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썸을 타던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 장거리 연애를 했던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3~4개월쯤 된 시점에 불쑥 나타난 인연이었다. 나는 그와 썸을 타면서부터 전 남자 친구를 아직 다 잊지 못한 상태라는 것과 연애도 결코 가볍게 하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심경을 말했었는데,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할수록 그는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서로에게 호감이 있으니 천천히 알아가고 싶다고 했다.
천천히 다가와 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거기다 동갑내기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가 유머감각이 있어서 그런 건지 대화하는 게 즐거웠다. 티키타카가 잘 맞는다는 느낌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순조롭게 썸이 이어지고 사귀게 되었는데 그 후로 사건이 하나 생겼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술’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나는 술을 자주 마시지 않는다. 마시더라도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나 많이 먹는 정도다. 특히 주중에는 다음날 일에 지장이 있을까 봐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그는 나와 다르게 사람들과 만나 술을 먹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즐기는 정도인 줄 알았으나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런 자리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자주 마시지 않는다는 그의 거짓말이 들통난 셈이었다. 이전 연애가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취미는 있어도 친구들을 만나거나 동료들과의 술자리는 아주 가끔 있는 사람을 오래 만나다가 약속이 잦은 그를 접하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다 그가 동료들과 술을 진득하니 먹고 크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관계를 더 지속하기보다 여기서 끝내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에 잠겼다.
'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연애 때는 그렇다 쳐도, 먼 미래를 보고 진지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술이 큰 문제를 만들지 않을까?'
'나랑은 안 맞는 사람인 것 같아.'
수많은 생각으로 업무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술 좋아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고, 술이라는 매개로 신경 쓸 거리가 생기는 건 연애를 하면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문제들로 나를 신경쓰게 할 사람을 만나기엔 내 나이가 적지 않고 그러니 처음부터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다는 생각과, 그래도 내 의견은 말 해보고 정해보자는 생각이 와리가리 했다.
퇴근 후 그에게 나는 술을 많이 먹고 새벽까지 먹는 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변수가 있어서 술 조절을 못 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인 것 같다며 관계를 정리하자는 비수를 꽂는 말을 했다. 그리고 길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왜 본인이 그렇게 술을 절제 못하고 마셨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잘못한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내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
"둥둥이 신경쓰고 불편해 하면 맞춰주고 싶다는 생각이 커. 둥둥 말을 듣고 노력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내가 본인에게 실망한 것을 느끼고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사람한테 바닷가에서 물놀이는 딱 1시간만 하라는 말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느낌일 텐데 내가 원하는 부분을 듣고 노력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니 한 번만 믿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 디폴트는 술 문제가 없었는데 그 초기 입력값이 완전히 부서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내 인생 가치관의 디폴트와 그의 디폴트가 매우 달랐다. 살아온 날만큼 우리는 많은 부분을 맞춰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에 걱정도 됐지만 생각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노력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고 그 과정에서 신뢰감이 조금씩 쌓였다.
술자리에 갈 땐 편하게 즐기고 오도록 했고, 그가 일찍 들어갈 때마다 폭풍 칭찬을 해주었다. 그는 나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본인만 일어나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일찍 들어갔고, 나와 여행가기로한 전 날 술자리에서는 집에 더 일찍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서 존중하고 수용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사람은 저마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기 어려워 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를 조금씩 희석시키고 길들이는 일도 연애의 재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와 상대의 중간 지점을 맞춰 가는 그 과정에서 얻는 행복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할수 있는지 없는지는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가 나에게 확신을 줬으니 한 번은 믿고 물 흐르듯 지내보아야지.
우리의 중간지점을 맞춰 가보자는 말,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더 큰 신뢰가 피어나기를. 나는 과연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일까? 혹여나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괜찮다. 내 생각과 선택은 늘 옳은 걸테니까.
*맞출 수 있는 지점이 있고 없는 지점이 있음을 간과했다. 내 기준에 지나친 음주는 타협이 불가했다! 독자분들은 부디 술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중간 지점을 맞춰가기를 바란다.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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