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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Sep 09. 2019

경이로운 세계, 철학자의 눈

니체, 아이처럼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엄마, 피카츄가 잉 울고 있어


큰 아이가 밖에 나갔다 와서 양말을 벗어 (벗는 순간 모래가 은혜처럼 내렸다) 한참을 쳐다보고 서 있다.


나는 그 옆에서 ‘이 녀석 어서 양말을 예쁘게 뒤집어 빨래통 안에 넣지 못할까’의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며 서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한 마디에 내 불꽃 레이저가 푸슈슉 연기를 내며 사라졌다.


“엄마, 피카츄가 잉 울고 있어.”

양말을 뒤집더니 “엄마, now he is so happy!”하면서 방긋 웃는다.

잉 울고 있는 피카츄와 행복해진 피카츄. 사촌 형아들이 물려준 피카츄 양말. ⓒ a little teapot

아이들의 시선은 새롭고 신선하다.

내 눈에는 ‘양말 안쪽 = 보이면 무조건 뒤집어야 하는 일감. 때로는 분노 유발’인데, 아이의 눈에는 그게 잉 울고 있는 슬픈 얼굴로 보인다.

새로울 것 없는 일상에서 이런 작고 귀여운 깨달음을 만날 때마다, 굳어 있던 내 마음은 그 속에서 새싹이라도 트듯 말랑말랑 간지러워진다.  

길을 걷다가 세상에서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귀여운 음표들을 발견했던 조카. (크기를 비교한다고 무식하게 숟가락을 옆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 a little teapot

아이들은 친숙한 사물을 낯설게 보는 놀라운 눈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늘 거기 있던 물건이 새 물건처럼 느껴지고, 무생물들이 기지개를 켜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런 깨달음은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일상의 곳곳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순간에 하나씩 주어지곤 했다. 마치 아이를 키우느라 피곤할 텐데 수고했다며 갑자기 하나씩 둘씩 불쑥 내미는 선물처럼.

<The New Yorker>의 일러스트레이터 Christoph Niemann의 작품들. 친숙한 사물을 매개로 다른 세계와 연결 짓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아이들도 그렇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우리를 위한 은밀한 공연들


그 시작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 불쑥 받았던 첫 선물.

첫 아이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쭉쭉 늘어나는 찹쌀떡 같은 때였다. 아마 아기가 낮잠을 자고 일어났던 것 같다.

해가 넘어가기 시작한 오후. 아기 침대가 놓여있던 방의 커다란 흰 벽에, 창문 밖에 서 있던 나무 그림자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검은 나무 그림자가 이리저리 느릿느릿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재미난 것은 처음 본다는 얼굴로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한참을 놀았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에는 경이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덕분에 나도 침실 벽에 펼쳐진 그 특별한 공연을 만끽했다.

내가 그 방에서 더 오래 지냈지만 그 방의 가장 멋진 순간은 아이가 먼저 발견해 알려 준 것이다.

어른이 되어버린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기껏해야 TV 화면이나 폰 안의 동영상 정도였는데.

창틀의 네모난 그림자 안에 들어있던 그 공연은 내가 봐도 정말 근사했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마치 벽에 걸린 그림 같았다.  


유모차를 태우고 밖에 나가면 아이는 눈 위에서 한들한들 움직이는 나뭇잎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곤 했다. 작은 눈엔 힘이 들어가고 입은 경이로움으로 살짝 벌어졌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그렇게 재밌나 싶어 나도 쳐다보면, 어,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바람이 잦아들어도 나무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었다. 아주 천천히 날개를 움직이는 신비한 고생물처럼, 가지로 은근한 날갯짓을 하며 내 머리 위에서 조용하게 춤을 추었다.  

일상의 진부함 속에서 굳어져 버린 내 눈은 세상 만물을 ‘늘 그냥 거기 있는 것, 내가 다 아는 것’으로 치부해 왔는데, 이 작은 아이를 통해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다시 새롭게 배운다.

내 굳은 시선을 적셔주는 아이의 말랑말랑한 눈이 고맙다.


그 뒤로 나는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던 것들을 보려고 노력하는데, 눈이 굳어서 쉽지 않지만 뭔가 발견하면 이게 은근히 재미나다.

이를테면 찻잔에서 펼쳐지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를 위한 공연을 음미하는 일.


나는 워낙에 차(茶)를 좋아한다. 인간들이 잎을 말려 그걸 우려먹는다는 컨셉 자체도 귀여운 것 같고, 차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느끼는 평화와 온기도 좋다. 물은 인간인 이상 늘 마셔야 하는 것이고 커피나 술은 왠지 스트레스와 더 밀접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차는 아무리 바쁘고 머리가 어지러울 때 마시더라도 그 순간이 주는 고요와 평화가 있다. 차를 끓일 때 일상은 잠시 평화롭게 정지되고, 또 그렇게 준비한 차를 마시는 일은 작은 심호흡 같기도 하다. 호흡을 조심조심, 후- 불어 식혀서 호로록. 그렇게 꽤 오래 차를 좋아해 왔던 나였다.


부드럽고 쌉싸름한 우전을 한 잔 우려내어 책상 앞에 앉았다.
차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보고 있으려니 아이고, 요거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찻잔을 따라 둥글게 솟아올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서로 만나 부드럽게 섞이더니 늘씬한 선을 그리면서 위로 가늘게 솟구쳐 오른다. 그 말없이 바쁜, 부드러운 소용돌이가 주는 즐거운 아름다움이 한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생각해보니 내 앞에 펼쳐지는 이 작고 향기로운 소용돌이, 아마도 세상에 단 하나뿐일 이 작은 공연을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음미해 본 기억이 없다.
차를 좋아하고 즐겨 마셔왔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나서야 찻잔 안에 담긴 예쁜 우주의 한 귀퉁이를 보는 법을 깨달았다.


세상만사가 신나는 아이들, 신날  없는 어른들


아래는 첫째가 7개월 때 썼던 글이다. 

이는 거품기 하나를 가지고도 한참을 재미있게 논다. 동그랗게 겹쳐지는 거품기 살 사이사이에 조그만 손가락을 끼워 잡아도 보고, 동그란 손잡이를 입 안 가득 넣어 깨물어보기도 한고, 거품기가 통통통 튕기면서 바닥에 데구루루 굴러가면 그것도 참 재미있나 보다. 아기에게는 장난감과 일반 사물의 경계가 모호하다.


상 만물이 다 흥미롭고 매혹적인 나이. 인생에서 얼마나 짧고도 찬란한 순간인지.


나는 그 찬란함을 언제 잃어버렸을까. 왜 TV나 영화처럼 세상이 재미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만 쳐다보며 재미를 구하고 있으며, 또 언제부터 그 재미를 위해 시간을 따로 내어야만 했을까.

부엌 바닥에 앉아 엄마가 갖고 놀라고 준 거품기로 한참을 재미있게 노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렇게 가난해져 버린 어른이 쓸데없는 권위로 저 찬란한 시간을 함부로 방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살짝 조심스러워졌다.

오늘도 엄마의 베이킹 선반을 털어볼까. 그래, 오늘은 쿠키 커터다! ⓒ a little teapot

아이들은 세상 만물이 재밌고 궁금하다.

작은 사탕 껍질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이 쓰레기통 안을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들여다보고, 심지어 손을 넣어 꺼내보고 (아악) 싶어 한다. 어른들에게 쓰레기통은 말 그대로 쓰레기가 든 통이다. 어른들은 절대 들여다보려고도 안 하는 쓰레기통에도 아이들 눈에는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가득한가 보다. 작은 아이는 유치원 오가는 길에 놓인 쓰레기통 두 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식사는 하셨는지, 오늘은 그 안에 뭘 드셨는지, 늘 안부를 전하고 싶어 한다.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데 키가 안 닿는다며 엄마를 부르고 있는 내 새끼 ⓒ a little teapot

유튜브에는 리액션 비디오들이 가득하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리액션 장르는 단연 베이비 장르.

비를 처음 맞아보는 아이, 바이올린 소리를 처음 듣는 아기, 맛있는 수프를 먹고 춤을 추는 아이 같은. 그런 비디오 클립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저렇게 신나고 경이로운 것이었던가 싶어 볼 때마다 마음이 보랏빛으로 뭉클해진다.


첫째가 6개월이 되어 고형식을 시작했을 때, 아이는 맛있는 것을 한 입 먹으면 박수를 치곤 했다.

우와. 세상에는 이런 맛이 있구나. 그런 기쁨의 박수.

이제 제법 커서 그 순전한 기쁨의 박수는 들뜸이 다소 가라앉은 ‘엄지 척’으로 바뀌긴 했지만, 이제 둘로 늘어난 내 아이들은 숨 쉬는 게 뭐가 재밌다고, 심호흡만 가르쳐 줘도 재밌다며 깔깔거린다.


기쁨도 슬픔도 온몸으로 표현하며 매 순간 치열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아이들.

환희에 차 소리 지르고, 엉엉 울고, 즐거우면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희한한 춤을 추고, 재미있거나 신나는 일이 있으면 방방 뛰며 세리모니를 하고.

그렇게 아이들은 온몸으로 삶의 찬가를 부르며 산다.


삶의 의미, 생(生)이라는 상태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니체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세 가지 변화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낙타에서 사자로, 최종적으로 아이로.

우선은 자신의 것도 아닌 남의 짐을 고집스럽게 짊어지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낙타에서, 이 무거운 짐을 훌훌 내던지고 바람 같은 자유를 얻은 사자로.

하지만 큰 소리로 불호령을 내리며 온 세상을 향해 "No!"를 외치는 사자에서, 다시 만물을 유쾌하고 성스럽게 긍정하는 아이로 한 단계 더. 즉 내던져버리고 부정하는 사자에서 내 노력이 부정되더라도 끊임없이 모래성을 쌓으며 즐거워하는 아이, 늘 긍정적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아이로 다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니던가.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허물고 부수고 또다시 쌓는 행위를 무한히 반복하며 즐거워한다. 내가 높이 쌓은 블록 탑이 무너졌지만, 공든 탑이 무너졌다고 하루 종일 슬퍼하고 좌절하지 않는 게 아이들이다. 탑은 언제든 또다시 쌓으면 되니까. 즉, 아이들은 파괴의 자리에서 좌절을 느끼는 게 아니라 새로운 탑이 또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또 그 과정이 굉장히 재미있다는 것을 안다. 이번에는 다른 모양으로 탑을 쌓을 수도 있고, 친구들과 함께 쌓을 수도 있다.
삶은 우울하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쾌한 것, 긍정적인 것이다. 정말 훌륭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비가 와서 생긴, 정말 손바닥만한 웅덩이와 조약돌만 있으면 한참을 노는 게 아이들이다. 퐁당, 퐁당. 무한히 던지고 놀아도 마냥 재밌나 보다. 개구리가 살고 있는 웅덩이였으면 오늘이 지구 심판의 날이라고 했을 듯. 30분 내내 운석이 떨어졌을 테니까. 그 옆에서 엄마는 대체 언제 집에 가려나, 바람 빠진 복어의 얼굴을 하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5분 정도는 나도 옆에서 신났는데, 30분은 도저히.


집에서도 아이들은 물 한 바가지만 있어도 잘 논다. 마치 “물 한 바가지이이이이이!!! 이렇게 재미있는 게 나에게 주어졌어!!!” 이런 느낌이다. 손수건을 넣었다 뺐다, 짰다가 다시 담갔다가 수십 번을 하는 게 대체 왜 그리 즐거운지 모르겠다.  

어른들에게 놀라고 물 한 바가지를 줬다고 생각해보자.

(.......)


토머스 홉스는 인간은 죽을 때까지 더 나은 재화를 욕망한다고 했다. 우리는 대체로 더 강한 자극을 찾고 거기에 익숙해진다. 물보다 주스가, 주스보다 와인이 맛있고 귀한 재화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물을 신기해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이미 매겨 둔 등급에 따르면 물은 그저 흔하고 별 볼일 없는 재화이기 때문에. 뭘 씻거나 마시거나, 그런 평범한 물질일 뿐이다. 반면에 어른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귀한 와인은, 아이들의 눈에는 그저 예쁜 유리병에 담긴 보랏빛 물일 뿐이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만약 어른들에게 '창턱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아, 참 좋은 집이구나! 하고 소리친다.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어렸을 때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 모양에 매료되어 한 시간을 누워 있던 꼬마는 (네, 접니다) 이제는 5분만 넘어가면 그 느릿느릿한 구름의 움직임이 마치 렉 걸린 컴퓨터 화면 안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원형 무지개나 작은 모래시계(온 지구인이 싫어하는 불쌍한 물건)라도 되는 양 지루해지는 어른이 되었다.


인생이 계속 그렇게 곧 시들시들해지는 것의 연속이라면, 우리 인생은 좀 가엾단 생각이 든다.


어른들의 삶에 이렇게 굳은살이 박여갈 무렵 짠 하고 등장하는 아이들은 이런 면에서 정말 놀라운 선물이다. 덕분에 나는 소소한 것을 다시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찾는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삶의 재미를 아이의 눈으로 발견한다.

동물원 주차 타워에 설치된 라이트가 "Have Fun!"하고 씨익 웃는 얼굴처럼 보였다. ⓒ a little teapot

경이감을 유지시켜 주는 방법

  

그런데 이렇게 바람이 빠져버린 어른의 눈으로 어떻게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아이들 마음을 보아줄 수 있을까. 어떻게 아이들의 이 찬란한 경이감을 유지시켜 줄 수 있을까.


카트린 레퀴예(Catherine L'ecuyer))의 <경이감을 느끼는 아이로 키우기(Educar en el asombro)>라는, 나 같았으면 오만함 때문에 읽지 않았을 책을 다행히도 나의 존경하는 후배 Y가 읽고서 책 안에서 보석같이 반짝이는 부분들을 나눠 준 적이 있다. (왜 읽지 않았을 것 같냐고 묻는다면, 저 “~하는 아이로 키우기”라는 제목에서 나는 반사적으로 거리감을 두었을 것 같다. 편견이 이렇게 무섭다.)


레퀴예의 말에 따르면 과도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활동(structured activities)*을 하거나, 학습과 훈련을 발명이나 발견보다 중요하게 여기면 아이들은 지루해지거나 불안해진다고 한다. 부득부득 뭔가 배울 것을 기대하지 말고, 장난감의 용도를 정하지 말고, 그냥 놀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충분히 주라는 것.

* 구조화된 활동(structured activities): 보통 어른의 주도 하에 이뤄지고 아이들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은, 시키는 대로 해서 결과물을 내야 하는 활동. 를테면 피아노 레슨 같은 것. 그렇다고 이런 구조화된 활동이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구조화된 활동과 그렇지 않은 활동, 양쪽 모두 아이들의 성장에는 중요하다.

내가 관련 리서치를 할 일이 있어 따로 읽었던 글 중에 이와 관련된 놀이 실험들이 제법 많았다.
예를 들어, 새로 지어져 아직 시설이 완비되지 않은 학교의 아이들에게 재활용품을 장난감으로 준 경우 vs. 스포츠 시설과 놀이 시설이 잘 갖추어진 학교의 아이들이 평소대로 노는 경우, 어떤 쪽의 신체 활동량과 만족도가 더 높을까?

정답(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은 전자 쪽.
종이 상자, 줄, 폐타이어, 양동이, 포대자루, 짚단 꾸러미 같이 따로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재활용품을 무질서하게 늘어놓은 공간에서 아이들은 더욱 다양하게 움직이고 스스로 놀이를 만들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논다고 한다. 아이들의 신체 활동량을 증진시킬 방법을 고민한다면, 학교 체육시간보다 아이들이 이렇게 자유로운 선택을 하면서 제약 없이 노는 시간이 두 배 가량 더 효과적이라는 논문도 있었다.

특히 아이들이 종이상자를 갖고 노는 다양한 모습들이 묘사된 부분은 사랑스럽다. 보자마자 신나게 상자를 발로 차고 깔아뭉개서 망가뜨린 다음 그 잔해로 날개를 만들어 비행기나 새가 되기도 하고, 상자 안에 낙엽을 모으기도 하고, 작은 상자를 공처럼 차며 놀기도 하고, 모자나 옷처럼 쓰거나 입기도 하고, 입구를 펼쳐 그 안에 들어가 김밥처럼 굴러다니더라는 부분. 상자만 보면 고양이처럼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한 번은 큰 아이 생일에 장난감이 배달되었는데 작은 아이가 "내 건?" 하자 남편이 택배 상자를 주었던 적이 있다. (아니 이 양반이...) 근데 작은 아이는 몹시 기뻐하며 상자를 소중히 안고 뛰어다녔더랬다. 으하하.

그때의 사진. "와, 아빠가 나에게 상자를 줬어!" 아이의 환희와 역동성을 따라잡지 못해 흔들린 사진. ⓒ a little teapot
이것은 자식들인가 고양이들인가 ⓒ a little teapot

다시 카트린 레퀴예에게로 돌아가 그녀의 말을 들어 보자.


“아이들은 작고 우리보다 땅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작은 것들을 더 잘 이해하고 즐기며 주목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서두르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그렇게 지나쳐서 자주 잃어버리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아이들에겐 쉬운 건지도 모르겠다. 확대경으로 눈송이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연에서 근사하고 멋진 것들은 아주 작다.”


“경이감을 죽이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원하는 즉시 다 주는 것이다. (…) 임신과 나비, 우정, 사랑 등 모든 소중한 것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을 기다리고 원하며 노력해서 알려고 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더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존재 앞에서 경이감을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당신을 온종일 관찰하고 있답니다."


임신과 나비, 우정, 사랑 등 모든 소중한 것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니, 이렇게 멋진 문장들을 나의 굳어버린 오만함 때문에 놓칠 뻔했다. 죽어 버린 나의 경이감도 되살릴 것 같은 문장들을.


왜에?


경이감에 따라붙는 것, 바로 질문.
대학원 세미나 첫 시간에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얻었던 답은 ‘질문’이었다.
질문에 얻었던 답이 질문이라니. 이 무슨 깻잎으로 깻잎 싸 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 철학은 곧 질문이라는 말이다.

좋은 철학자는 멋진 답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은 모두 철학자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왜?를 외친다.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엄마 아빠를 당황시키는 ‘무한 루프 왜?’의 시기가 도래하면 생각보다 내가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음에, 그리고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모래성처럼 부실했음에 어른들은 당황하게 된다. 세상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함에, 해맑게 귓방망이를 날리는 내 아이들의 질문들.
 

아, 왜 달님이 나를 쫓아오는 것처럼 보였더라. 그게 무슨 거리와 각도의 문제였는데... 망할.
하지만 지식과 관련된 이런 문제들은 나름의 해결책이 있다. 과학적 지식이 부족할 땐 문학적 상상력에 기대면 된다. 어차피 이 나이에는 설명해 줘도 이해가 어렵다...는 변명을 버무려, 같이 동심의 세계로 퐁당.
“어, 달님이 우리 지음이랑 놀고 싶어서 집에도 안 가고 계속 졸졸 따라오나 봐.”

(나의 무식을 내 자식들에게 알리지 말라.)


정작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아빠, 저 아저씨는 추운데 왜 길에서 코 자?”

“엄마, 죽는다는 게 뭐야?”


나름의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내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지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이제 막 세상에 도착해서 기대감과 신비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저 작은 존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짝이는 눈을 가진 작은 아이를 키우는 어른들은, 세상의 모든 부조리하고 민감한 부분에 대해 소처럼 우물우물 되새김질을 시작한다.  
그래서 이 시기는 어른에게도 축복이다.

세상을 다시 돌아보고, 내가 몰랐던 부분을 알아 가고, 내 의견들을 다시 다듬는다.

내 시선이 달라지고, 굳었던 뇌가 비를 맞은 듯 촉촉이 적셔지고, 내 가치관이 해묵은 먼지를 툭툭 털고 새롭게 정돈된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시에 나오듯, The Child is the father of the Man.

마음껏 질문하고, 마음껏 소리치고 춤추는 아이들.
오늘이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잠들기 싫은 아이들.

그들로부터 나는 많이 배운다.

삶의 궁금한 조각조각뿐 아니라 삶을 사는 자세까지.


얼굴을 바꾸는 앱, 엄마와 아기의 변증법


친구가 메신저로 사진 하나를 보내주었다. 한참 유행하던, 얼굴을 바꾸는 페이스 스왑(face swap) 앱.

친구가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인데, 둘의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닮은 얼굴의 그 부조화스러운 조합에 친구와 한참 깔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사실 나는 그 조합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아이가 어른처럼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그런 순간들과,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되어 보는 엄마들.

엄마와 아이가 함께 크는 그런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변증법을 이 앱은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유쾌하게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앱이 출시되기 약 80년쯤 전에 르네 마그리뜨는 이런 그림을 그렸다.

The Spirit of Geometry (René Magritte, 1937)

봉긋한 검은 소매가 달린 옷을 입고 곱슬머리가 단정하고 고운 느낌을 주는 엄마와, 작은 천 하나만 걸친 채 머리도 아직 나지 않은 포동포동한 아기. 그 둘의 얼굴이 바뀌어 있다.
생각이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그림이다.


먼저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겠다. 미성숙한, 아이 같은 어른이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다면.

그런 어른 밑에서 아이들은 보통 일찍 철이 들어 애어른이 되곤 한다.

그런 안타까운 그림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탄생과 성장과 소멸의 변주.

우리 나이쯤 되면 우리는 ‘아빠 뒷모습이 저렇게 왜소했나, 엄마가 이제 내 보살핌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한 번씩 아픈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아이 앞에서 점점 나이 들어 왜소해지는 엄마와, 엄마의 품에서 어른으로 자라나는 아이. 이 그림은 시간이 어김없이 만들고야 마는 그런 쓸쓸한 인생 여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머리가 바뀐 탓에 아빠처럼 보이는 아이의 모습과 딸처럼 안긴 엄마가 그런 생각을 더욱 부추긴다. 아들이라면 껌뻑 죽는 어머님들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 나이가 드실수록 아들의 든든한 어깨에 기대고 싶어 하는 우리 어머님들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 지인은 나는 나 하나를 돌보게 되면 그게 어른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내가 돌봐야 하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을 때, 그 때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라는 말로 나를 낳고 길러 세상에 내보낸 어머니가 나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표현한 적이 있다. 그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볼 때도 이 그림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석으로 이 그림을 보고 싶다.

아이가 어른처럼 깨달음을 주는 그런 순간들과, 아이를 키우면서 천진하게 아이가 되어 보는 엄마들.

굳은 시선을 깨 주고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는 아이들과, 아이 손을 꼭 잡고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어른들.

함께 서로를 품에 보듬으며 입장을 바꾸고 시선을 교환하며 크는 우리들.

그림 속 둘의 얼굴이 좀 더 유쾌하고 다정하게 보였다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철학 공부를 할 때 가장 읽기 싫어했던 것이 헤겔이었다. 와 어쩜 글을 그리 딱딱하고 미친 듯이 길게 쓰시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죽도록 한 문장이 끝나지 않는 독일어의 특성과 번역 탓인 것 같기도 하지만. 흠흠.

그래서 제대로 끝까지 읽은 책이 거의 없다. (내 오랜 지도교수님들께서 이 글을 읽는 일은 없겠지. 후후후.)

하지만 이 그림을 보면서,  아이들과 이렇게 유쾌한 변증법을 구현하며 살고 싶다 생각하면 헤겔에 대한 애정이 뒷북처럼 몽실몽실 피어나는 느낌이다.

 


아이들은 신발을 좋아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릴없이 신발을 신는다.

아직 말을 잘 못 할 때, 내 아이는 때때로 자기 신발을 신고, 엄마 신발을 문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엄마를 쳐다보곤 했다. (어찌나 귀엽던지!)

신발. 엄청나게 신나는 바깥세상으로 나를 데려다주는 물건.


이제 나이가 들고 집순이로 삼단 변신을 마쳐 집이 제일 편안하고 이불 밖 세상은 모두 위험한 엄마가 되었지만, 좀 귀찮더라도 신발을 신고서 따라 나가면 나는 분명히 뭔가를 가슴에 담고 새로운 것을 배워 온다.

아이들, 내 귀엽고 고마운 선생님.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오늘도 함께 부지런히 크자꾸나.

오늘의 모험을 떠나보자 ⓒ a little teap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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