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시
2021. 2. 1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중에서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가장 첫 번째로 받아들었던 시.
시보다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시집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내가 가진, 며칠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이름들을 떠올리면서요.
슬픔이 자랑이 될 수 있다니.
언뜻 보면 물음표가 생기는 말이죠. 사람들은 대체로 슬픔을 내보이는 일을 즐기지 않으니까요. 슬픔이 나약함과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될수록 슬픔은 꼬깃꼬깃 접어서 맨 아래쪽 서랍에 숨기듯 넣어놓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밝은 척해야 한다고 믿기도 합니다.
꼭 어른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울면 안 된다고,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다고 경고하는 노래는 아직도 12월이면 더할 나위 없이 경쾌하게 아이들을 협박합니다. 세상의 많은 아이들이, 특히 소년들이 슬픔은 강함이 아니라고 배웁니다. 남자 새끼가 뭐 이런 걸로 울어. 새끼 남자든 어른 남자든, 이 세상은 남자가 태어나서 울 횟수까지 박하게 정해 놓았습니다.
저는 슬픔이 자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무척.
이 세상을 보다 살만한 곳으로, 보다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는 건 기본적으로 슬픔입니다.
크고 강한 슬픔일 필요도 없습니다. 작고 부서지기 쉬운 슬픔들도 별처럼 이슬처럼 술잔처럼 빛납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실은 이 시를 읽으면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가 묘하게 겹쳐 떠올랐어요.
세상을 무엇보다 슬픔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참 맑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눈물로 세상을 씻어내고, 그래서 세상은 조금 더 맑아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니 꼭 거창하게 정화나 치유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지 않아도, 그냥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저는 좋아합니다.
시인은 '아득해지는 일'이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 같은 것이라고 해요.
아득함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눈은 맑고 강한 눈입니다.
그래서 슬픔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차가움이 아니라 따뜻함이라고. 보잘것없는 감정이 아니라 위대한 감정이라고. 모든 슬픔이 강함은 아닐지라도, 슬픔과 약함보다는 슬픔과 강함 사이의 연결통로가 훨씬 많고 단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슬픔을 자랑하는 것'과,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강이 흐릅니다. 슬픔과 자랑 사이에서는 능동과 수동이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최근 다시 읽은 소설에서 이를 꿰뚫는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말들은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의 억울해하는 말 같은 것들은."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깊이 이해하는 순간은 상대의 행복에 공감하는 순간이 아니라, 상대의 슬픔에 공명하는 순간입니다. 필사 모임의 다른 분이 "마음과 마음을 진심으로 닿게 하는 순간은 슬픔이라는 비밀통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단상을 남겨 주셨는데, 저는 그 문장이 참 좋았어요. 사실 제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길게 늘여놓은 문장들은 저 간결한 문장 하나로 모두 지울 수 있습니다.
덧 1.
사실 저는 여기저기서 처울고 다니는 프로오열러입니다.
강함보다는 (약간 어이없는) 뜨거움에 치우친 쪽이긴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으니, 아이언맨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믿습니다. 후후.
덧 2.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붙여두고 갑니다. 김광규 님의 번역입니다.
시 속의 엉터리 화가는 히틀러를 말합니다. 한때 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미술을 했었죠.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