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Jan 10. 2023

독일 초등학교에서 가장 처음 배운 것들

아이들이 짧은 겨울방학을 마치고 이번 주부터 다시 학교에 간다. 아이가 독일 초등학교에 들어가 첫 학기를 보내는 걸 옆에서 보면서 좋다고 생각한 것들 몇 가지를 추려 보았다.


사실 한국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낸 경험이 없고, 내가 학교에 다닐 때(가 대체 언제더라.....)를 기준으로 보게 되니 유독 크게 보이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미 많은 부분이 우리 교육 제도 안에서 시행되고 있겠고 우리도 이제는 영감을 받기보다는 주는 게 더 많은 나라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닿는 부분이 있다면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1. 냅다 안전부터 강조


입학 전에 학교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Elternabend(parents’ evening)가 있었다. 학교 강당에 모여 학교 소개도 받고, 학교 생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듣고, 필요한 준비물과 교과 과정에 대해서도 안내받으며 이런저런 정보를 얻는 시간. 거기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강조한 것이 아이들이 등하교할 때 안전 문제로 주의할 점들이었다.


아이들이 우리 동네 횡단보도를 건널 때 특히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 차량이 많은 시간대는 언제인지, 6-7세 아이들의 시야는 어떤지, 버스로 통학하는 아이들에게 특히 주의시킬 점은 무엇인지, 혼자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려면 몇 살이 되어야 하는지, 학부모들이 학교 근처에서 운전할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 등등. 독일 아이들은 대체로 2학년이 되기 전에 부모 없이 혼자 등하교를 시작한다. 둘째는 입학 후 다음 주부터 곧바로 3학년인 형과 둘이서만 등교하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만세)

9월 입학을 대비해 7월 초에 Elternabend를 진행했습니다

참고로 독일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4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자전거 면허를 따고 수영 테스트에 통과해야 하는 것이 필수. 책가방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아이들이 날아가지 않도록 아래쪽이 무겁게 디자인된 가방을 골라야 한다. 동네 소방서에서는 1학년 교실을 방문해서 아이들에게 안전 교육을 시키고, 등교할 때 입는 야광 조끼도 나눠 주었다. 독일은 한국보다 위도가 높아서 겨울에는 아침이 어둑어둑한데, 눈부신 야광 병아리들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지난여름 한국을 방문하신 이웃 지인께서 말씀하시길, 아이들이 롯데월드에서 안전수칙부터 확인하는 걸 보고 독일에서 큰 애들이구나 싶었다고.

왼쪽> 유치원 졸업 전, 새로 준비한 책가방을 유치원에 가져가서 같은 반 동생들에게(독일 유치원은 만 3-6세를 섞어서 반을 만든다) 보여주고, 그 안에 든 학용품도 설명해 주는 'Schulranzen Tag(책가방의 날)'이 있었다. 안전 기준에 미달하는 가방을 사지 않도록 유치원에서도 지인들께서도 미리 정보를 주셨다.


오른쪽> 소방서에서 1학년 교실을 방문해서 무료로 나눠준 안전 조끼. 아래가 첫아이가 받아온 조끼고 위쪽 A자 모양으로 된 안전띠가 이번에 둘째가 받아온 띠. 조끼를 입고 가방을 메면 앞에서는 보이지만 뒤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책가방 위로 간편하게 두르고 갈 수 있게 띠 모양으로 개선된 듯하다.  

왼쪽> 저희 아이들의 책가방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함께 등교하는 모습.


오른쪽> 비슷한 가방을 메고 가는 친구들이 귀여워서 뒤에서 몰래 (얘들아 미안해) 찍은 사진. 초등학생 가방은 대체로 저렇게 생겼다고 보시면 됩니다. 독일 제품들은 튼튼하고 다 좋은데 디자인이 좀 후져요. 사진으로 올린 것들은 그래도 나은 편. 귀엽고 깜찍하고 이런 것 없고, 대체로 무척이나 사실적인 동식물과 사물들이 위용 넘치게 들어있습니다.   


2. 교과서 물려주기


선배로부터 물려받아 비닐로 겉장을 싸서 곱게 쓰는 교과서와, 연필로 직접 써 가면서 문제를 푸는 워크북이 따로 있다. 교과서는 이미 비닐에 싸여 있는데 그 위에 각자 한 겹씩을 더 싸서 사용해야 한다. 두 번째로 씌우는 비닐은 나중에 벗기기 쉽도록, 또 책이 상하지 않도록 테이프를 내 비닐 위에만 붙여야 한다고 선생님께서 거듭 신신당부를 하셨다.

수학 교과서와 독일어 교과서

겉표지를 넘기면 이 책이 그동안 누구를 거쳐 나에게 왔는지 알려주는 도장이 찍혀있다. 아까도 밝혔듯이 유치원은 3-6세를 섞어서 반을 만들기 때문에, 유치원에서 만났던 친구들 이름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어 아이가 반가워한다. 눈에 띄는 사용 흔적을 남기면 소액의 동전을 내야 하고, 학교에서는 그 돈을 모아 새로운 교과서를 구입하는데 충당한다.

왼쪽> 2017년부터 사용 중. 레오, 파울라, 리나, 클라라를 거쳐 저희 아이에게 왔네요.

오른쪽> 언제 어디에 흠이 생겼다는 기록.

 

책을 아끼는 마음,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뿌듯함을 아이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시스템.


3. 선행학습 금지 & 이야기의 중요성


Elternabend에서 부모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선행학습 절대 금지. 선생님 권위에도 문제가 되고, 아이가 또래 친구들을 무시하고 수업 분위기도 흐릴 수 있어 격렬하게 금지한다. 숙제를 더 많이 해오는 것도 금지. 한국 학부모들의 교육열을 독일에서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한국 학부모들에게 특별히 당부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었다.  

아이는 1학년 첫 학기 내내 선 그리기, 알파벳 절반(첫째 때 보니까 알파벳 30개를 1년 동안 배우고, 알파벳을 다 배우면 학교에서 파티를 연다), 숫자 쓰기와 기초적인 덧셈을 배웠다. 알파벳 하나를 배우면 그걸 모래에도 써보고, 털실로 만들기도 하고, 색색의 찰흙으로도 만들어 보고, 잎이나 돌멩이나 도토리 같은 걸 주워서 늘어놓아도 보고, 종이에 구멍을 뚫어서 만들어 보기도 하고, 온갖 색으로 써보고 칠해보고 그려보고, 아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듯. 이건 한국의 유치원이나 학교에서도 재미있게 잘해주시는 부분인 것 같다.  

알파벳 A 옆의 Ameise(개미)가 너무 귀여워서 찍어둔 사진입니다

하나씩 천천히 배우는 대신에 알파벳 한 글자마다 아이가 그 알파벳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보게 한다. 이야기를 상상해서 주로 그림으로 그리는데, 알파벳을 배우면서 자신감이 붙었는지 문장의 꼴을 갖추지 못한 암호 같은 글자들을 문장이라며 자랑스럽게 써놓기도 했다. 선생님은 읽기도 어려운, 엉망인 그 문장들을 크게 칭찬하셨다. 아이는 미미라는 꼬마 쥐가 각종 알파벳을 만나는 흥미진진한 모험을 이야기 공책에 연재 중이다.

꼬마 쥐 미미의 신나는 모험

위쪽 그림은 미미가 울고 있는데 I의 Igel(고슴도치... 고슴도치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장착하고 잘 보시면 고슴도치로 보여요.)이 와서 위로해 주는 내용이라고. 참고로 알파벳도 순서대로 배우는 게 아니라 쉬운 발음부터 하나씩 배운다. 미미가 책에 그동안 만난 알파벳들을 모아두는데, 그림에서 보듯이 M, A, I 순으로 배웠던 것 같다. 아래 그림은 미미가 사과나무 밑에서 놀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서 그동안 책 속에 모은 알파벳이 날아간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아이가 1학년 내내 글을 잘 못 쓰기 때문에 알림장을 대체로 그림으로 그려온다. 덕분에 그림문자를 해석하느라 당황했던 수많은 시간들이여.

왼쪽 숙제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안경을 벗고 춤춰 보아요?

사과 두 개로 폭탄을 만들어 보아요(이봉창 의사님...)?
브라 해방 운동에 대해 알아보아요?

그래서 숙제가 뭐라고? ಠ‸ಠ


가운데 사진이 가장 일반적인 모습. M이 Mathe(수학), D가 Deutsch(독일어)고, 공책에 색깔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색깔로 그 안에 붙은 숙제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월 21일의 숙제를 보면(날짜가 달보다 먼저 나와서 헛갈려 죽겠어요) 수학은 파란 공책에 숙제가 붙어 있으니 그걸 하면 되고, 독일어는 노란 공책에 숙제가 붙어 있는데 엑스표 친 부분만 (세 군데) 하면 된다는 말. 안경은 읽기 숙제, 네모는 선생님이 나눠준 낱장 숙제가 있다는 말이다. 폭죽 같기도 하고 로켓 같기도 한 그림은 색연필을 잘 깎아 오라는 숙제.


오른쪽은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예정이므로 집에서 접시(눈알이 아니라 접시입니다), 컵, 쿠키, 그리고 사용한 접시와 컵을 담아갈 가방을 가져오라는 내용.


4. 제일 먼저 배우는 것들


사회, 자연에 해당하는 HSU 과목에서 뭘 배우나 봤더니 가장 먼저 안전하게 찻길 건너는 법을 배웠고, 천둥 번개가 치면 도망가는 법(...이라고 엄마한테 말했다), 다음으로는 중요한 번호(집 전화번호, 신고할 때 필요한 번호 등)들과 주소를 공부했다. 가족에 대해서 배우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집안일을 배우고, 마지막으로 몸을 깨끗이 하는 법과 이를 건강하게 관리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다짜고짜 길 건너는 법부터 배우는 걸 보고 살짝 웃었고, 고마웠다.

"어 잘못 붙였는데? 왼쪽을 먼저 확인해야지!"라고 했더니 반쪽인 자동차를 이어 붙이고 싶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엉덩이(...라기보다 그곳...)랑 얼굴은 때수건으로 닦지 마세요! 라고 쓰여있다 :D
내가 도울 수 있는 집안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알면 좀 해라.
꼭 저런 색으로 칠해야 했니
이에 좋은 음식들, 나쁜 음식들을 붙여 보아요


5. 평가 방법


학부모 면담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학부모와 선생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는 옆에 병풍처럼 앉아 있고 아이와 선생님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이는 아이대로,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어느 부분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각자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으로 칠해 온 것을 비교하며 얘기를 나눴다. (평가 기록을 올릴 수는 없어서 사진은 붙이지 않습니다.)

신기하게 아이는 자기가 부족한 부분을 귀신 같이 알고 있었다. 그 부분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선생님은 아이에게 스스로 생각해 보고 답을 찾게 하셨다. 나에 대한 평가를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맞춰 보면서 조절하는 것, 그러면서 변명할 기회도 얻고 격려도 듬뿍 받는 것이 좋아 보였다.


남이 나를 정의하게 두지 않고 내가 판단하는 것.

스스로 생각해 보고 방법을 찾으면, 노력하고 지켜나갈 의욕도 더 커지는 것 같다. 평가받는 일에 익숙한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씨앗처럼 잘 심어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이 매거진을 구독해 주시는 분들께 알려 드립니다. 지난해 조직에 변화가 생기면서 SEE SAW의 해외특파원 제도도 공식적인 활동을 접게 되었어요. 거처를 국내로 옮기신 분들도 계셔서 예전 같은 활동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저는 당분간 독일에 계속 거주할 예정이라 이 매거진에 종종 독일 이야기들을 올리려고 합니다. 예전만큼 자주 올리지는 못하겠지만, 아이들과 관련해서 괜찮은 레퍼런스가 될 만한 독일 생활이나 시스템 이야기, 제3의 공간 이야기들을 (가뭄에 콩 나듯) 올리도록 할게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 기차에는 어린이 전용칸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