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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Sep 23. 2022

삶의 마지막은 팬티야 팬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

https://youtu.be/5ZP2IE8_K8I

[송새벽] 삶의 마직막은 팬티야 팬티!!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팬티는 5만 원에서 몇 백 원 빠지는 거 사 입어.
내가 오늘 죽어도,
교통사고로 죽든 강도 당해 죽든
병원에 실려가 빨개 벗겨놔도
절대로 기죽지 않게
비싼 팬티 사 입어.
형은 얼마짜리 사 입어?
이거는 되게 중요한 거야.
죽어서 쪽팔린 거 이거는 대책이 없어.
죽어서 팬티 못 갈아입어!
마지막은 팬티야~~~~~
수의는 다 똑같이 입는 거고
내 마지막은 내 팬티야~~~~~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막사는 거 같아도
오늘 죽어도 쪽팔리지 않게
매일매일 비싼 팬티 입고
그렇게 비장하게 산다는 거야!

https://youtu.be/yhW63CB5tTo

[이선균] 오늘은 못 죽어


내가
오늘은 못 죽어.
비싼 팬티가 아니야.


웬 팬티 타령들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이 장면에서 멈칫했다. 팬티... 그렇지...

오규원 시인도 팬티 얘기를 했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병원을 갈 때는 괜찮은 속옷을 챙겨 입는다. 목욕탕이나 수영장을 갈 때도,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도 이왕이면 괜찮은 속옷을 신경 써 고른다. 이 외에는 대개 낡은 속옷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입고 다닌다. 눈에 띌 일이 없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언젠가 훨씬 어렸을 때,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고무줄선이 찢어진 팬티를 입고 나온 날, 길을 걷다 문득 만약 내가 무슨 일이 있어 병원에 실려간다면, 그래서 누군가 내 팬티를 보게 된다면 어쩌지... 남의 시선에 한창 신경이 쓰이던 20대 초였던 것 같다. 겉은 한껏 꾸미고 예쁘게 화장도 하고 멀쩡한 아가씨의 찢어진 팬티는 왠지 모를 낯뜨거움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날은 더 조심히 다녔다.

   

심리학자 아들러에 의하면,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력은 우월성의 추구라고 한다. 인간의 삶은 우월에 대한 추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모든 사람은 '위대한 향상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욕구는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아래에서 위로,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나아가는 동기이다. 그 우월성의 목표는 사회적이며 모든 사람의 안녕에 두루 관심이 있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인류의 운명을 향상할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한동일 고려대 교수 칼럼 참고, 글로벌 이코노믹, 2021-01-13]


팬티, 자존심, 수치심의 상관관계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인간의 우월의식은 본능적인 욕구라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어 검색을 하다 보니 아들러의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렸던 내가, 나의 아저씨의 배우가, 오규원 시인이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쪽팔림'이다. 어느 정도의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도 쪽팔림을 느끼게 되고, 비교 열위에 놓일 때도 쪽팔림을 느낄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팬티에는 크게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남이 보지 않는다면 찢어진 팬티를 입는 게 굳이 쪽팔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팬티의 쪽팔림은 누군가비교, 누군가시선으로 인한 쪽팔림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의식하는 것일까. 아들러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 안에서 사회적 관심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사회적 관심을 정신건강의 척도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온전히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고, 인간의 뇌에서는 여러 반응이 가지치기를 해나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보통의 건강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경우, 본능적인 '사회적 관심'의 작용으로 시선이 타인을 향하게 되는 것이고, 그 과정의 가지치기 중 한 현상이 비교 우위, 비교 열위, 자존심, 수치심이 아닐까.


한 번 상상해보자. 어느 날 안타깝게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여 의식이 없는 나는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지게 된다. 수술복으로 환의 하는 과정에서 나는 옷이 벗겨질 것이다. 그런데 그날 내가 입고 간 팬티 엉덩이에는 애기 주먹만 한 구멍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겪는다고 상상할 때 제일 먼저 드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수치스러운 느낌도 그중 한 가지 일 것이다. 사실 나의 경우라면 수치심이 가장 크게 느껴질 것 같다.


수치심: 자와 자존심의 연장에 있는 개념으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이다.(위키백과)


20대 초의 나는 예뻐 보이고 싶고 멋져 보이고 싶어서 한껏 멋을 부렸을 테고 그렇게 자존심을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자존심: 자기에 대해 일반화된 긍정적인 태도 (위키백과)

자기의 능력에 대한 자신 또는 소속집단으로부터의 승인을 기초로 발생하며, 자아와 초자아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21세기 정치학대사전)


수치심과 자존심은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나 타인의 시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나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나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 이 욕구는 우리를 발전시키고 향상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좌절, 우울, 방어기제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슬픔도 성냄도 불안도 긴장도 우울도 모두 가장 깊은 이 욕구, 나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에서 파생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은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도 연결될 것이다.

누군가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네, 확실히 저는 저를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제 자식보다도 저를 더 많이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를 가장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망설이다 대답을 놓치고만 말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는 건 무얼까 하며 기억을 더듬더듬 뒤적이다 시간이 흘러갈 것 같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을 때,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대답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이 무언지 잊고 살기도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공기처럼 익숙해 느끼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팬티에 있다.

당신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시선 앞에서는 좋은 팬티를 골라 입을 것인가요?

답이 그렇다 라면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모습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뿌리를 찾아보았다. 사실 모든 발전은 계단과 같아서 사랑에도 계단식 단계가 있다. 더 건강한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건강한 자존감이 형성된다면, 그때는 팬티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인디언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은 고귀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고귀한 것은 예전의 당신보다 더 우월해지는 것이다.' (나무위키)

언젠가는 고귀한 방석 위에 안착해 팬티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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