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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Nov 09. 2019

슬픔을 먹는 개와 고양이 (4)

엄마가 쓰는 동화 5

(3편에서 계속)

https://brunch.co.kr/@jinmin111/53




“여기입니다 어르신.”

환한 달빛이 비치는 도시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야나는 겁이 났지만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털이 빨갛게 얼룩진 달빛개들이 한 무리 모여 있었습니다. 나무도 꽃도 풀도 모두 쓰러지거나 불타 없어지고, 도시 위로 겹겹이 안개처럼 쌓인 슬픔의 냄새가 진하게 코를 찔렀어요. 슬픔의 냄새에 겹쳐 느껴지는, 슬픔과 비슷하지만 뭔가 다른 강한 냄새가 났습니다. 아빠는 매캐한 건 분노의 냄새, 비릿한 건 좌절감의 냄새라고 알려 주셨어요. 엄청나게 강한 화를 분노라고 하고, 좌절감은 기운도 힘도 하나도 없이 세상에 혼자 내팽개쳐진 것 같은 느낌을 말한대요.  

 

“확실히 이 부근에서 아이들의 슬픔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는데요.”

달빛개 중에서도 냄새를 잘 맡기로 손꼽히는 엄마 시요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어요. 좀 더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한참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엄마는, 확신에 찬 얼굴로 돌과 철근과 콘크리트 더미가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한 지점을 가리켰어요.

“여기, 이 아래예요.”

“그래? 이 아래라... 달빛 없이 깜깜한 저 아래에 우리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어른들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야나의 머리에 반짝,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할머니이! 누울! 눌이 들어갈 수 있어요!”

아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모두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어요. 눌은 자기 이름이 적막한 공간에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통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어요.

“오오오 그렇구나! 너라면, 특히 너 같은 아기 고양이라면 아주 작은 틈으로도 캄캄한 곳에 들어갈 수가 있지. 게다가 고양이들은 밤에도 대낮처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 잘됐다. 그런데, 잠깐. 흠.... 이 아기 고양이를 과연 혼자 보내도 되는 건가...”

 

할머니께서 잠시 생각에 잠기신 틈을 타서, 눌은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야나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야나는 눌을 놀라게 한 것이 미안해서 눌의 귀에 속삭였어요.

“눌, 괜찮아?”

“어, 괜찮아. 내 이름 너무 크게 불러서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어. 야, 근데 지금 나보고 들어가라는 거지?”

“어. 할 수 있겠어? 너 연기처럼 변신할 수 있잖아.”

“응.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무섭긴 하지만.”

 

그때, 할머니께서 결심을 하신 듯 눌에게 말씀하셨어요.

“아가, 미안하다. 우리를 위해서 용기를 내줄 수 있겠니? 들어가서 정말 아이들이 있는지, 그 안의 상황이 어떤지 보고 우리에게 얘기해 줄 수 있겠니? 이런 부탁을 해서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안의 상황이 얼마나 급한 지 모르니 지금은 너의 특기에 기대는 편이 가장 좋을 것 같구나.”

“그럼요 할머니. 제가 해 볼게요.”

“눌, 아주 슬프고 무서운 광경이 보일지도 모른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내키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정말이야.”

“괜찮아요 할머니. 금방 다녀올게요.”

야나의 엄마 시요가 눌을 꼭 안아주며 말했어요.

“눌, 피 냄새와 죽음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거든 모든 것을 즉각 멈추고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할머니 말씀 잘 알아들었지?”

“네. 걱정 마세요. 들어가서 변신할 때 코부터 만들면 되겠죠? 헤헤.”  

“눌, 너 진짜 멋지다. 내가 나중에 동네 친구들에게 네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다 얘기해 줄게.”

야나는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응원의 마음을 보탰습니다.

 

눌이 몸을 검은 연기처럼 만들어 쭈우우우우욱 작은 틈새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신기합니다. 눌이 벽돌과 깨진 유리 사이로 자취를 감추자, 어른들은 다시 의논을 시작했어요. 저 안에 든 아이들의 슬픔을 어떻게 먹어줄 수 있을지, 그리고 아이들이 저 밑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 달빛개들이 인간 세상에서 물건을 움직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 이 무거운 돌과 유리 조각, 쇳조각들을 치우지 않고 아이들을 구할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어른들은 각자 근심스러운 얼굴로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으며 아이들을 위로할 방법을 고민했어요. 몬 할머니는 우선 이 주변에 사는 개나 다른 동물들을 모아서 도움을 청해 보자고 했습니다. 이 곳을 잘 아는 보리 아저씨 남매가 자진해서 일을 맡기로 하고 어둠 속을 향해 달려 나갔어요. 주변에 다른 동물들조차 보이지 않으면 달빛개들의 금기를 깨고 사물을 움직이는 방법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나오자, 몬 할머니는 굳은 표정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른 틈으로 검은 연기가 꼬불꼬불 피어 나와 차츰차츰 진해지더니 눌이 되었어요.  

“할머니! 좋은 소식이에요! 저 밑에 아이들이 있는데요. 되게 많아요. 그게... 다섯, 일곱보다 많고...  그러니까... 여섯인가? 으아아아, 엄마 말씀 듣고 숫자 공부 좀 할 걸. 암튼 아이들이 있는데요, 다들 무사해요!”

“와아아아아!”

달빛개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요.

“아이고,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가, 고생 많았다.”

“할머니, 그리고 그 안에 고양이도 한 마리 들어 있어요. 키키라는 앤 데요, 저한테 걔가 다 얘기해 줬어요. 거기에 갇힌 지 얼마나 됐는지는 깜깜해서 잘 모르겠대요. 네모난 튼튼한 방이에요. 지금은 꺼 놨지만 손전등도 있고요. 근데 다들 배가 고프고 힘이 없대요. 그리고 다들 눈물을 흘리며 계속 악몽을 꾼대요. 아, 그리고 굉장히 열이 심한 아이가 하나 있다고 하던데... 먹일 물이 없어서 걱정이래요.”

“가엾어라.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슬픔을 먹어주는 일인데... 어떠냐, 그 안에 슬픔이 정말 많지?”

“네. 터질 만큼 꽉 차 있어요.”

“그걸 눌 너 혼자 다 먹기엔 무리일 텐데... 어떠냐, 데굴데굴 굴릴 만 하든? 이런 경우엔 먹기보다는 아까 말한 대로 데굴데굴 굴려서 우스운 모양을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네. 안 그래도 제가 조금 시도를 해 보긴 했는데요, 너무 터질 것처럼 꽉 차 있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굴려지지가 않더라고요. 핥아보기도 했는데, 그런 맛은 처음이었어요. 혀가 덴 것처럼 너무 아파서, 저걸 조금이라도 먹으려면 저희가 아플 때 핥아먹는 별기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흠... 어쩌면 좋을까. 우리 어른들이 거기에 들어갈 방법이,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때 보리 아저씨 일행이 동네에 사는 개 둘을 데리고 도착했어요.

“어르신, 힘을 쓸 수 있을만한 큰 동물들은 안 보이고 여기에 올 수 있는 개들도 이들이 전부입니다. 다치거나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아서요.”

“고생했어요. 여러분, 이렇게 선뜻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밑에 아이들이 있다고요?”

“예, 방금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대여섯이나 일고 여덟쯤 되는 아이들이 무사히 들어 있답니다.”

“저희에게는 아이들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데, 아이구, 이 아래라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급해진 동네 개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앞발로 흙더미를 파내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커다란 돌들과 철근이 가득한 무너진 건물 더미를 지친 개 둘의 힘으로 파내기엔 역부족이었어요.

“저희가 사람들을 불러올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희는 집이 없는 떠돌이 개들이라 사람들이 저희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밤에 짖어댄다면 몽둥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 아시다시피 지금 사람들도 많이 힘든 상태라 저희들에게까지 다정하지 못하거든요. 사실 저희가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답니다. 그래도 날이 밝는 대로 주인 있는 개들에게 얘기해 보겠습니다. 평소에 저희랑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걱정 마세요.”     

“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일 것 같은데, 그 안에 아프다는 아이가 있어서 그게 걱정입니다. 잠이라도 잘 자고 조금 더 버텨주면 좋겠네요.”

 

야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어요.

“할머니, 제가 아까부터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슬픔을 빼내면 되지 않을까요? 밖으로 빼내 주면, 우리가 여기에서 먹으면 되잖아요.”

“오호라. 그래, 얘기해 보렴 야나. 그럴 방법이 있겠니?”

“제가 눌네 가족을 따라다녀 봐서 아는데요. 눌네 가족이 캄캄한 방 안에 들어가면 눌이 가끔 슬픔을 가느다랗게 늘여서 밖에 있는 저에게 던져주곤 했어요. 달빛개는 빨리 먹으니까 도와달라고요. 구름고양이들은 자기 몸을 늘이듯이 슬픔도 아주 가늘고 긴 실구름처럼 늘일 수가 있거든요.”

“아하.”

“맞아요! 거기에 꽉 차 있는 슬픔을 실구름처럼 만들어서 들어온 틈으로 내보내면 할머니랑 아줌마 아저씨들이 여기에서 금방 먹어줄 수 있잖아요! 우리는 핥아야 되지만 달빛개들은 빨리, 많이 꿀꺽꿀꺽 먹으니까! 우와 야나, 너 정말 똑똑하다!”

“정말 좋은 생각인걸!”

“꼬맹이 너 대단하구나!”

모두들 야나를 칭찬해 주었어요. 아빠와 엄마, 할머니가 함빡 웃으며 자랑스러운 눈으로 야나를 따뜻하게 바라봐 주셨습니다.

 

“그럼 당장 시작해 보자.”

“자, 이리로 모여요. 물통들 잘 챙겨서, 잘 마셔가면서 먹어요.”

“좋아! 시작이다!”

눌이 다시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서 몇 분 뒤,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돌 틈 사이로 멍 색깔의 실구름이 꼬불꼬불 나오기 시작했어요! 어른들은 꼬리 길이 만큼씩 잘라다가 막대 과자처럼 우두득우두득 씹어먹기 시작했어요. 실구름은 핏빛이었다가, 검은빛이었다가, 노란빛이었다가, 다양한 색깔로 변하면서 쉴 새 없이 빠져나왔어요. 어른들은 그 실구름 슬픔을 먹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이리저리 다니시면서 눈물을 흘리는 달빛 개들을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야나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어요. 자기도 눌처럼 그 안에 들어가서 지친 아이들의 손과 뺨을 핥아주고 가슴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요.    

 

달님이 서쪽으로 한 뼘쯤 더 기울었을까, 많은 달빛 개들이 모두 힘을 모아 도우니 슬픔은 금방 없어졌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던 틈 사이로 꼬불꼬불한 검은 연기가 나와서 또다시 눌로 변했어요. 야나는 틈 앞에 코를 대고 기다리고 있다가 덥석 눌을 안았어요.

“눌, 잘했어! 아이들은 어때?”

“응, 내가 마지막 아이까지 잠결에 웃는 걸 확인하고 왔어. 열이 많은 아이도 자면서 웃고 있어. 가슴이 막 뿌듯하고 눈물이 나서 혼났지 뭐야.”

“눌, 정말 고생 많았다. 우리가 큰 빚을 졌구나. 힘들진 않니?”

“네 괜찮아요. 제가 먹은 것도 아니고 그냥 실만 만든 건데요 뭐.”

“잠시 쉬렴. 여러분! 아이들이 다들 웃고 있답니다! 고생들 많았어요! 다들 조금 쉬어요.”

어른들은 기쁜 얼굴로 여기저기 털썩 누워 숨을 고르기 시작했어요.

 

“눌, 네가 몰래 따라와서 정말 다행이야.”

“히히히, 그렇지? 나 집에 가면 엄마 아빠한테 막 자랑할 거야. 네가 나 얼마나 멋있었는지 옆에서 얘기해 줘야 돼!”

“그럼 그럼. 아마 다 용서해 주실지도 몰라!”

“아니야. 받기로 한 벌은 받아야지. 내가 밑에서 실구름을 만들면서 키키랑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 안에 엄마 아빠를 잃은 아이들이 참 많더라고. 비록 맨날 소리 지르고 내 꼬리를 꽉 잡고 혼내시지만, 우리 엄마 아빠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우, 생각만 해도 슬픔 뭉치가 가슴에 턱 걸린 것처럼 아파. 나 집에 가면 엄마 아빠 말씀 정말 잘 들을 거야.”

“그래. 히힛. 내가 얼마나 가는지 지켜볼 거야.”

“너도 슬픔 먹었어? 괜찮아?”

“아니. 어른들이 아주 강력하게 말리는 바람에. 할머니도 그러라고 하시고. 그래서 아빠 옆에서 살짝 맛만 봤는데, 엄청나게 아렸어. 정말 걱정이야.”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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