 장사꾼이 꼬마에게 한 잔 따라 주고 있다.


이건 양꼬지가 아니고 오징어꼬지다.


회교 음식점

시장통에 있는 회교 음식점중 유독 한 집에 손님들이 몰린다. 앞에서 조리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특이하게 wok에 일인분씩만 조리해서 사발에 담아준다. 사람이 많이 오는것 보니 분명 맛이 있을거란 짐작이 들어 먹고 싶은데 주머니에 돈이 없다. 결국 마지막 날 다시 가서 한 그릇하고 왔다.





  엉터리 삼계탕으로 


세종대왕체 간판 식당을 발견하고

한가지 골때리는 이야기만 하고 시안 1일을 마감하기로 하자. 그렇게 배를 굶다가 오후 5시경 ATM에서 돈을 빼서 눈여겨 본 한국식당에 갔다. 한자로 뭐라 해놓고 밑에 김치라고 세종대왕체로 되어 있어 내 눈길을 확 끈거다.

입구에는 한국음식 주로 갈비, 삽겹살, 비빔밥, 제육뽂음, 삼계탕, 김밥등  여러가지 메뉴를 사진으로 근사하게 만들어 크게 벽에 발랐다. 보니까 정회원 가격이 3-4원 싼거보니 회원제도가 있는 모양이다. 들어가니 시설이 엄청나게 잘 해 놓았다. 실내 사진을 못 찍었다. 종업원이 메뉴판 들고와서 뭐라뭐라 하는데 귀에 들릴 일도 없고 해서 중국말로 1개를 "이거" 라 한다. 사람한테도 그렇게 쓰는지 모르겠다만 들어가면서 손가락 한개 펴 보이며 "이거"하니 알아 묵었다.(손님 한명이라는 뜻으로)  메뉴판 그림보고 이것을(이거) 한개(이거) 달라는 뜻으로 말했다. 한국사람이 한국식당와서 한국음식 먹기가 힘든데가 중국이다. 배가 고파 입구 사진에서 본 삼계탕을 주문했다. 미국에 있는 한국식당 생각하면서. 푹 고운 작은 닭 한마리에 대추 밤과 수삼 한뿌리정도가 나올 것을 기대하면서 입맛을 다졌다. 한 5분만에 금방 가지고 왔는데...............세상에 삼계탕에 닭다리 2개만 들어 있고 대추 몇개에 밤 1개에 수삼뿌리는 전혀없었다. 게다가 밥도 안주고 반찬은 한가지도 안준다. 다른 테이블보니까 마찬가지다. 내 옆 테이블에 고딩 여자애 3명이 와서 각각 김밥, 비빔밥, 육계장을 시켜 먹는데 그 테이블에도 반찬은 없다. 반찬없이 한국음식 장사하는 놈은 역시 뗀놈밖에 없는 것 같다. 불러서 밥이나 한그릇 달라니까 "라이스"도 못 알아듣는다. 할수없이 수첩에 쌀 미자 써주니 밥 한공기 주길래 말아서 퍼떡 말아 먹고 나왔다. 그런 엉터리 짱께 삼계탕먹어도 배는 여전히 고팠다.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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