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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Jun 20. 2022

네 집 하나는 꼭 가져야 한다

진짜였다!

엄마는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라고 이야기 하진 않았지만, '네 집 하나는 꼭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내 집 하나를 가져보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했고, 집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야 하기 싫은 일을 잠시 멈출 수 있다고 했다.


엄마가 집을 산 건 계산기를 두드려봤을 때 집을 사는 게 더 낫겠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직업이 없는 주부에게도 대출을 해줬던 시절에 엄마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천만 원 하는 빌라를 샀고, 수년간 월세를 받았다. 나의 고향은 지방의 중소도시인지라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빌라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우리 엄마를 부동산 투자가라는 거창하고 화려한 수식어로 소개할 정도는 아니지만 엄마는 한 번에 집 세 채를 소유하고 있을 때도 있었고, 당연하게도 산 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집을 팔았다. 그렇게 집은 엄마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월세가 나오기도 했고, 필요할 때에는 처분하여 목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의도하건 하지 않건 훼방을 받는 일도 있었지만, 엄마는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대학 공부는 시켜준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런 엄마의 노력이 의미 있는 성과로 나오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엄마가 처음부터 집을 사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빠가 다니는 회사들은 어쩐 일인지 안정적이질 못했다. 아빠가 보증을 서준 회사가 망한 적도 있고, 그냥 망한 곳도 있었고, 몸이 고생하는 일을 시키는 곳도 있었다. 가계에 들어오는 수입은 파동을 일으키지 못하고 뚝뚝 끊겼다. 집안일만 하던 엄마가 집을 산 것은 그런 상황에서 나 하나 잘 키워보겠다고 번뜩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엄마와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책으로 세상을 배웠다. 그리고 실천했다.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월세도 어느 정도 받았고, 물가 상승분만큼은 충분히 반영하여 집을 팔았으니 돈을 벌었다고 해도 될 만큼이었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항상 나에게 엄마가 익힌 것들을 알려주었다. 열세 살 어린애가 뭘 알겠느냐마는, 엄마는 아빠가 얼마를 줬고, 그중에 얼마를 집 사는 데에 썼는데, 인테리어는 얼마가 들어갔고, 월세는 얼마를 받고 있는지 등을 다 알려줬다. 금리가 오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대출이 막히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준 것도 엄마였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직접 계산을 해보게 했다. 굳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에도 월세가 나가는 것과 내 집을 사서 대출금을 갚으면서 다달이 원리금을 상환하는 것을 비교해보면 경제적으로도 집을 사는 게 맞지 않겠냐고 확인시켜 줬다.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엄마가 내게 말해주려고 한 것이 '네 집 하나는 꼭 가져야 한다'라는 진리였다.


엄마 말대로였다. 내가 모아둔 돈 조금과 온갖 대출을 합쳐서 첫 집을 샀을 때, 집에 대한 권리가 내게 있다는 그 종이 쪼가리 하나가 얼마나 나를 기쁘게 했는지 모른다. 묘했다. 내가 발 붙이고 사는 이 땅에 내 소유로 된 집이 있다니! 두 번째 집을 샀을 때에는 멈추고 싶을 만큼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멈추고 싶을 때 멈춰도 몇 년은 살 만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임처럼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나라는 캐릭터가 S급 아이템을 하나 장착한 기분이랄까. 집을 가졌다고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 가운데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사실은 엄마가 십수 년을 가르쳐준 게 무색하게, 나는 집을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좌절하던 때도 있었다. 고향에서 봤던 집값은 기껏해야 2억 정도였는데 스무 살 이후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고서 일자리를 찾고 난 뒤 집을 사볼까 하고 고개를 들었더니 서울의 집값은 10억 안팎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래서 10억이 넘는 집이 아니면 집이라고 할 수 없다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부끄럽지만 그때는 그랬다). 엄마는 이제 갓 사회로 나가 2-3년밖에 벌이를 하지 않은 주제에 된 것도 하나 없고 앞으로도 될지 모르겠다며 조급해하던 나를 다독였다. 고향에 집 한 채, 수도권에 집 한 채를 마련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수준에서 살 수 있는 집을 찾고 공부하고 있게 길잡이가 되어준 것도 결국엔 엄마였다. 그 두 채는 당연히 절대적으로 좋은 집은 아니겠지만 내가 살 수 있는 수준에서 최선의 집인 것은 사실이다. 그야말로 생각을 달리 하게 해 준 내 집이다.


집은 믿을 구석이 되어주고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는 그 말처럼, 떠밀리듯 일터로 나갔던 엄마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집을 한 채 소유하고서는 일을 관뒀다. 몇 년 전부터는 주식 투자를 하겠다고 했다. 나야 뭐, 엄마가 하겠다는 것을 말릴 이유도 없고, 엄마가 즐겁게 살겠다고 하면 그걸로 된 거니까 좋았다. 나랑 엄마는 매일 통화를 하는데, 엄마가 주식을 시작하고서는 통화 내용 중 주식 이야기가 90%다. 일이 없으면 사람이 힘겨워진다기에 걱정했는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9시부터 6시까지 온갖 주식 유튜브를 다 뒤져보고 외국인과 기관 투자자들을 욕하는 엄마를 보면 웃기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다. 내가 본 엄마는 항상 힘들어 보이고 나를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서 더 다행이다.


나는 엄마가 물려준 지혜의 덩어리들이 얼마나 진귀한 것인지 잘 모르고 컸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이게 진짜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좋은 수저다 싶다. 현물 금으로 만든 금수저는 아니어도 내가 어떻게 갈고닦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마법 수저랄까? 자기 위안도, 합리화도 아니다. 사실이고, 어떤 마법이 일어날지 기대되고 흥미로울 따름이다.




⬇️그래서 스물 다섯에 집을 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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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경제교육에 관한 다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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