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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나 먹는 거야.

by 주머니

운동회 하는 날 바나나를 가져온 친구는 껍질을 까서 들고 다니면서 먹었다. 대놓고 바나나 사 왔냐고 한 입만 하는 친구도 있었고 나처럼 부러워서 침만 흘리며 엄마를 괴롭히는 친구도 있었다.

"나도 바나나 한 개만. 한 개만. 바나나 아아아~~~"

하고 노래를 불러도 운동회는 가을 제철에 나는 밤과 땅콩을 먹는 거라며 목 막히면 물마시라고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과일 먹고 싶으면 깎아 온 사과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을 알고 있었다. 시장 따라가서 바나나 사달라고 조르는 내게 엄마는 한 개에 천원이나 한다며 비싸다고 했다. 아빠가 술이 잔뜩 취해 몸을 못 가누는 날이면 얻어먹던 게 바나나였다. 시장에서 사도 비싼 바나나를 집 앞의 과일 가게에서 비싸게 사왔다며 엄마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했다.

"이 비싼 거를 뭐 하려고 사오는교"

엄마가 술 취한 아빠를 붙잡고 뭐라고 하든 말든 나는 옆에서 껍질 까는 것도 재미있다며 아껴먹던 바나나였다.

외할아버지는 남해의 어촌마을에서 작은 배를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집은 대문을 열면 바다가 보였다. 창문을 열면 파도소리가 너무 커서 그 좁은 방에서도 크게 말해야 하는 오션뷰였다. 할아버지는 배를 띄워 물고기 잡아 아들 다섯 명과 딸 하나를 키웠다. 할아버지가 잡은 물고기를 먹고 자란 외삼촌 다섯 명과 우리 엄마 한 명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나이보다 더 오래 살았지만 어릴 적 입맛 그대로다. 가족모임을 하면 삼촌들과 엄마는 물고기를 선호했다. 질리지도 않는 지 소고기보다 물고기를 즐겼다. 그들의 고기 먹으러 가자는 말은 물고기 먹으러 가자는 말이었다.

어려서는 해산물과 생선이 귀한 적이 없다. 택배가 잘 안 되는 그 시절에도 할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사위 먹이겠다고(말씀은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밖에 없는 딸 먹이겠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개불이며 해삼, 낙지와 이름도 모르는 물고기들을 남해에서 부산까지 여러 루트로 보내주셨다. 사과상자 크기의 아이스박스가 남해에서 내려오면 그 날은 하루 종일 비린내가 났다. 엄마와 아빠는 도마를 마주하고 개불을 가르고 해삼을 잘랐다. 물고기의 내장을 빼내고 먹기 좋게 포장해서 냉동했다. 해산물은 냉동이 안 된다며 빨리 먹으라고 했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개불과 해삼, 낙지를 그때는 거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 아빠가 손질해 주는 해산물은 너무 컸다. 지금의 횟집에서 먹는 것처럼 감질나게 작게 잘라주지 않았다. 개불은 크게 삼등분, 해삼은 반만 잘랐다. 낙지는 그냥도 먹는 거라며 칼질 몇 번 해주고 먹으라고 했다. 덜 자란 입맛은 살아 움직이는 자연산 해산물이 싫었다. 그래도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은 해산물이 있었다. 전.복. 이름도 참 고급스러웠다. 전복이라니. 개불이나 해삼은 이름부터 촌스러웠다. 이름만 들어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전복은 달랐다. 먹어보지 않아도 화면으로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였다. 전복이라면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선주의 외손녀였지만 전복을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엄마를 졸랐다. 그러나 엄마는 쉽게 잡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TV에서는 늘 전복이 고급이라고 했다. 너무 귀하고 고급이라 다 일본으로 수출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 귀하고 고급이라는 전복 좀 먹어보자고 했다.

"고동이나 무라. 할배 고동 보낸 거 맛있다."

"고동 말고. 전복 무보고 싶다. 할배한테 잡아 달라캐라."

"전복은 몬 잡는다. 전복은 잡혀도 팔아서 돈해야지. 비싸서 부자나 묵는 기다."

할아버지가 보내 준 어른 주먹만 한 고동은 이제 전복보다 값을 더 쳐준다고 해도 찾기 어렵다. 자연산 개불과 해삼이 쌓여있고 산 낙지가 가득한 사과상자 크기의 아이스박스를 돈 주고 사려면 특별한 날에 큰 돈 쓸 마음이어야 한다. 친구들이 따라다니며 한 입만을 외치던 바나나는 이제 싼 과일, 선주의 외손녀도 못 먹던 전복은 이제 저렴한 해산물. 마트에서 살아있는 싱싱한 전복 5개에 7900원이다. 이렇게 싸도 되나? 그렇게 먹고 싶던 전복인데 말이다. 5마리 전복을 씻어서 버터에 구웠다. 아무리 전복이 싸졌다고 해도 전복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다. 감자랑 브로콜리, 마늘을 전복보다 많이 해서 버터에 튀기듯 구웠다. 어른에겐 술안주, 아이들의 순한 반찬이 완성되었다. 전복도 안 잡아주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날 보면 늘 너는 왜 아들로 안 태어났냐고 나무라듯 말하셨다. 너희 엄마는 딸만 둘이니까 네가 야무지게 커서 엄마 잘 챙기라고 하셨다. 그물 구멍을 메울 때는 옆에 앉히시던 장덕만 할아버지.

"요래 오래 할배처럼 해봐라" 하시며 숨겨놓은 양갱이나 사탕을 외삼촌들의 자식이 아닌 내 입에 쏙 넣어주셨다. 지금은 부자들이나 먹는 자연산 개불, 해삼과 낙지를 보내셨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부유하게 컸다는 걸 이제야 안다.

흔한 바나나, 저렴한 전복.

다음은 뭘까?

싸구려 샤넬, 값싼 벤츠는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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