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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Jun 29. 2022

회사 그만둬라

그러면 또 희한하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엄마는 나에게 늘 열정 페이가 아닌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하라고 했고, 몸과 건강을 아끼면서 일하라고 했다. 그 말처럼 나는 시간을 들이는 일은 했어도 육체노동이라 할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입사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입사를 한 후였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7.5년(대학생활을 5.5년 했다)이라는 시간의 최종관문이자 알고 보니 쓸모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는 첫 관문인 나의 직장에서는 회식이 일상이었다.


회사의 인력 배치 기조에 따라 입사하자마자 부산에서 2년을 근무했다. 회식은 일주일에 최소 3번이었다. 4번을 마신 적도 있었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냥 마셨다. 영업 지원 업무를 하고 있긴 했지만 영업을 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냥 그날의 우리를 위로하는, 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술자리가 생겼다. 명분은 매일 새롭게 생겼다. 회의 뒤풀이로 회식, 월 마감 회식, 상반기 마감 회식, 송별회식, 송년 회식, 환영회식, 날씨가 좋아서 회식, 날씨가 꿀꿀해서 회식, 새로운 식당이 생겨서 회식, 부장님 기분 안 좋으셔서 회식, 팀장님 기분 좋으셔서 회식, 위로차 회식, 축하차 회식, 거래처 사장님이 불러서 회식, 서울에서 손님이 오셔서 회식, 부장님이 그냥 그날 술 한 잔 하고 싶으셔서 회식,... 술자리는 9시도 아니고 10시도 아니고 12시에 끝나곤 했다. 때로는 새벽 3시에 들어갈 때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제시간에 출근해서 좀비처럼 하루를 보냈다. 내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을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사회생활인 건가 하고 갸우뚱하고 있던,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나는 도저히 술을 마실 수 없는 컨디션일 때 딱 한 번을 빼고는 가자는 대로 따라나섰다.


술자리에서 나는 활기찼다. 사람을 대하는 것은 적성에 맞았다. 모두와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회사 사람들보다 한참 어린 축에 속하는 나는 딸 같은, 동생 같은 후배로 사랑받았다. 부장님들과도 친하게 잘 지냈다. 심지어 나는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다소 과장된 건배사도 잘 해내는 편이었다. 규모가 꽤 큰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짱구를 굴려가며 준비를 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술을 매일 마시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몸이 축나는 게 느껴졌고 마음은 지쳐갔다. 어떤 날에는 모니터 앞에서 심장이 부자연스레 뛰는 소리가 들려서 병원에 링거를 맞으러 간 적도 있었다. 맹세코 사람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조직문화라는 게 존재했다. 술에 관한 한 관대한 분위기, 술자리에서 잘 노는 것이 일과 중에 일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분위기가 있었다.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구현되는 민주주의는 소주병 안에 갇혀있었다.


그때의 나는 엄마 속을 썩이려고 작정을 한 모양인지 매일매일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울었다. 엄마, 내가 철이 덜 든 건가? 내가 적응을 잘 못하는 건가? 내가 너무 곱게 자랐나? 그러면 엄마는 말했다.

"... 회사 그만둬라. 엄마가 말했지. 항상 네 몸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그러다가 너 병원 실려가고 몸 어디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몇 년 동안 술 마시면서 번 돈 병원비로 다 들어간다. 한 번 망가진 몸은 회복도 안 돼. 그만둬."

나는 어쩌면 그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음, 사실은 모르지 않았다. 그 말이 듣고 싶었다. 내가 만약 이 상황을 못 버텨서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도 그것이 의지박약이나 회피나 실패가 아닌 선택일 따름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을 듣고 싶었다.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 혹여라도 엄마, 아빠를 생각해서 못 그만두는 거면 더더욱 그래도 돼. 너는 자식으로서 줄 수 있는 기쁨은 다 줬어. 다른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최고로 소중해. 회사 그만 두면 또 다른 길 찾으면 되지. 고향으로 와서 알바 하나 하고 아끼면서 사는 것도 괜찮아."

글쎄, 내가 회사를 못 그만둔다면 그건 엄마, 아빠 때문은 아니었다. 한때 좋은 구실 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히 따지자면 내가 자신이 없는 거다. 다시 울타리 바깥에 내던져진 채로 수입이 없는 상태를 견딜 자신이. 나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바깥세상에 나가면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간사한 마음과 위기감이 울타리 바깥으로 돌렸던 고개를 다시 안으로 모으게 하는 거지. 어쨌든 회사를 그만두라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 웃기지만, 다시 힘이 났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혹시 그래서 엄마한테 매일매일 전화해서 찡찡거렸나?).


물론 나는 회사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영업 현장의 특성상 회식이 많았던지라 서울에 올라오면서 자연스레 줄어드는 부분도 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회식이 많이 사라졌다. 회식을 거절한다는 선택지도 생겼다. 이제는 용기가 생겼다. 예전에는 '회식을 안 가고 싶다'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가 같은 뜻이었는데, 뭘 그리 겁먹었는지. 그리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기도 했다. 글쓰기라는 좋은 취미가 생겼다. 회사원으로서 누구나 갖고 있는 고민을 나 역시 안고 있지만, 예전만큼 스스로를 한심하거나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어떤 자리에 있든 그것은 누구보다 나를 아끼는 나의 선택일 뿐이다.


엄마 노릇은 참 어렵다. 딸이 30살이 다 되어 가도록 칭얼거리고 있으니. 독립할 거라고 난리를 치다가도 "엄마 오느을~ 회사에서어~ㅠㅠ" 하면서 다시 전화를 하는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얄궂다, 얄궂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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