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
2021. 6. 10.
정호승,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정호승 시집 <포옹 (창비, 2007)> 중에서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 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구구절절 마음을 두드리는 말씀을 하시는데 제목이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라는 점이 슬며시 웃음을 짓게 합니다.
내가 살아보니 인생이란 이런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걸,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이렇게 해, 이렇게 격언처럼 지혜를 주는 말들은 그 안에 든 지혜들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약간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시인은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가라는,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으니 묵묵히 그냥 입에 넣고 살아갈 아침밥을 준비하라는, 이런 말들을 개에게 하는 말이라며 슬쩍 힘을 빼고 늘어놓습니다.
뭐 들어도 좋고 그냥 흘려도 좋아, 개소리라고 생각해도 좋고.
그러자니 더욱 그 개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 귀 기울여 듣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는 부분이 유독 강렬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 때, 내가 삶을 받은 존재의 끝을 보지 말고 내가 삶을 준 존재의 시작을 보라는 말.
나의 삶은 늘 중간에서 진행되고 있으나 끝이 아닌 시작 쪽에 내 삶을 위치 지우라는 말.
그렇게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는 시인의 말에서 알 수 없는 힘을 얻습니다.
생각해보면 오늘이란 건 남은 내 인생의 첫 페이지니까, 늘 시작의 시간이 맞습니다.
(“오늘은 남은 인생의 첫 페이지”라는 말은 제 표현이 아니라, 같이 필사모임을 하는 분께서 다른 시에 붙이신 단상임을 밝혀 둡니다. 엄지가 절로 기립하는 말씀.)
사랑한다는 건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에 감사하는 일일 뿐이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종종거리며 뛰어가지 말아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선 반드시 그 산을 내려와야 한다,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선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더 아래로 시선을 낮출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막을 적실 수 있는 촉촉함을 가진 채.
삶의 매 순간 힘을 잔뜩 주며 살아가라는 조언들이 턱밑까지 차있는 세상에서, 이렇게 힘을 뺌으로써 더 단단하고 깊어지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마저도 무심한 듯 개에게 말하는 인생 이야기라니, 꽃 발자국 찍는 조그만 강아지가 되어 인생 따위는 아직 모른다는 듯이 꼬리나 흔들며 듣고 싶네요.
덧.
제가 언급한 "꽃 발자국 찍는 강아지"라는 표현은 모임에서 바로 전날 함께 필사했던 시가 윤동주의 <개>라는 시였기 때문입니다.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짧은 문장 하나로 단숨에 머릿속 풍경을 확 바꿔내는 힘.
귀여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눈밭은 꽃밭이 되었겠죠. 그 눈꽃밭이 보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멍멍이 발자국을 꽃으로 보는 눈이 참 꽃같이 곱다고 생각했고, 이런 고운 눈을 결국 비참하게 감게 만든 일본 제국주의의 추악함에 대해 생각했고, 그런 종류의 과거의 일에 대해 최근에 이해가 가지 않는 판결을 내린 우리나라 사법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눈 위에서 해맑게 꽃을 그리며 뛰노는 개처럼 살기는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