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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Apr 25. 2020

코로나 시대의 독일은 어떻게 아이들을 어루만질까

[해외특파원 소식] 아이들과 함께 코로나를 헤쳐나가는 사회

[해외특파원 소식] 아이들과 함께 코로나를 헤쳐나가는 사회 시리즈에서는 코로나 시대에 각 국가의 어른들과 사회는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정책적인 배려부터 몇몇 좋은 어른들의 따뜻한 사례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전할 예정이에요. 앞으로 소개할 미국, 폴란드, 독일, 홍콩, 영국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https://brunch.co.kr/@weseesaw/211



4월 20일. 이번 주 월요일이었던 이 날은 원래 유치원이 다시 문을 열기로 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유치원에 가지 못했고, 대신에 유치원에서 영어를 가르쳐주시는 엘리스 선생님을 줌(Zoom)으로 만났다. 파랑반 친구들 중에서도 하고 싶은 사람만 모이는 거라서, 이번 첫 수업에는 모두 네 명이 참여했다. 동화책을 함께 보면서 책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부활절 달걀을 찾는 놀이했다.


스크린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인 꼬맹이들.

이 놈들을 데리고 화면 너머에서 수업을 이어가시는 선생님의 능력이 놀라웠다. 옆에서 지켜보니 (수업을 지켜보려던 게 아니라, 도망가려는 자식 놈을 막아야 했다) 아이들은 중간중간 볼이 미어지게 뭘 먹기도 하고, 벌러덩 눕기도 하고, 화면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루카스가 뜬금없이 강아지 한 마리를 꼭 안아 올려 자랑하자, 알레나가 자기네 집 고양이 핑키를 데려오겠다며 사라졌고, 우리 아이는 이에 질세라 부침개를 뒤집는 뒤집개를 자랑했다.
그래도 수업은 성황리에(음?) 진행되었고, 오랜만에 아이네 반 친구들을 보자 내 마음도 몽글몽글해졌다. 사과처럼 동그랗게 머리를 묶어 올린 알레나를, 처진 눈이 귀여운 루카스를, 언제나 의젓한 알렉산더를 눈으로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얘들아, 잘 지내고 있었구나.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물으셨다.
"끝내기 전에 너희들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니? 루카스가 알레나에게, 아니면 알렉산더가 지음이에게?"
"Ich vermisse euch... (너희들이 보고 싶어.)"
알렉산더가 수줍게 첫마디를 던지자, 보고 싶다는 앳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와 이리저리로 교차했다. 눈물샘이 고장 난 늙은 엄마는 옆에서 아까 빼앗은 부침개 뒤집개를 들고 울 뻔했다.  
 

모두에게 힘든 시기지만 아이들에게는 특히 힘든 시기다.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은데 집에만 있으라고 한다. 계산 직전에 잽싸게 달걀 초콜렛을 집어 들거나 계산 직후 베이커리 코너에서  달콤한 가루가 가득 묻은 도넛을 먹곤 했던 수퍼마켓에도 아빠 혼자서 몰래 다녀온다. 인생 5년 차, 인생 3년 차에 뭔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났다.

수난을 당하고 있는 로고들을 모아둔 위 그림을 어른의 입장에서는 낄낄 웃어넘길 수 있다. 밖에 나갈 땐 저 스타벅스 세이렌 언니처럼 마스크를 쓰고, 집에 틀어박혀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평화를 느낄 수도 있는 게 어른이다. 그러나 아이들 입장에서는? 아이들에게도 지금 이 세계가 그냥 자조적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세계일까? 


마음껏 뛰어놀고 학교에 가고 세상을 탐험해야 할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고, 깔깔 웃고 소리치고 노래해야 할 아이들의 입에 5분도 참기 힘든 마스크를 씌워 놓았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것은 아이들의 본성에, 혹은 아이들이 누려야 할 삶의 본성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친구들과 뒹굴고, 선생님을 만나서 배우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꼭 안으며 온기를 나눠야 할 아이들이 소중한 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어른들이 너무 볼품없이 망가진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었다. 아이들은 대체 이 시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아이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으며, 세계 이곳저곳에서는 아이들을 어떻게 어루만져주고 있을까.  


이 바이러스의 시대에 각국에선 아이들을 위한 어떤 정책을 펴고 어떤 배려를 선보이고 있는지 쭉 조망하는 글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특파원 분들께 건의를 했다. 위기의 시대엔 특히 약자들이 타격을 받기 쉬운데, 아이들은 스스로 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도 경험도 채널도 부족하다.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주로 중년의 아저씨들이다 보니 아이들의 니즈와 눈높이에 맞추기 어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시기에 각자 살고 있는 나라에서 아이들에 관련된 정책이나 배려가 담긴 경험들을 모아두면,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를 또 다른 위기를 대비함에 있어 영감이나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면목없는 어른들이지만, 이런 정도는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독어가 짧아서 그런지 여기저기를 뒤져봐도 그다지 큰 소득이 없다.

(내가 건의했는데 내가 쓸 말이 없어)


그래도 첫 발을 떼는 마음으로, 주변의 경험과 뉴스 꼭지들을 모아두려 한다. 독일에 살고 계시는 분들께서 이 글을 보시고 덧붙여 주실 내용이 있다면 너무나 감사할 것이고, 앞으로 견문이 쌓이면 이 글에 더 추가하고 싶은 내용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런 소박한 마음으로.


1. 아동학대에 대한 우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아동'이라는 두 검색어를 넣었을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학교에 관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의외로 '아이들도 감염되어 중태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 그리고 '아동학대에 대한 우려'에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독일에서는 홈스쿨링이 불법이고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 갈 의무(Schulpflicht: 주마다 다르지만 약 10년간)가 있다. 이것은 그만큼 학교 교육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혹여 있을지 모를 학대의 정황을 믿을만한 어른들이 캐치해 신고하거나 취약한 아동들에게 학교를 통해 꼭 필요한 정보들을 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은 집 안에 갇히게 되었고,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은 검은 속내가 있는 어른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명분이 생겼다.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정보를 주던 선생님들 대신 정보를 차단하는 어른들이 곁에 있다는 것의 위험성, 이에 대해 많은 관련 기관들이 주목하고 해결 방안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이유로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에 대한 우려를 담은 기사들이 제법 나왔다.  

독일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마련해 둔 대책 없이 고심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 우선은 옆집에서 큰 소리가 나고 아이들이 학대받는 듯한 정황이 느껴지면, 이웃이 특히 사명감을 가지고 신고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렇다. 독일에서는 늘 매의 눈을 가진 이웃들이 엄청난 역할을 해 왔다. 이제는 소머즈 귀를 장착할 시기.) 전화나 온라인으로 핫라인을 개설해 두고 언제든 상담할 수 있도록 홍보도 하고 있다. 하지만 대면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기발하고 창의적인 케어 방법을 고민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결국 아이들에 대한 보호라는 건 원거리에서 원격으로 이루어질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소셜 워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접촉하고 신뢰를 쌓아가며 바꾸는 것이기에, 직접 만나고 직접 닿아야 한다. 따라서 현재 복지나 카운셀링 담당자들이 관리대상 가정을 방문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산책을 하는 아이디어 등이 고려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 많은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관리대상 가정이라는 요소에도 변수가 많을 것이다. 바이러스를 피해 집에 숨어야 하는데 그 집이 안전하지 못하다면 대체 어떤 심정이 들까. 가장 중요하게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 두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부디, 전 지구적으로 많은 지혜가 모였으면 좋겠다.  

지구인들아 지혜를 모아줘


2. 적절한 돈 풀기


사실 아이들에 대한 배려를 모아두자는 건의를 하게 된 배경에는, 미국에서 배고픈 아이들을 위한 무료 급식을 실어 나르는 노란 스쿨버스들의 행렬이 참 다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학교가 쉬니 제자들이 밥을 굶을까 걱정되어 18kg이나 되는 배낭을 짊어지고 8km를 걸어 직접 점심 배달에 나선 영국의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사진을 보고 울컥하기도 했다.   

좌) 집에 머물러야 하는 배고픈 학생들에게 점심을 실어 나르는 스쿨버스 (미국, 애틀랜타) 우) 젠 포울스 선생님, 고마운 이름 꼭 기억할게요 (영국, 그림즈비)

독일의 학교에서 이렇게 학생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있을까 해서 찾아봤는데 딱히 눈에 띄는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일단은 애초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밥을 먹지 않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독일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고등학교 아이들까지!) 모두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 시간은 자유롭게 보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는 좋을 수 있었겠지만, 점심을 챙겨 주어야 하는 부모의 부담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점점 종일제 학교가 늘어나고 있. 이런 학교들의 경우에도 무료급식은 거의 없는 편인데, 기본적으로 18세까지 모든 아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되는 킨더겔트(Kindergeld, 우리 아이들의 경우 한 달에 약 200유로씩 총 400유로를 받고 있다)가 있는 데다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패키지(예를 들어 학교 급식 비용, 소풍 비용, 문화체험 비용, 스포츠클럽 회원비, 학교 수업준비물 등의 지원을 포함한 교육 패키지 정책이 있다고 한다) 등의 혜택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독일어로 '테이블'이라는 의미의 Tafel이라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푸드 뱅크 시스템이 있기도 하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식품이나 과잉 생산된 음식, 포장이 약간 훼손된 식품들을 모아 1년 기준 약 10만 톤 가량의 음식을 지원하는데, 작년 기준으로 난민 포함 160만 명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외국인 이용자 비율이 75%까지 치솟자 한때 에센 지역 지부에서, 독일 국적자가 아닌 경우 신규 신청을 받지 않는 일시적 제한 조치를 시행했다가 메르켈 총리의 강한 비판뿐 아니라 여론의 호된 인디안밥을 신나게 두드려 맞고 번복했다. 이제는 독일 전역에서 국적에 상관없이 배고픈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혜택을 보는 아이들의 비율도 꽤 된다고 한다.

외국인을 배제한다고 했더니 수송차량에 '나치'라는 스프레이 낙서가 등장하기도

독일은 이번 코로나 사태를 맞으면서 유럽 각국 가운데서도 이례적으로 1조 유로(약 1350조), GDP의 약 30%에 달하는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내놓기도 했다. "처음부터 강하고 분명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숄츠 재무장관의 언급이 있었고, 프리랜서, 자영업자, 소규모 사업자를 대상으로 한 '코로나 즉시 지원금(3일 만에 5000유로씩 지급했고 추후 3개월 내로 9000유로를 추가 지급한다고 한다)'이 국적과 상관없이, 세금 번호를 받아 수익 활동을 하는 모든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선지급 후처리' 방식으로 빠르게 지급되었다. 또 코로나 때문에 지난 6개월 대비 소득이 줄어든 가정을 대상으로 'Notfall-Kinderzuschlag(긴급 아동 지원금)'을 마련, 아이 한 명당 한 달에 185유로를 지급하는 방안도 시행했다.

이렇게 국가가 먼저 배려했기에 이 시기에 따로 특별한 배려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개인적 미담은 제도적 그늘이 많은 곳에서 더 빛나기 마련이니.  


3. 미담이랄 건 없지만 내 마음속 미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독일에서도 꼭 필요한 중요 시설들을 제외하고는 셔터를 닫아 걸었다. 닫아 건 셔터 안에는 학교와 유치원도 들어있기 때문에, 필수 직종 종사자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정부에서 따로 특별 보육을 돌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상 자격이 되는 부모들의 리스트를 보니, 경찰, 소방, 필수 공공재, 미디어, 금융 분야뿐 아니라 쓰레기를 처리하시는 분들이나 마트에서 일하시는 직원분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에게는 그냥 이 리스트 자체가 미담 같았다.  


그러고 나서 며칠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아래 그림을 보니 더욱 흐뭇했다. 자기 딸이 마트에서 제일 좋아하는 캐셔 분께 감사의 카드를 그렸기에 자기가 가서 배달하고 왔다는 내용이었다. 이 예쁜 그림을 그린 다섯 살짜리 딸은 직접 배달할 수 없어 아쉬워했다지만, 카드를 전해 받은 분의 얼굴은 예상치 못한 기쁨으로 밝게 빛났을 것이. 의료진의 활약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시기 눈길이 가지 않는 곳에서 우리 삶을 지탱해 주고 있는 많은 분들이 계시다는 점에 새삼 생각이 가 닿았다. 그리고 사회가, 아이들이 그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이 참 고마웠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택배기사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마음들이 운동처럼 번졌던 기억과도 따뜻한 온도로 맞닿아 있다. 

제가 둘러보는 곳이 뮌헨 지역 영어 커뮤니티라 그런지 아이도 영어를 썼네요. 혹시 몰라서 이름을 살짝 가려두었습니다.


4. 선생님의 마음


휴교령이 내리고 나서 집에 유치원 선생님이 두 번 들르셨다. 첫 번째로는 부활절 선물을 건네주러 오셔서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가셨고, 두 번째로는 9월이면 학교에 입학할 예정인 큰아이를 위한 Vorschulkurs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니 유치원에서 만든 교재를 전해주러 오셨었다. 그러고 나서는 틈틈이 집 앞에 오셔서 우편함에 우편물을 넣고 가시는 모양이다. 어제 받은 커다란 봉투를 뜯어보니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했을 활동을 집에서 할 수 있도록 소개하는 편지와 함께 아이들이 그림으로 채울 프린트물과 만들기 재료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처음에 벨을 누르셨을 때, 아이들은 파자마에 맨발 차림으로 뛰어나가 선생님을 맞았다. 나도 택배가 왔는 줄 알고 살짝 문을 열었다가 선생님께 나의 부끄러운 고양이 파자마를 선보이고 말았다. (애고 어른이고 24시간 파자마를 입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희만 그런 거 아니라고 해 주세요.)


1) 첫 번째 배달


초콜렛이 가득 든 Osterhase (부활절 토끼) 가방. 앞에는 토끼 얼굴, 뒤에는 솜 같은 꼬리가 달린 것이 심쿵 포인트. 그 밖에도 봉투에다 유치원 측에서 학부모에게 전하는 편지와, 아이들이 부활절과 관련한 액티비티를 할 수 있도록 프린트물들을 함께 넣어 주셨다.   

아이들은 당장 토끼를 껍데기까지 탈탈 털어, 입 안 가득 초콜릿을 까 넣으며 웃기 시작했다.
독일 아이들로서는 크리스마스에 버금가는 신나는 부활절인데, 안쓰럽게 집에 갇혀 있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꾸미고 담으셨을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엄마는 고양이, 큰놈은 과일, 작은놈은 양 떼가 그려진 파자마를 각각 선생님께 선보였다

2) 두 번째 배달


내년에 학교에 갈 아이들을 위해 만드신 교재. 아이가 매일 한 장씩 클리어하고 있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공부는 선생님께 맡겨야 하는데 독어가 까막눈 수준인 엄마가 지도하려니 만만치 않다.

나도 독어 좀 배우게 내년에 같이 학교 가고 싶다

3) 세 번째 배달

 

백설공주 동화 패키지.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매해 주제를 정해서 한 해를 꾸려가는데, 이번 해의 테마는 '마법 가득한 동화 나라'였다(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눌러보세요). 한참 재미있는 활동들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아쉽게 중지하게 된 터라, 4월에 함께 읽을 예정이었던 <백설공주>로 우편 봉투를 가득 채워 주셨다.
 

우선은 동화를 함께 읽을 수 있게 백설공주 이야기가 통째로 들어 있었고,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그려 넣을 수 있는 마법의 거울도 있었고,
색칠공부, 일곱 난쟁이 손가락 놀이 방법, 난쟁이들이 부르는 노래 악보도 들어 있었다.
또 거울이 등장하는 동화이니만큼 거울과 관련한 과학 실험들을 아이들과 해 볼 수 있게 다양한 제안을 해 두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너무나 사랑스럽게도 사과 파이를 만드는 레시피까지. (독을 넣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_-)

그 밖에도 이 시기를 추억할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을 담아 두었다가 나중에 유치원에 가져올 수 있게 타임캡슐 형식의 프린트물도 넣어주셨고 (졸업할 때 나눠주는 아이들 개인 파일에 담아두신다고 했다)
예쁘게 만들어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붙일 수 있도록 나비 그림을 일일이 그린 두꺼운 색지와 셀로판지도 넣어 주셨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것들을 준비하시고, 또 어떤 마음으로 배달을 다니시는 것일까.

아이들이 이런 선생님의 마음을 제대로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너희들을 생각하고 너희들 뒤에 있어주는 어른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라도 꼭 알고 기억해 주기를.


5.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사회


마지막으로 독일이란 나라는 어떤 생각을 하는 나라인지가 개인적으로 느껴지던 지점을 두 가지 언급하고 싶다.

  

아이들이 아직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학교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주변 분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럭저럭 디지털 러닝(digital learning)을 하고 있기는 한데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여러 나라에서 동일하게 떠오르는 3대 문제점, 즉 컴퓨터 기기 등의 하드웨어 부족, 인터넷 연결망과 와이파이 등의 인프라 부족, 학생들의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부족도 문제지만 일단 선생님들 상당수가 인터넷 환경에 익숙한 분들이 아니라는 거다. 이메일 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으신 선생님도 제법 있나 보다.

일단 독일의 인터넷 환경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처음 독일에 이사 와서 인터넷을 설치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고(몸 안에 사리가 생성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얻어 낸 인터넷 품질 역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게 최선입니까'가 자꾸 튀어나오는 수준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광섬유 인터넷이 이제 들어올락 말락 하고 있고 아직 모뎀을 쓰는 곳도 있다고 한다. (살려주세요.) 그렇다 보니 답답한 구석이 많다. 이 나라에선 그럭저럭 작동이 되는 선에서는 옛날 물건, 옛날 방식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모두 집에 들어앉아 최첨단 원거리 통신을 해야 하게 생겼으니, 당황스러울 법도 하다.

독일에 이사 와서 인터넷 설치를 기다리던 나의 모습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빠르게 대처해야 할 순간에도 속도에 휩쓸려 중요한 것을 놓치고 가는 건 아닌지, 생각들이 깊은 모양이다. 이 양반들이 좀 답답하긴 해도 한 번 무슨 소릴 하는지 들여다볼만한 구석은 있다.


일단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워낙 인터넷 환경이 좋고 유튜버가 꿈인 사람들도 많은 만큼, 온라인 강의의 실력자들도 많으시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선 변화된 플랫폼 위에 빠르게 자리 잡은 스타 강사, 스타 선생님들을 기준으로 재빠르게 수준 높은 생태계가 형성된다. 기준에 못 미치는 수업은 차츰 추려지고 양질의 수업들이 살아남아 전체적인 레벨이 높아지는데,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즉, 우리나라는 1등을 기준으로 쭉쭉 앞으로 나가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속도에 발맞춰 따라가지 못하는 선생님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을 오히려 우려하는 것 같다. 우리 동네 초등학교의 경우, 온라인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학교 클라우드에 그날그날의 과제가 주어지는 정도로 운영이 되고 있다. 휴교령이 내려진 후 학부모들에게 교장선생님의 편지가 전달되었는데, 온라인 수업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고 그 이유로 아까 언급된 3대 문제점과 함께 '온라인 수업을 하면 부모들이 곁에서 같이 참관하게 될 가능성이 있고, 그럴 경우 교사의 권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아 놔 이 사람들 이래서는 뭘 아무것도 못하겠구나 싶기는 한데,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꽤 괜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변종되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바이러스의 특성상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위기가 닥칠 것이 예상된다면 앞으로는 디지털 러닝이나 온라인 클래스룸이 뉴 노멀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 답답한 양반들이 어떤 식으로 빡세게 고민하면서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갈지 조금 기대가 된다.  
  

또 한 가지. 각국에서 의료진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하며 연일 마스크를 쓴 영웅들 이야기를 널리 전하고 있는 데 반해, 독일에서는 이들에게 과도하게 영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영웅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의료진 역시 자신의 삶을 보호받아야 하고 자유와 휴식을 누릴 권리가 있는 개인들인데, 그들을 영웅이라 칭하면 자신을 돌볼 새도 없이 그 이름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날로 다크서클이 늘어가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님을 비롯해서 주말을 헌납해 가며 불철주야 24시간 애쓴 분들이 계셨기에, 차근차근 커브의 기울기를 줄여갈 수 있었고 모범적인 방역국으로서의 명성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위기의 순간에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정신이 약간 디폴트로 탑재되어 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정신이고, 감사가 절로 우러나는 마음이다. 나는 마스크 자국이 깊게 파인 우리나라 의료진의 사진을 볼 때마다 우리 엄마 얼굴 보듯 눈물이 난다.
하지만 이것을 계속 우리의 미덕으로 안고 가는 것이 좋을지, 이제는 한 번 새롭게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비록 짧은 견문이지만, 내가 이 시기에 보는 독일은 아기자기한 것에는 좀 서툴러도 위기의 순간에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기본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인의 마인드로는 급한 상황에 뭘 저렇게 이것저것 다 따져가며 미적대나 싶어 복장이 터질 때가 있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체로 귀담아들을만한 구석이 있는 얘기들이다. 그래서 나는 독일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 것이 재밌다고 느낀다.

물론 이 사람들이 늘 귀담아들을 만한 얘기만 하는 건 아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최근에 독일 북부 노이뮌스터 동물원에서 코로나 사태로 경영 위기가 지속되면 동물들을 순차적으로 안락사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해서 내 눈을 튀어나오게 만든 적이 있다.

(아니 뭐라고요.)
반려견을 키우려면 (닝겐들이) 의무교육을 이수해야 하고 동물 학대에 대한 처벌이 살벌한 나라에서 이 무슨 미친 계획인가 싶어 찾아보았더니, 역시나 '노이뮌스터 동물원에 기부하기'가 자동완성으로 구글에 떴고 기사에 대고 사람들이 지옥불 먹은 드래곤처럼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동물원 측의 입장을 들어보면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순간이 왔을 때의 비상계획(독일인들이 계획의 민족이긴 하지만 저런 계획은 좀..)이었고, 사실 정부 지원이 자영업자나 비즈니스 쪽으로만 향하고 동물원 같은 시설에는 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일깨우려는 일종의 언론플레이적 성격이 강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달콤한 뉴스만 듣고 살아도 온 몸이 뻐근한 시기에 저런 호러 향 자욱한 살생부라니. 한편으로는 잘 살고 있는 동물들의 생태계를 파괴시켜 바이러스를 창궐시킨 것도 인간이고, 그 위기에서 살아남겠다고 또 저런 잔혹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인간이구나 싶어 내겐 은근히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많이 씁쓸했다(뭐랄까, 싸 놓은 똥을 치우겠다면서 또 옆에다 똥을 싸고 있는 그런 느낌?). 사람들의 분노를 접하고 또 동물원의 입장을 확인하고 다소는 안심했지만, 위기의 순간에 사람만 앞세운 나머지 저런 무시무시한 계획을 강행하는 사회라면 나는 굉장히 실망할 것 같다. (다행히 이 지역 동물원들은 이미 지난 20일 자로 금지령이 풀려, 조금 엄격한 관람 규칙을 적용하는 선에서 다시 개장하게 되었다는 소식!)



#regenbogenaktion (rainbow action)

이상으로 코로나 시대의 독일은 아이들을 어떻게 어루만지고 있는지,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주섬주섬 엮어 보았다. 이건 디딤돌에 불과하고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나 사실들을 접하게 되면 또 차근차근 쌓아둘 예정이다.   


사실 어른들만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작은 손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레인보우 액션'이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독일 아이들도 통통한 손으로 세상에 많은 무지개들을 띄웠다.
모든 게 다시 좋아질 것이라며 창문마다 떠 있는 말랑말랑한 무지개들을 볼 때 우리 어른들은 단단한 위로를 받는다.

레인보우 액션에 참여한 독일 아이들. (우리 집에는 현재 무지개인지 보쌈 기름인지 모를 요상한 것이 떠있다.)
우리 동네에서 채집한 무지개들. 우측 하단이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 창문을 꾸미려고 새로 만든 무지개들 (feat. 해진 양말짝과 색종이, 종이 접시)

또 요런 허그 편지를 받으면 어떨까. 나는 아마 흐물흐물 녹아 없어질 것 같다.

실제로 우리 동네 초등학교 아이들은 맨날 놀러 가던 친구네 집에 가지 못하는 아쉬움 대신 편지를 주고받는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다고 한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그 조그만 마음들.

받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저도 이런 편지 받고 싶어요

아이들이 갖고 있는 치유의 능력은 놀랍다.
어른들이 망가뜨려 놓은 세상이지만, 아이들이 세상을 어루만지면 왠지 작은 손가락 밑으로 새싹이 피어나고 원적외선 재생 에너지가 솟을 것 같다.
우리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지만, 사실 아이들에게서 큰 보호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p.s. 근데 누가 엄마들도 좀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면 좋겠다 ・ᴗ・ 



# 이 글에 달아주신 댓글에 담긴 사례들도 첨부합니다.  

- 아날로그적인 과제 배달과 Schwarzwaldstein 캠페인 (엔부대디님)
: 저희 동네 초등학교는 선생님이 매주 우편함에 직접 과제를 넣어주고 가세요. 과제를 온라인으로 보낼 시 프린터가 없어서 출력할 수 없는 가정도 있고, 한국 부모들에게는 너무나 간단하게 여겨지는
디지털 기기를 다루고 온라인 학습 관리를 해주는 일들을 어려워하는 가정들도 있기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이 시기를 지나고 있네요.
또 저희 동네는 숲이 많은 지역이라 Schwarzwaldstein이라는 이름의 캠페인도 하고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 조약돌에 그림을 그리고 산책로에 숨겨놓는. 그릴 때도 신나 하고, 발견해도 신나 하고, 자기가 그린 돌을 누군가가 발견해서 포스팅해도 신나 하고. 아이들 방 창문에 무지개를 그려 붙여놓고 산책이나 잠깐의 외출 시 아이들이 친구 집 창문을 보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소소한 즐거움을 만들어가며 버티고 있네요.

엔부대디님 제보를 듣고 제가 찾아본 사진들입니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네요.
훑어보니 어디서 발견해서 다시 야생에 풀어놓았다, 우리 멍멍이 아미고가 발견했다, 돌 뒷면에 이런 이런 메시지가 있다, 내가 찾은 돌은 뒷면에 돌의 ID 넘버가 쓰여있다, 그거 우리 애가 그린 거예요! 이런 메시지들이 정답게 얽히고 있습니다. 찾은 돌들을 교회 앞에 조로록 줄 세워 늘어놓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점점 길어지는 줄을 보면서 즐거워하기도 하고요.
가족 단위로 산책이나 조깅은 가능한 상황에서, 서로를 연결해 주고 기운을 북돋워 주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제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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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동네 쪽에서도 발견했어요 :)

숫자 성애자인 큰아이가 몇백 개나 되는 돌을 일일이 세는 동안 지켜봐야 했다는... -_ -
돌들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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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이들은 5월 25일부터 다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내년에 학교 갈 아이들과 그들의 형제들만 우선 갈 수 있어요), 7월부터는 모든 아이들이 유치원에 갈 수 있다는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유치원에 집에서 구운 케이크나 머핀을 가져가 생일파티를 할 수는 없고(외부 음식 반입 금지), 부모들이 유치원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답니다. 아쉽게도 여름이면 개장하던 유치원 가든의 풀장도 이번 여름엔 없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던 체조 수업도 못하고 있네요.  


이웃 유치원이 닫혔을 때의 모습 (아이들의 소망과 그림을 담은 금줄.. 같은 것이 걸려있다)
유치원 다시 가던 날. 간격 두기 표시에서 역시나 숫자 놀이 중인 큰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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