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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단지 Sep 24. 2021

달랑 남은 종이 한장

팔랄랑~~

노랗고 빛바랜 종이 한장이 발밑에 떨어졌다. 책장에 끼어있던 것이 책을 빼던 손길에 딸려 나와 바닥으로 날린거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건지... 허리를 숙여 집어 올렸다. 문득 기억해낼 수 있었다. 종이에서 느껴지는 친숙한 느낌. 그건 어머니의 글씨였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늦여름. 하지만 봄날의 따스함이 날 감싼다. 그때가 봄이었다고 몸이 기억을 해낸다.


월요일 아침 유치원 가는 손주들을 준비시키느라 어머니는 분주하셨다. 애들목에 수건도 받쳐 뽀독뽀독 세수시키고 코도 팽팽 풀리셨다. 머리도 쑥, 팔도 쑥 집어넣어 유치원복도 입히셨다. 양말을 신기다 말고선 "이 발로 유치원엘 가는 게야"하시며 발에 뽀뽀를 하고 앙 무는 시늉을 하셨고 아이들은 깔깔 웃었다. 밥 뜬 숟가락엔 반찬도 소복소복 올려주시고 양치하느라 묻은 물도 손으로 슥슥 닦아 얼굴을 말끔히 해주셨다. 현관에 서서 애들을 안아보고 머리도 쓰다듬고 엉덩이도 툭툭하시며 "잘 갔다 오너라. 할머니 부산에 붕 갔다가 금방 오마. 이쁜 내 새끼들"하셨다.


그런데 그걸론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퍼뜩 신발을 신고서 아이들이랑 같이 나오셨다. 양쪽으로 아이들 손잡고 껑충껑충 뛰는 발장단이 아이들보다 더 신나 보였다. 누가 보면 어머니가 유치원엘 가나 싶게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도 가만있질 않으셨다. 길가에 핀 민들레 홀씨를 후 불어 날리고선 아이들과 쫓아다니기 바빴고 차 밑에 숨은 고양이를 찾느라 머리를 바닥까지 숙이고 쳐다봤었다. "잡으로 가자. 잡으로 가자" 하며 아이들과 장난치느라 골목엔 웃음이 가득했고 봄바람도 간지러웠다. 아이들이 유치원 버스에 올랐고 어머닌 창 너머로 아이들과 눈 맞추고 서계셨다. 버스는 떠나고 멀어져 가는 아이들 뒤꼭지에 대고 어머니는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셨다.


신났던 발장단이 아이들이 없으니 시무룩했다. 어머니랑 둘이서 집으로 와 아침밥을 먹고 부산 갈 준비를 하셨다. 아이들 보러 오는 건 그리 설레고 좋았던 게 아이들 두고 부산으로 가는 건 이리 서운한 일이었다.

가방을 챙기다 말고 "종이랑 연필 있냐?" 하신다. 아이들이 그림 그리고 노는 노랑 종이 한 장을 꺼내드렸다 "아이고 귀엽다 귀여워. 딱 됐다"며 좋아하셨다. 책상에 앉아 연필을 쥐고선 한 자 한 자 뭔가를 쓰셨다. "애들 유치원 갔다 오거들랑 주거라" 하셨다. "승후야 재현아 사랑해." 이 세 마디가 노란 종이에 담겨있었다. "좀 전에 봤는데도 이리 삼삼 거리냐. 또 보고 싶구나..." 혼잣말을 하셨다.


그래 그날이었다. 10년도 더 지난 봄날 그날이었다. 이 노랑 편지를 책상에 가지런히 두고서 어머니는 집을 나서셨다. 현관에서도 애들 신발을 한번 더 매만져보고 "아이고 이쁜 것" 하시며 발을 못떼하셨다. 그렇게나 못가하시더니 어머니는 안 계시고 이 종이만 한 장 달랑 남았다.


우리 애들은 이제 할머니가 없다.

"아이구 우리 강아지" 하며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던 할머니 손이 없다. 숨바꼭질하느라 옷장에 암만 숨어있어도 "찾았다 요깄네" 하며 옷장 열고 안아 줄 할머니품이 없다. 문지방에 발 찧어 울고 있으면 나쁜 문이 그랬냐며 애꿎은 문을 때리고 아이들 편 들어주던 할머니 곁이 없다. 바람이 차다며 단추 여미어주던 할머니가 없고 더운 밤 애들 머리를 더듬어보곤 설렁설렁 부채질해주던 할머니가 없다. 달려가서 먼저 앉을 거라며 다투던 할머니 무릎이 없고 동네를 빙글빙글 돌다 업혀 잠들던 푸근한 할머니 등이 없다. 그 빈자리를 뭘로 채울까? 내가 어머니를 잃은 것보다 아이들이 할머니를 잃은 게 더 속상하고 더 아프다. 할머니 사랑을 듬뿍듬뿍 받을 건데 그러질 못하니 안쓰럽기만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서 폰을 정리했었다. 주머니 저 구석 꼬깃꼬깃 접힌 종이가 있었다. 한 겹 한 겹 펼쳤다. 아이들 이름과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쓴 메모였다. "며느라 애들 전화번호 좀 불러다오" 하시던 그날 이었는가 보다. 내가 불러드리는 말 너머에서 어머닌 한 자 한 자 쓰고 계셨을 거다. 행여 틀릴까 귀쫑긋해선 숫자 하나하나를 받아쓰셨을 거다. 그리고 번호를 꾹꾹 눌러 드디어 듣고 싶던 반가운 목소리를 들으셨을 거다. 아이들은 "할매" 하며 촌스럽게 불러대고 어머닌 "아이구 내 새끼" 하며 다정히 답해주셨을 거다. 눈앞이 뿌예지고 글씨가 흐려진다. 유치원 가던 날 아침 햇볕은 반짝였고 바람은 따뜻했고 손 흔들던 어머니 뒷모습은 다정했다. 그 날이 봄날이었다. 아이들은 기억할까? 등에도 볼에도 이마에도 머물렀던 할머니의 포근한 손길과 부드러운 눈길을 그 정답던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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