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비판적 사고를 한다면
요즘은 다른 사람의 말에 기꺼이 찬성하고 동의를 하는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똑똑해 보인다. 생각 없이 동조하는 건지 아닌지는 대화를 할 때 자연스레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 사안에 대해 같이 생각하려는 의지가 느껴지면 대화의 상대방인 내 입장에서도 고마운 마음, 이 사람과는 좀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양질의 이야기를 하게 되고 서로 기분 좋은 결론을 내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 사람이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할 때 찬성이나 동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긴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가능성이 전혀 열려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대화는 참 소모적이다.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여튼 비난할 거리를 찾으라는 말로 잘못 받아들인 사람이 많다. 일상 속 대화, 회사에서의 회의, 온라인상의 댓글 등을 막론하고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나도 비판적 사고가 뭔지는 잘 모른다. 하여튼 몇몇 사람들이 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은 든다. 함께 좋은 결과에 이르는 것이 대화의 목적인데 그 중요한 목적은 어디론가 던져버린 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상대를 비난하며 더 강한 논리로 찍어 눌렀다는 승리감에 젖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
그들은 공격적이거나 심드렁하다. 상대의 허점이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고, 뭔가 발견했다 싶으면 쥐 잡듯이 달려든다. 굳이 안 넣어도 될 비난조를 넣는다. 이성과 논리로 합의에 이르러야 할 일을 악감정으로 전환한다. 대화가 산도 아니고 화산으로 간다. 또는 그냥 관심 자체가 없다. 마치고 나면 ‘이게 맞나? 내가 지금 뭘 하고 온 거?’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없던 관심이 번쩍 들게 하는 게 내 몫이고 역량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대부분의 일은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이 있고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점도 있다. 당연히 어느 정도야 잘못된 점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허점을 찾아서 더 실한 점으로 바꾸려고 만났는데 허점을 후벼 파서 일 전체에 더 큰 구멍만 만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짜 비판적 사고를 한다면 상대의 의견에 옳은 점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찾아간 상대방이야 모르겠고, 나를 찾아온 사람들을 대하기 전에 생각한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네(호기심 갖기).
이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자(경청하기).
같은 의견이 아니더라도 맞는 말이라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의견이 다른 부분도 친절하게 말해야지(참여와 찬성에 대한 의지 다지기)!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 역시 허점을 마음먹지 않으면 쉬이 반대론자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긴 하지만, 명심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표현을 잘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설득하는 입장으로 돌아가 보면, 상대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반박을 하더라도,
“아니, 그게 아니라~”
로 시작하는 말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정도로만 운을 띄워줘도 ‘오, 이 사람은 같이 이야기해나갈 마음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반박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생각을 덧붙이고 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것, 어떻게 보면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함께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또한 동의를 할 부분은 명확하게 동의한다고 좋다고 표현한다. 상대가 방금 전 내 이야기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하나만 짚어줘도 날 선 마음이 누그러지는 기분이다. 더 상대방의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몸이 앞으로 들썩거리게 된다. 그래서 나도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잘 써먹으려고 한다.
사실 모든 대화의 시작은 관심인데, 상대방의 의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그 대화의 90%는 성공한 것이다. 그런 느낌은 대화에 참여하는 당사자 모두가 느끼게 된다. 기왕 하기로 한 대화, 기왕 내기로 한 시간, 나에게 의미 있는 것들로 만들려면 찬성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화에 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