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생활
연희동 상점을 운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판매하는 물건의 가짓 수도 점점 늘어났다. 소비자의 발길이 끊길까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그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 상품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상점을 접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자 너무 많은 상품에 둘러싸여 이제는 처치가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박스 채로 창고 방에 방치된 물건들은 시간을 죽이며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깊은 잠에 들었다.
남편이 혼자 판매할 상품을 만들고 있는 지금은, 물건의 가짓수를 쉽게 늘릴 수도, 대량으로 생산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만들고 싶은 것을 신중하게 논의하고, 제 수명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듦새를 가다듬는 것이 그 몫으로 여겨진다.
상품에 불필요하게 과장되거나 포장된 의미를 부여하고, 지속적으로(지겨울 정도로) 전달하여 소비를 부추기는 행위를 멈출 수 있을까. 그리하여 누군가 우리의 상품을 그 어떤 방해도 없이 고심 끝에 고른 생활의 물건으로, 쉽사리 식지 않는 애정의 물건으로 소유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나에게 가장 큰 숙제로 남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현재는 소비 사회, 더 나아가 소비 지상주의, 물질 만능 주의에 이르렀다. 범람하는 미디어의 목적은 대체로 소비를 부추기는 데 있고, 그 속삭임은 더욱 교묘해져 기능의 필요성을 넘어 마치 소비가 (고급) 취향, 더 나은 삶, 가치관까지 꾸밀 수 있다고 말한다.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거나 물건에 대한 애착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다. 우리 집에 존재하는 남편과 나의 물건들은 우리의 추억이기도, 취향이기도, 삶의 축적이기도 하다. 특히 남편이 '제작자' 즉,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기에 물건은 우리 삶을 책임져 주는 수단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구석에 박혀 있는 물건들, 진즉 버려야 함에도 처리하지 못하고 다음 이사까지 결국 짊어지고 가게 될 수많은 불필요한 물건들이 거슬려 문득 참을 수 없게 갑갑하다. 때로 집이 우리를 위한 공간인지 물건을 위한 공간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소비와 물건과 우리의 생활에 대해. 나의 소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며, 소매업자로서 타인의 소비 또한 함께 고려할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 아무리 조그만 구멍가게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