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다인이가 한 학기 동안 준비한 뮤지컬 공연을 2시에 마치고, 다른 팀의 마지막 공연인 4시 30 공연까지 관람했다. ((뮤지컬 작품도 어쩜 여행을 앞둔 우리의 마음을 더 설레게 해 준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작품이었다. 런던에서 시작해 파리, 수에즈, 뭄바이, 콜카다, 홍콩, 요코하마, 샌프란시스크, 뉴욕을 거처 다시 런던까지... 비행기가 없던 시절, 배, 기차 등의 교통수단으로 80일 만에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을까?! 를 두고 1초 단위로 계획적인 삶을 사는 남자 '포그'와 리폼 클럽 멤버들이 2만 파운드를 걸고 내기를 하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80일 동안 세계일주를 하는 내용이다. 다인이는 내내 <80일간의 세계일주> 공연을 하고, <16일간의 유럽 일주>를 떠날 거라고 들떠있곤 했었다.)) 공연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축제인 시상식까지 끝나고 나니 저녁 7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공연장이었던 성수아트홀에서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니 8시... 비행기 출발은 밤 11시 55분이다. 저녁 먹고 씻고 미리 싸놓은 짐 챙겨서 9시에는 집에서 출발해 10시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안전 빵이다.
마지막 주말 공연이라 친구들까지 여럿 초대했던 터라, 더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공연을 마친 다인이는, 저녁으로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다인이를 먼저 집으로 올려 보내고, 나는 시장에 들러서 고기를 사서 집으로 가고 있는데, 다인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엘리베이터 고장 났어, 12층에서 멈춰서 걸어 올라왔어" 이러는 것이 아닌가!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집에 왔더니, 진짜 엘리베이터가 12층에서 꼼짝을 안 하고 있었다. 하필 우리 집은 꼭대기층...;; 19층까지 꾸역꾸역 땀 뻘뻘 흘리며 힘들게 걸어 올라가서, 고기를 구워주면서 계속 문밖을 내다보았다. 엘리베이터가 고쳐졌나 싶어서... 늦어도 9시에는 엄청 무거운 트렁크 한 짐과 휴대용 유모차를 가지고 내려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는 왜 고쳐질 생각을 하지 않는가...!! 관리사무소에 전화도 해봤지만, 고치고 있다고만 할 뿐 언제 고쳐질는지는 확답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인이 공연에 따라다니느라, 5살 민찬이를 할머니가 돌봐주시고 계셨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9시에 오시기로 한 상태였다. 어머님에게 전화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어요. 저희가 9시에 내려갈게요, 민찬이 데리고 1층에서 기다려주세요" 하아... 이 무더운 여름, 저 큰 트렁크 하나와 휴대용 유모차 하나 그리고 백팩까지... 저걸 들고 19층에서 로비층까지 내려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어린 민찬이까지 데리고 내려가야 하는 위험 부담은 덜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서둘러 나가야 한다며 다인이 밥을 먹이고 있는데... 우리의 히어로 등장!! 아버님이 19층까지 걸어 올라와 주셨다. 짐을 들어주시기 위해.. ㅠㅠ 준비하고 내려오라는 소리와 함께 트렁크를 가지고 내려가시는 아버님... 하나만 들고 가신 줄 알았는데, 한 손엔 트렁크, 한 손엔 유모차를 들고 로비층까지 내려가 주셨다. (많이 무거웠을 텐데... 감사합니다...) 아버님 덕분에 나는 백팩을 메고, 이대로 집에 두면 냄새날 것 같은 쓰레기 봉지까지 깔끔하게 들고 걸어 내려올 수 있었다. 로비층까지 땀 뻘뻘 흘리며 내려왔는데, 로비층에서 경비아저씨를 만났다! 이제 엘리베이터 고쳐졌다고 기쁜 얼굴로 말씀하시는데, 순간 그 허무함이란...;;; 이 여행... 초장부터 뭔가 싸하다...! 허탈함과 힘듦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 아버님은 무거운 짐을 가지고 내려오셨으니, 손이 떨릴 만도 한데, 공항까지 안전운전도 해주셨다. 민찬이는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마냥 신나 하고, 다인이는 아직도 뮤지컬의 여운이 남았는지, 자기가 맡고 싶었던 역할의 노래들을 큰소리로 불러젖히기 시작했다. 니들도 신나냐! 나도 신난다!! 엘리베이터가 잠시 우리의 앞길을 막는 듯하였으나, 이 또한 지금 이렇게 쓰면서 추억으로 남겼으니 되었다. 뭔가 순탄치만은 않은 여행길이 되겠구나 생각이 드는 한편, 불운은 여기서 끝내자! 나머지 길엔 꽃길만 펼쳐질 거야... 스스로 주문을 걸어보기도 했다.
인천공항 만세! 기다리는 동안 대기하는 곳 바로 옆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동생이랑 잘 놀아주는 누나 덕에 좀 쉴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마셔보는 공항의 공기인가! 코로나가 많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공항은 한산한 느낌이었다. 체크인 수속은 생각보다 훨씬 금방 끝났고, 우리를 편안하게 배웅해주신 어머님 아버님과도 작별의 인사를 하고, 우리는 드디어 비행기를 타러 들어갔다~~ 점점 더 실감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고쳐지는 거 10분도 못 기다리고 계단으로 땀 뻘뻘 흘리며 내려와서 서둘러 공항에 온 보람도 없이, 비행기를 타기까지 우리는 대략 1시간 반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 기다림의 시간은 약 24시간 지속되었다. 인천에서 두바이까지 비행 9시간 30분, 두바이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대시 시간 5시간 20분, 두바이에서 런던까지 7시간 40분... 도합 22시간 30분. 인천에서 1시간 30분 기다린 거 합치니 런던 도착하기까지 딱 24시간이 걸렸네!!!
(2019년에 아이 둘 데리고 체코갈 때 그 고생을 해놓고, 나는 왜 또 이러고 있는가! 잠시 현타...) 심지어 경유 5시간 20분이 별 거 아닐 거라 왜 믿고 있었는가...! 다행히 첫 비행은 아이들이 곯아떨어지는 밤 12시! 비행기가 뜨자마자 민찬이와 다인이는 잠이 들었다. 공항이 한산했던 것과 달리, 비행기는 승객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10세와 5세에게 양쪽 팔다리를 한쪽씩 내어준 채 꼼짝 않고 비행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곧, '비행기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던 그 시간이 좋았어...'라는 생각이 드는 경유의 시간이 돌아왔다.
현지 시각으로 오전 9시 40분에 출발하는 EK029 항공편의 게이트조차 열려있지 않은 새벽 시간... 5시간 20분의 새벽시간은 참으로 인내와 고난의 시간이었다. (집 떠나면 다 고생이여~~) 비행기에서 잠을 푹 잔 아이들은 깨어났고, 한숨도 못잔 나는 두바이 공항에서 피곤에 찌든 이 아이들과 5시간가량을 보내야 했다. 우선 우리의 편식쟁이 이다인은 에미레이트의 어떠한 기내식도 먹지 않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지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 편식쟁이다. 다인이가 외국에서 무난히 먹을 수 있는 건 뭐다?! 바로 맥도널드의 감자튀김과 KFC의 치킨! 마침 맥도널드의 상징 황금색 M 사인을 발견했고, 두바이 공항 저~~ 끝에 있는 맥도널드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왜 두바이 경유 시간에 대한 생각을 못했지? 떠나기 전 로밍을 할 때, 들리는 국가에 두바이 얘기를 빼놓았다. 이곳에서 나는 핸드폰을 켜서 남편과 연락을 해도 될까? 잠시 고민했지만... 잠깐 연락한다고 뭔 일 나겠어? 두바이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남편에게 연락하고, 우리는 행복한 프렌치프라이 시간을 보냈다.. (그나저나 한국에선 시간이 엄청 빨리 갔는데... 여기 5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니? )
맥도널드에서 감자튀김을 먹고 앉아 쉬다가 너무 오래 앉아있는 것 같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하릴없이 공항을 몇 바퀴 돌고, 어느 한가로운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심심한 건 못 버티는 우리 아이들... 다인이는 태블릿으로 넷플릭스에서 다운로드하여놓은 영상들을 보고, 민찬이는 한국에서 챙겨 온 보드게임을 했다. (누나가 1학년 때 학교에서 받아온 퍼즐인데, 요즘 민찬이가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재미있어해서 혹시나 심심할 때 하자 하고 챙겨 왔는데, 틈날 때마다 저걸 했다. 와! 이거 챙겨간 나 자신! 칭찬해!! 마냥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문제 샘플을 보고 몇 개의 퍼즐을 세팅해주면 나머지를 맞추는 형식의 게임이라, 나도 졸린 눈 부릅뜨고 같이 옆에서 머리를 굴려줘야 했다 ^^;;
5살 아이라, 한국에서는 거의 타지 않는 유모차. 유모차를 가져갈까 말까 여러번 고민했는데, 가져가길 백번잘했다!
두바이의 아침이 밝았다. 이제 두바이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탈 시간이 가까워졌다. 비행기 탈 시간 되니까 다시 잠이든 민찬이... 하하하... 비행기 타기 직전에 깨워서 유모차 접어 기내에 싣고 우리의 두 번째 비행을 시작했다. 이제 7시간 40분만 버티면 돼!! 할 수 있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잠이 싹~~ 깨버린 아이들은 기내 의자에 비치된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같은 그림이 나오면 눌러서 터트리는 아주 단순한 게임이라, 민찬이도 쉽게 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우리 셋이 나란히 앉아서 누가 최고 기록을 내나 시합하며 몰두했더니 의외로 시간 순삭이었다.) 여기서 기내식이 또 2번이나 나왔다. 에미레이트의 기내식이 맛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한국인의 입맛에는 댓츠 노노~! 그래도 민찬이와 나는 빵, 닭고기, 음료수, 과자 등등을 먹으며 배를 채웠지만, 다인이는 역시나 낯선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한국에서 짐을 쌀 때 햇반이나 김을 챙겨갈까 잠시 고민했었는데, 여행의 묘미는 또 그 나라의 현지식을 먹어야 제맛 아니가! 생각했던 나 자신을 격하게 원망한다. 햇반과 김과 스팸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야 했어!
그리고 마침내, 8월 8일 낮 2시 25분! 드디어 런던 히드로 공항에 떨어졌다!
아빠가 프라하에서 런던으로 12시쯤 먼저 도착해있기로 한 상태였다. 이제 나 혼자 아니고, 곧 아빠가 합류해서 같이 다닐 테니, 한시름 놓았다! 이렇게 힘들었던 나홀로 두아이 케어, 공항의 24시간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