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큐(Perfect Cue): 보이지 않는 신호들
"배달 앱 화면이 '파사드'고, 포장 용기가 '인테리어'입니다." 완벽한 실링(물리), '맛있게 먹는 법' 안내문(정보), 손편지(인간). 보이지 않는 주방의 '신뢰'를 파는 법.
"맛은 보지 마십시오." 현서의 과제를 수행하는 태웅. 그는 난생처음 '맛'이 아닌 '경험'을 해부한다. 1분의 언박싱.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맛'이 아닌, '배신'의 증거들이었다.
그날 밤.
'송정옥'의 마감이 끝나고 홀로 남은 이태웅의 앞에는, 낯선 가게들의 '국밥'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1번 가게. '별점 4.9, 리뷰 999+'
2번 가게. '이 동네 1위, 속풀이 전문'
...
5번 가게. '신속 배달, 양으로 승부'
그는 차현서의 지시대로, '맛'을 볼 숟가락 대신, '증거'를 기록할 펜과 노트를 들었다. '맛'의 장인에게 '맛'을 보지 말라는 것은, 화가에게 눈을 감고 그림을 감상하라는 것만큼이나 가혹한 고문이었다.
[1번 가게 : 별점 4.9]
앱 화면: 쨍하고 밝은 조명. 김이 모락모락 나는, 누가 봐도 '맛있어 보이는' 사진. (긍정적 정보/물리 증거)
배달: 40분 소요. 라이더가 건넨 비닐봉투는 축축했다.
언박싱: 봉투를 여는 순간, 깍두기 국물과 육수가 뒤엉킨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부정적 후각 증거)
용기를 꺼냈다. 플라스틱 뚜껑과 용기 틈새로 뽀얀 국물이 새어 나와, 봉투 안은 이미 작은 '홍수'가 나 있었다.
'최악이다.'
태웅은 생각했다. 이 가게의 주방장이 아무리 훌륭한 육수를 끓였어도, 고객이 받은 첫 '경험'은 끈적한 국물이 묻은 손과, 시큼한 냄새였다.
[2번 가게 : 동네 1위]
포장: 완벽했다. 랩으로 칭칭 감고, 용기 자체도 단단했다.
언박싱: 뚜껑을 열었다. 밥이 국물에 '말아져서' 왔다.
"..."
태웅은 할 말을 잃었다. '편리함'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이미 국물을 빨아들인 밥알은 죽처럼 불어 터져 있었다.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12시간 끓인 육수도, 이렇게 오면 3분 끓인 맹물과 다를 바 없다.' (부정적 물리 증거)
[3번 가게 : 튀김 서비스]
언박싱: '리뷰 이벤트'로 받은 '새우튀김'이 동봉되어 있었다.
하지만 튀김은 밀폐된 국밥 용기에서 나온 뜨거운 '증기'를 이기지 못했다. 종이 포장은 눅눅하게 젖어 있었고, 튀김은 바삭함 대신 '축축한 빵'의 식감만 남아 있었다. (부정적 물리 증거)
'서비스'가 '불만'이 되는 순간이었다.
4번, 5번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곳은 밥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어떤 곳은 반찬 용기가 제대로 닫히지 않아 김칫 국물이 다 새어 있었다.
이태웅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맛'을 보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부, 끔찍했다.'
이 가게들은 '맛'을 판 게 아니었다. 그들은 '배달'이라는 시스템의 '실패'를 팔고 있었다. '송정옥'의 '깨진 유리창'보다 더 치명적인, '끈적임', '눅눅함', '역한 냄새'라는 '부정적 증거' 덩어리였다.
그때였다. '딸랑-'
마감한 가게의 문을 누군가 열쇠로 열고 들어왔다. 차현서였다.
그녀는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힐끗 보더니, 태웅이 작성한 '부정적 증거 리스트'를 집어 들었다.
"과제는 다 하셨나 보군요. 맛은... 어땠습니까?"
"맛... 보지 않았습니다."
태웅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현서 님이 하신 말씀... '언박싱'이 무슨 뜻인지."
그가 1번 가게의 '새어 나온 국물'을 가리켰다.
"이건...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배신'입니다. 주방장이 아무리 완벽한 '맛'을 만들었어도, 고객이 받은 건 이 '끈적함' 뿐입니다. 이 '포장'이, 이 가게의 '인테리어'이자 '서비스'의 전부였어요."
"그리고..." 그가 3번 가게의 '눅눅한 튀김'을 가리켰다.
"이건 '서비스'가 아니라 '모욕'입니다. 고객 경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태만'입니다. 3주 전의 저처럼."
차현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
"합격입니다, 사장님. '맛'의 장막에서 드디어 빠져나오셨군요."
그녀가 태블릿을 켰다.
"이 5개 가게가 '부정적 증거'의 교과서라면, 이제 우리는 '긍정적 증거'의 교과서를 만들 겁니다."
그녀가 화면에 띄운 것은, 복잡한 구조의 포장 용기 설계도였다.
"첫째, 국물은 '완벽하게' 실링합니다. (부정 증거 제거)"
"둘째, 면이나 밥은 '절대' 국물과 함께 담지 않습니다."
"셋째, '송정옥'의 '맛'을 보증할 '맛있게 먹는 법'(정보적 증거)과 사장님의 철학이 담긴 '손편지'(인간적 증거)를 동봉합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태웅을 바라봤다.
"우리는 '곰탕'을 배달하는 게 아닙니다, 사장님.
'60년 전통 송정옥의 경험을, 집에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신뢰'를 배달하는 겁니다."
이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맛'을 넘어선 '경험'의 설계.
그의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17화에서 계속......
배달 비즈니스는 '맛'이 아니라 '신뢰'의 비즈니스다.
고객은 '환대'가 사라진 비대면 거래에서, 오직 '언박싱'의 1분을 통해 '신뢰'를 확인한다.
국물이 새는 것(물리적 부정 증거)은 '사소한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인간적 부정 증거'이자,
'주방의 시스템이 엉망'이라는 '정보적 부정 증거'다.
'언박싱'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주방과 직원을
고객에게 '증명'하는 유일한 '무대'다.
이 무대에서 실패하면, 당신의 '맛'은 영원히 커튼 뒤에 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