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도타워진다. 뜨거웠던 한낮의 열기가 꿈처럼 멀어지고, 새벽녘 싸늘한 공기에 잠시 깨어 이불을 목 끝까지 추켜 올리고 다시 잠이 든다. 얼마 남지 않은 달력이 공중에 맥없이 떠있다. 달력을 가만 보다가 몇 월 며칠하는 숫자가 계속해서 반복 순환하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고민한다. 나아가는 일과 계속해서 돌아오는 것들 사이에서 무엇이 상충하고, 무엇이 보완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아무리 떠나도 다시 돌아오는 계절은 많은 이들이 과거의 기억에 붙들려 영원히 떠나지도, 머무르지도 못하는 모습과 퍽 닮아 있다. 혼자 미간을 찌푸리고 골몰하다가 피식 웃음이 난다. 이런 시시한 감상에 빠지는 일이 바로 가을이 하는 일이다.
벌써 가을이라는 말과 함께 또다시 가을이 돌아왔음을 동시에 느낀다. 이 견고한 순환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 주고, 전통을 부여하고, 삶의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자각하게 해 준다. 시간이 단순히 앞으로만 흐를 뿐이라면, 우리 곁에서 떠나간 이들과 우리 곁에 찾아와 준 이들, 과거의 빛나던 순간과 뼈아픈 상처들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특별했던 날들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애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낯설기만 한 삶의 여정을 극복하는 우리만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몇 장 남지 않은 달력도 그리 애잔하지만은 않다.
금세 겨울이 오고, 이제야 조금 익숙해진 2024년도 끝이 다가올 것이다. 언제나 끝무렵엔 다들 비슷비슷한 생각과 행동들을 한다. 특별히 새로 시작하기도 애매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자니 아쉬운 시간이다. 올해 다짐했던 계획이나 소망들이 얼마나 이루어졌나 훑어보기도 하고,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반성도 곁들인다. 또 새해를 위한 다이어리를 준비하고, 내 나이가 몇 살인지 다시 세어보기도 한다. 주변 관계들을 다시 둘러보고 아직 만나지 못한 이가 있다면 서둘러 볼 준비를 한다. 적당히 적적하고 또 적당이 왁자지껄한 날들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새해가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