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자욱한 길을 전조등에 의지하며 운전해 본 경험이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는 자주 안개가 끼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길이도 길고 겨우 4차선 밖에 되지 않는 그 교량은 안개로 인한 사고도 잦은 곳이다. 바로 앞의 자동차 후미등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시야가 불투명한 날이었다. 아주 느린 속도로 기어가듯 운전을 했다. 혹여나 앞에서 차들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귀도 쫑긋 세운 채로, 언제든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도 단단히 하고, 어서 이 희읍스레한 안개가 걷히기만을 바라면서, 기나긴 도로위를 영원처럼 달렸다. 거짓말처럼 안개가 사라지고 나자 몸의 긴장이 풀렸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어느 가을, 제주도 숲에서 나는 다시 안개를 만났다. 축축하게 젖은 잎사귀들, 울창한 나무와 안개를 뚫고 내리 비치는 빛, 숲의 냄새, 차분한 걸음걸이, 피부에 닿는 소슬한 공기까지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천천히 숲을 지나왔다. 이제 불투명은 탐험의 대상이었고, 미지의 판타지 세계처럼 궁금하여 얼른 파헤쳐 보고 싶은 즐거움이 되었다.
서해 바닷가는 안개가 자주 출몰한다. 어떤 계절에도 정착하지 않은 애매한 그런 날에 바닷가에서 해무를 본 적 있는가. 그것은 광활한 쓸쓸함을, 고독함을, 외로움을 가득 이고 바다위를 유령처럼 걸어다닌다. 이런 날 높은 전망대에 올라서면 마치 바다 위로 불투명한 커튼을 드리운 듯, 바람에 휘날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숨겨왔던 무의식의 기억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 오래 바라보지는 못했다.
안개 속과 같다는 것은 불안함과 신비함과 처연함과 무기력함, 아득함 등의 감정을 내포한다. 꼭 삶과 닮지 않았는가. 삶은 우리가 안개 자욱한 '어딘가'에 놓일지 모른다는 사실만 명확하다. 그 곳이 위험천만한 도로 위 일지, 상쾌한 숲 속일지, 쓸쓸한 바다 앞일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흐린 눈을 자처하고 희미한 풍경 속을 휘청휘청 걸어갈 적도 있다.
무엇이든 선명하게 바라보고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덜 슬플까? 덜 불안할까? 덜 무기력할까? 그 모든 것이 아련하기에 우리는 인내하고, 발 밑을 살피고, 더 잘 보려고 노력하는 것 아닐까. 그래 인정하자. 20대까지만 해도 그 불명확함이 싫어 뭐든 윤곽이라도 붙잡기 위해 발버둥 쳤다. 대학에도 가고, 영어 공부를 하고, 취업 지원서를 쓰기 위한 스펙들을 쌓았다. 그러나 30대 후반에 접어든 나는 퇴사를 했고, 그간 쌓아온 스펙이고 경력이란 게 다 무슨 소용이었단 말인가. 이제 나는 다음 달 수입도 예상하지 못한다. 답이 없는 질문이 날마다 도타워 진다. 그러나 나는 20대 때 만큼 불안하고 슬프지는 않다. 약간의 불편함은 있으나 한 편으로 기대감도 있다. 희망 같은 것을 품기도 하지만 낙관도 비관도 쉽게 하지는 않는다.
인생이란 모호한 몇 마디 말로만 정의할 수 있을 뿐인데, 그 모호함 속에 모든 감정이 다 포함되어 있다. 웃고 있지만 슬픈 삐에로도, 오후 나절 하늘에 뜬 희미한 낮달도, 모질기만 했던 어머니의 사랑도, 진흙에서 피어나는 꽃도, 죽을만큼 살고 싶었던 어떤 이의 자살도, 살기 위해 고공의 크레인에 올라섰던 사람도 우리는 이해하지만 그 모든 과정과 감정을 세세하게 설명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는 형태로 보여준다. 그 전부를. 마치 눈에 선명하게 보이지만 손에 부여잡을 수 없는 안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