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Sep 16. 2019

독일, 우리 동네 놀이터를 소개합니다

독일 시골 마을의 동네 놀이터는 어떤 모습일까

이 글은 '아이들을 위한 제3의 공간을 좋아하는 해외 리포터'들이 같이 만들어가는 매거진 <해외특파원이 발견한 제3의 공간>에 싣기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많은 분들이 모여 협업하는 공간이고, 저는 일원으로 참여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 동네 놀이터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뮌헨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 하임하우젠(Haimhausen)에 살고 있는데요. 뮌헨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인구 5천 정도의 작은 도시입니다. 정조 임금님 때부터 빵을 구워 온 빵집도 있고, 길에 가끔 말도 다니고, 할머니가 은발을 휘날리며 트랙터를 몰고 가시기도 하고(심지어 BMW 트랙터!), 할아버지들께서 장작 패시는 모습도 가끔 목격합니다.  

풀냄새 꽃냄새 과일냄새 퇴비냄새 허허허

보시다시피 시골시골한 분위기. 여름이면 자두가, 가을이면 사과와 배가 길에 뚝뚝 떨어져 발에 차이는 곳입니다. 서양배는 물방울 모양으로 생겼는데 혹시 가을에 배나무가 햇빛에 반짝이는 걸 보신 적이 있나요? 그림 형제의 동화에 나오는, 금빛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처럼 보인답니다. 빨간 사과가 채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사과나무에 눈이 하얗게 쌓이면 그 황홀한 색감 대비에 백설공주 생각도 나고요. 산딸기가 열리는 곳도 제법 많아서 여름이면 오로라 공주처럼 가시에 찔려가며 산딸기도 냠냠 따 먹고 다닙니다.


도시처럼 볼거리가 많진 않지만 공터나 빈 밭, 숲길, 자전거를 타고 맘껏 달릴 수 있는 차 없는 길이 많아 놀이 공간이 부족하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널찍한 시골 마을이 갖는 이점이겠지요.


동네에는 놀이터라고 부를 만한 곳이 서너 군데 있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릴 곳은 그중 가장 큰 놀이터.

Abenteur Spielplatz(Adventure Playground)라는 이름이 붙은 놀이터입니다. 구글 맵이 친절하게 집에서 걸어서 10분이라고 표시해 주네요.

맵을 찾느라 구글에 검색해봤더니 평점이 좋더라 얼쑤

3년 정도 살면서 보아온 저희 동네 놀이터의 특징을 소개해 드릴게요.


1. 나무 사랑 자연 사랑


1) 나무 사랑


그간 한국이나 미국에서 보아 온 놀이터들은 금속과 플라스틱이 지배적인 느낌이었다면, 독일의 놀이터들은 대체로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따로 알록달록하게 색을 입히지 않더라고요. 물론 알록달록한 곳, 금속과 플라스틱 시설물로 단장한 곳들도 많지만 나무의 비중이 압도적인 편. 저희 동네 놀이터는 장식물들도 토끼와 거북이 같은 귀염둥이 계열이 아니라, 저렇게 가슴을 드러내 놓고 평화롭게 묵상 중인 여인 같은 내추럴 계열입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게 아니라서 인공적인 느낌이 덜하고 소박한 느낌입니다.


참고로 맨 왼쪽 사진은 뒷길로 들어오는 입구.

경계다운 경계가 딱히 없고 그냥 마을, 숲, 밭과 사방팔방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이 엠 그루트

독일인들의 나무 사랑은 엄청난 것 같은데, 어딜 돌아다녀봐도 나무를 열심히 활용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래 사진은 동네 놀이터는 아니지만 나무의 활용도를 보시라고 근처의 다른 놀이 시설 모습을 두 장 뽑아 온 건데요. 거대한 나무 자동차와 벽까지 빼곡하게 채운 나무토막들. 나무가 주는 편안함과 더불어 불조심을 빡세게 해야겠다는 강한 사명감이 드는 비주얼입니다.  

거대한 나무 자동차와 거대한 그네. 저 그네 스피드가 엄청나요.

2) 자연 사랑


또 하나의 특징은 깔끔히 정리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놓아둔다는 점입니다. 자연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공간을 깔끔하게 다듬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듯합니다. 잡초들이 행복하게 돋아나 있고 엉겅퀴나 가시덤불도 제법 많은 곳. 아이들이 자주 다니는 샛길에는 손에 찔리면 굉장히 아픈 가시풀이 있는데(애들 산딸기 따 주다 찔려 봤는데 와후 정말 뉴런의 시냅스가 느껴지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어른들이 나서서 몽땅 제거하기보다는 이렇게 생긴 풀은 아프니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편입니다.  

좌) 깔끔히 정리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 / 우) 남편이 다니는 연구소도 화단 대신 저렇게 각종 들풀과 꽃들이 높다랗게 자라있었습니다. 너무 예뻐요.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몸에 지는 나무 시설물과 다듬지 않은 투박한 모습의 콜라보는 보기에 따라 촌스럽다는 느낌을 주기도 할 겁니다.

실제로 한국에 있는 한 친구에게 놀이터 사진을 보여줬을 때 뭐 이리 촌스럽냐는 대답이. 흐흐.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세상 신나는 곳입니다. 저도 마음이 답답할 때 가끔 위로를 받는 곳이고요.

어느 속상하던 날. 놀이터 중심부를 등지고 놓인 벤치에 앉아 바로 이 풍경에 위로받았더랍니다.

과일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놀이터입니다. 축구장 근처에 사과나무가 있는데요. 사과로 축구를 하면 사과 공이 예상치 못한 경로로 튀어서 재미있습니다. 물론 배고프면 씻어서 먹기도 해요. 놀이터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밭에는 다양한 작물이 심기는데, 사료용 옥수수가 익으면 아이들이 바닥에 떨어진 옥수수자루를 들고 와 미끄럼틀에서 비쩍 마른 낟알들을 떨어뜨리고 놀기도 합니다.

좌) 사과나무와 옥수수 밭 우) 적당히 굽은 나무를 그대로 이용한 놀이 시설 겸 벤치
사과 축구우우우!!!!!

2. 늘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마술


1) 조금씩 새로 만들고, 있는 것은 다듬고


3년 정도 이 마을에 살면서 놀이터를 드나들었는데, 정말 부지런하게 뭔가가 생겨납니다.

처음 갔을 때는 이렇게 생겼었는데 (뒷부분 큰 돌들도 주목: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엄마, 무서워요. 살려 주세요.

다음 해에 갔더니 대가리가 생겼다! (이 저렴한 표현 무엇)

크와아아아앙. 색이 다른 거 느껴지시나요.
잡아먹을 테다

그 뒤로도 계속 뭔가가 늘어갑니다.

그곳에는 늘 뭔가 새로운 선물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 아이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갈 때마다 스물스물 늘어가는 그 무엇들. 돌들 사이에 장식품이 생기기도 하고, 은신처같은 조그만 집도 생겨났다.

기존에 있던 시설을 다시 살펴주는 것도 잊지 않는 듯합니다.
바구니 그네도 원래 저런 모습이었다가(왼쪽) 최근 밑에 푹신한 톱밥을 깔고 경계를 다듬어 줬네요(오른쪽).

쿠션이 깔린 바구니 그네에 누워 흔들 흔들 하늘을 바라보신 적 있나요. 행복이 밀려옵니다. :-)

이번 여름에는 엄청난 꽃밭과 함께 거북선 같은 거대한 배가 새로 생겼어요. 요즘 저희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입니다. 
아이들이 밧줄을 타고 저 머리통 위에도 올라가기 때문에 밑에는 폭신폭신 자잘한 나무 조각들을 깔아 두었어요.

두둥
뒤로는 높은 돌담이 있어 올라가는 스릴도 있고 (엄마도 살짝 무서운 높이), 배 안에는 밧줄이 얽혀 있습니다.
배에 연결된 나무 집. 나무 집의 양쪽 벽면은 내부가 3층인데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거북선 주변으로 생겨난 엄청난 꽃밭. 어른 키를 훌쩍 넘는 해바라기들.

최근에 갔더니 뺑뺑이(roundabout) 오른쪽으로 철망이 세워져 있는 게 뭘 또 만들 건가 봐요. 부지런도 하셔라.

오른쪽 나무 뒤로, 뭔가를 또 만들겠다는 의지

시골이라 아무래도 반짝반짝 영화관이나 박물관 같은 도시적 인프라는 부족하겠지만, 부족한 놀이 자원이라도 이렇게 잘 유지 관리하고 새롭게 다듬어가고 있는 점이 참 마음에 듭니다.


+ (2020. 1. 7 수정 중) 어멋! 지난 주말에 가니 그동안 안 보이던 새 식구들이 또 생겼어요. 바로 윗 사진, 뭔가를 또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였던 그 자리에, 죽은 나무를 그대로 이용한 엄청나게 매력적인 녀석이 하나 더 등장. 꼬꼬마를 위한 작은 안전 그네와 근사한 나무집이 생겼습니다.  


2) 기부되는 장난감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고마운 점은 기부되는 장난감이 많다는 점입니다. 'zu verschenken (give away)' 표시가 붙은 장난감 박스를 놀이터에서 자주 발견하는데요. 아이가 커 버려 더 이상 놀지 않는 장난감이 생기면 동네 놀이터에 놓아 두어 아이들이 모두 함께 놀게 해 주는 문화. 이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따뜻한 마음으로 신경 쓰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래서 동네 놀이터에는 뭔가 늘 새로운 선물이 가득합니다.

가장 많이 기부되는 모래놀이 도구들. 최근에는 펌프 밑에 누가 물 풍차 장난감을 가져다 두었더군요. 맹렬히 본받고자 합니다.  


3. 어른과 청소년 포함, 가족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공간


1) 가족이 함께 즐기는 공간


처음 놀이터에 가 보았던 어느 주말.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건 어른들도 함께 뛰어 논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른들이 탁구대 주변에서 팀을 짜서 맥주를 마시며 탁구를 치고 있었고요. 너른 풀밭에서는 한 가족이 축구 중. 엄마가 골키퍼를 맡아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고 아빠와 아들 둘이 이리저리 공을 차며 뛰고 있었습니다. 자리를 깔고 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도 많았고요. 온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공원 같은 느낌의 놀이터입니다.

웃통을 벗고 계셔서 소심하게 비껴 찍은 탁구대(사진 오른쪽). 혼성으로 팀 대항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축구하는 가족. 엄마 성량이 판소리 전승자이신 듯했음.
손자와 할아버지가 함께 타는 짚라인, 저도 몹시 좋아합니다
피크닉 중인 가족과 나무에 올라가는 소녀
이쪽에도 나무 밑 그늘에 마련해 둔 널찍한 피크닉 테이블이 있습니다

2) 청소년을 위한 배려


이 놀이터의 특징은 공간을 널찍하게 두면서도 굉장히 다양하게 구획했다는 점인데요. 지형도 높낮이가 다양하고, 숲길을 따라 들어가야 나오는 공간이라든가, 언덕 밑에 있어서 잘 안 보이는 공간 등이 많아서 처음에는 갈 때마다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청소년들은 아무래도 뮌헨 시내로 나가 노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이 놀이터에 무리 지어 있는 모습도 자주 목격됩니다. 인라인 트랙에서 보드를 타거나 은신처에 들어가기도 하고, 놀이터 뒤쪽에 무대처럼 꾸며 놓은 공간에서 음악을 들으며 얘기를 나누거나 춤을 추기도 하더군요.

이들은 모두 놀이터 중심부에서 좀 떨어져서 숨어 있는 공간들입니다. 

물론 늘 숨어있는 건 아니고,  탁 트인 공간에서 축구나 농구를 하기도 하고 그네를 타거나 나무에 오르기도 해요.


아래 사진은 공이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놓은 또 하나의 축구장과, 보드나 자전거 묘기를 연습할 수 있는 트랙. 

언뜻 보면 안 보이는, 작은 언덕 아래로 숨어있는 공간입니다.  

저희 아이들은 우다다다 뛰어가서 저 위로 한 번에 올라가는 것을 인생의 도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놀이터 안 쪽으로 나무로 둘러 싸인 농구 코트가 하나 더

뒷길로 통하는 장소에는 이런 조그만 무대 같은 공간이 있어요.
아이들이 걸터앉아서 놀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춤 연습 같은 것도 하고 그러더군요.

여기도 최근에 새로 단장을 좀 했던 것 같은데 다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베를린의 학교들은 아이들이 하루에 몇 시간은 어른들의  섬세한 눈길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스코틀랜드의 어느 학교에서는 선생님 시야에 애들이 다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 안의 풀숲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는데, 그와는 반대되는 철학이죠.

제가 '잘 안 보이는 공간, '숨어있는 공간' 얘기를 자꾸 꺼내는 것은 그 이유입니다.

숨을 곳을 충분히 주는 것, 그리고 아이들 감각을 자극시키는 울퉁불퉁 높낮이가 다양한 지형은 청소년뿐 아니라 꼬꼬마 아이들에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놀이 역시 마찬가지. 신체놀이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놀이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슬그머니 비워주는 공간, 아이들이 햇빛을 쬐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
마음이 내키면 춤도 출 수 있는 공간.
저희 아이들은 아직 멍뭉이 망나니들이지만, 좀 더 큰 아이들까지 배려하는 이런 공간들이 있어서 저는 참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4. 적절한 모험심과 도전 의식을 심어주는 다채로운 공간 구성 (feat. 구원의 손길)


이 곳은 놀이터에도 시설물에도 야생미가 넘친달까요, 대체로 터프합니다. 
여기 살면서 아이들의 놀이에 있어 리스크(risk)에 대한 태도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둘째가 돌도 안 되었을 무렵 독일로 왔는데요. 미국에 있었을 때는 아주 어린 아가들이 타는, 넘어지지 않게 다리를 쏙 끼워서 타는 의자형 그네가 어디에나 있었는데 독일에서는 그런 그네를 보기가 되게 힘들더라고요. 저희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만 해도 그냥 일반형 그네와 커다란 바구니 그네가 있을 뿐.

이제는 두 놈 다 잘 탑니다만 천만 번 밀어줘야 합니다

어차피 할 거면 애써서 처음부터 제대로 그네 타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인가 봅니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애가 걸음마를 좀 한다 싶으면 Laufrad라는, 다리가 땅에 닿는 두 발 자전거를 온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권합니다. 첫 애가 세 살 때 처음 태워서 1년인가 태웠더니 친구들이 너는 왜 아가들 타는 자전거를 타냐고 쫑알쫑알 물어 보데요. 허허. 며칠 전에는 제가 작은 샛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요. 두 돌 갓 지난 아가가 보조바퀴 없는 자전거를 자유자재로 타며 내리막을 쌩쌩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 안정감 있는 현란한 솜씨에 대 감탄.

(아줌마는 아직 자전거 못 떼었는데...)


미끄럼틀도 사선으로 놓인 통나무 위로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것과, 동굴을 기어들어가서 계단도 없는 층을 두 번 낑낑거리고 올라가야 탈 수 있는 긴 미끄럼틀이 따로 있습니다. 시설물들은 독립적으로 놓여있기보단 출렁다리나 터널 같은 것으로 서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고, 미끄럼틀은 대체로 거대한 모래놀이터와 연결되어 있어요.

쉬운 미끄럼틀과 어려운 미끄럼틀
비 온 다음날 아침 일찍 가서 놀이터를 전세내고 놀았습니다

작은 공사를 할 예정인 경우에는 크게 위험하지 않은 재료를 그냥 그대로 두어 아이들이 놀 수 있게 하기도 하더군요. 아래 사진은 그렇게 놓여있던 놀이터 뒷길의 돌무덤입니다. 이사 오고 첫 가을 겨울, 저 돌무덤이 저희 큰 아이에게는 되게 신나는 놀이공간이었어요. 뒷길 입구에 있었는데, 꼭 저 돌 산을 낑낑 타고 넘어야 비로소 만족하며 놀이터에 입장할 수 있었다는.

사천왕상도 아니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도 아니고, 왜 꼭 넘어야 하는 거니

2차 대전을 전후로 놀이터라고 이름 붙은 곳이 따로 없었을 때, 그리고 지금처럼 공사장을 막아 놓지 않았던 1930-40년대에 아이들의 제일 신나는 놀이터가 바로 공사장이었다죠. 아이들의 상상력과 놀이 본능이 즉흥적으로 폭발하는 곳이었다고 해요. 현재는 그런 놀이 패턴을 살려주기 위한 노력으로 영미권에 ‘폐자원 활용 놀이터(junk playground)'나 '모험 놀이터(adventure playground)'라는 이름의 놀이터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살짝 맛보고 싶으시다면 저희  매거진의 뉴욕  리포터인 맨모삼천지교님의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
https://brunch.co.kr/@sunheean0305/15)


이렇게 야생미 넘치는 시설물들은 좋은 리스크를 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나이가 어린 아이들로서는 즐기기가 좀 버겁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늘 등장하는 구원의 손길이 있더군요. 
바로 함께 노는 아이들!

이곳 아이들은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참 잘 도와줍니다. 당연한 자기들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유치원도 나이별로 반을 정하는 게 아니라, 세 살부터 대여섯 살 아이들을 고루 섞어 반을 만들더군요. 그래서 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도와주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 같습니다.


재작년이었나요. 월등히 작은 키에 모험심만큼은 재크의 콩나무처럼 하늘에 닿아있는 첫째가, 약간 무서운 큰 미끄럼틀을 계속 타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어른이 들어가서 위로 밀어 올려 주기에는 동굴 같은 작은 입구로 들어가기가 힘들거든요. 그런데 그곳에서 놀던 형 누나들이 다정하게 도와줘서 참 좋았습니다.


그동안은 동네 형아 누나들이 첫째를 참 많이 안아 올려 줬는데, 지금은 첫째가 자기 동생을 밀어 올려 줍니다. 엉덩이를 두 손으로 낑낑, 틈새로 보고 있으면 엄청 웃겨요.

또 타고 싶다고? 어, 어.... 드, 들어가자.


5.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놀이터 


아이들 스스로 이야기를 입힐 수 있는 중성적 소재가 많은 점도 좋은 특징인 것 같아요. 
딱히 용도를 잘 모르겠는 그런 시설물들이 많다는 점. 
그런 공간을 만나면 아이들은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해 사용법을 만들고 놀이 방법을 만들기 시작하거든요. 

이 곳엔 미끄럼틀이나 그네 같이 고전적인 놀이기구들도 많지만, 따로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시설물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놀이터 언덕 가장 높은 곳에 큰 바위 네댓 개가 스톤 헨지처럼 둥글게 놓여있는데요. 이렇게 커다란 바위를 드문드문 놓아두면 어른들에게는 앉을 곳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기어올라가서 뛰어내리는 곳이나 상상놀이의 공간이 되곤 하죠. 저는 주로 내 새끼들이 또 어디로 가 버렸나, 놀이터 전체를 내려다봐야 할 때 그곳에 올라서곤 합니다.

(그래도 안 보여요...)

바로 여깁니다

그네나 미끄럼틀을 타는 그런 신체활동뿐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며 놀 수 있는 공간. 

불을 뿜는 괴물이 되기도 하고, 기사들을 수호하는 용이 될 수도 있는 용머리. 
요정들의 식탁이 되기도 하고, 해적들의 감옥이 되기도 하는 바위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도, 노아의 방주도, 바이킹의 드라카(Dragon Ship)도 될 수 있는 커다란 배.
궁전도, 성도, 일곱 난쟁이의 집도, 교실도, 우리 집도 될 수 있는 작은 오두막들.

반지를 만들 수 있는 꽃과 식탁을 차릴 수 있는 과일들.

그리고 평온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그런 아이들을 바라봐 주는 나무 얼굴들.

6. 물놀이, 모래놀이 천국


마지막으로는 꼭 우리 동네 놀이터뿐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보는 놀이터의 가장 큰 특성.

바로 아이들이 모래와 물을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도록 모래 놀이터와 펌프, 수로 같은 것들을 굉장히 잘 구비해 둔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이 모래에 파묻히거나 진흙탕에 젖어버리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한국의 부모님들과 달리 이곳의 부모님들은 대체로 놀랄 만큼 초연하더군요. 맹렬하게 본받고 싶은 그 멘털. 그러나 잘 본받아지지 않는 그 멘털.
놀이를 마친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거지꼴이 따로 없고, 집에 와서 신발과 양말을 벗으면 현관에 해운대 모래사장이 펼쳐집니다. 야호.

놀다가 물도 마시고 손도 씻으러 오는 펌프. 겨울에는 사라집니다. 낑낑대며 물이 나오게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신나는 아이들.

펌프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모래 놀이터로 이어져서, 아이들이 수로를 열심히 파면 숲 아래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어요. 힘을 모아서 열심히 파고, 돌과 모래로 둑을 쌓아 웅덩이와 댐도 만들고, 엄청 신나게 놀다 보면 아주 거지꼴이 따로 없죠. 그래서 독일 아이들은 여름에 아예 수영복을 입고 놀이터에 오기도 하고, 봄가을에는 방수가 되는 놀이 바지에 장화를 신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아래 가장 첫 번째 사진이 Matschhose라고 부르는 아이들 놀이 바지인데, 유치원에서도 이걸 입혀서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시사철 내보냅니다.

좌) 대체 거기를 왜 청소하는거니 우) 공사해야 하는데 셔츠에 구두 신고 간 내 새끼들
뚜둔 뚠 뚠 수로 건설 중
놀이터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

이곳에서는 물과 모래로 자신들의 세상을 쌓으며 노는 경험을 참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 그림책에 무한히 등장하는 Schubkarre를 저는 공사장에서만 봤었는데, 여기에서는 놀이터에서 일상적으로 봅니다. 사실 저만 하더라도 공사장은 무섭고 위험한 곳으로, 공사 현장에서의 노동은 기피해야 할 직업으로 교육받고 자란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데요. 여기서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공사장도, 농장도, 공장도 참 근사하고 멋진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고 기쁩니다.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된 Bob the Builder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영국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으로 공사장 인부를 캐릭터화한 인물입니다. 유치원 친구들 중에도 농부가 꿈인 아이, 큰 트랙터를 모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아이, Bob the Builder가 자기의 히어로라고 꼽는 아이들이 있어서 이 사회는 참 건강하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 분이 바로 Bob the Builder

유치원에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가, 여자아이들이 나무 그늘 밑에 Schubkarre 넷을 조로록 늘어놓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너무나 예쁘고 귀여워서 사진을 찍었어요. 실은 공사 현장에서 헬멧을 쓰고 자재를 나르며 일을 하는 여성을 본 것도 제 인생에서 우리 동네가 처음이었습니다.  

조잘조잘 까르르




어떠셨나요.
독일의 모든 놀이터들이 이렇게 생기진 않았을 거예요. 저희 동네 놀이터는 이렇답니다- 하는 마음으로 소개해 본 글입니다. 한국 놀이터와 다르게 느껴졌던 부분, 제가 좋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열심히 담아보려고 했는데 어땠는지 모르겠어요. 각자 계신 곳의 놀이터와 공통점과 차이점을 느끼며 즐겁게 보셨으면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의 놀이터에 장난감을 기부하는 문화가 퍼지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해요. 다 쓰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놀이터에다 버리는 개념이 아니라, 누가 봐도 우와- 소리가 나올 법한 꽤 괜찮은 선물을 놓아주는 문화. 그리고 놀이터의 정의가 조금 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꼭 어린 꼬꼬마들이 신체놀이를 하며 뛰어노는 공간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큰 아이들도 친구를 만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의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금 비워주면 좋겠다고요. PC방이나 노래방도 물론 재미있는 공간이지만 청소년들이 탁 트인 공간에서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얼굴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 그런 공간을 좀 더 고민하고 신경 써 주면 어떨까 합니다. 
어린 꼬마들의 웃음소리와 좀 더 큰 아이들이 속살거리는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그런 공간이면 참 좋겠어요. 
 

사실 공간도 중요하지만, 충분히 놀 수 있게 그저 시간을 주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서든, 아이들은 놀 때 가장 행복할 거예요.

가장 최근에 간 모습. 이렇게 나이 먹고 있는 용머리와 많이 자란 내 새끼들.
우와, 오늘은 용 대가리에 물이 고여 있어!!!
이제 날아서 집에 가자









매거진의 이전글 피터팬의 네버랜드가 된 놀이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