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는 18년 전무지개팀이었다. 그가 조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을 더듬어야 몇 장면 생각나는 신입사원 연수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 버렸다. 6개 조로 나누어 팀을 이루어 한 달간 교육을 받았다. 그때 팀명은또렷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유치하지만 이름은 잘 지었나 보다. 무지개, '7명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색을 내자' 뭐 그런 의미가 아녔을지.패기 넘치던 45명의 신입들은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 회사 곳곳에 포진해 있다.
며칠 전 그의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다행히 퇴사 메일은 아니었고 다른 계열사로 전배간다는내용이었다. 가만, 메일을 다시 열어 수신인 목록을 펼쳐본다. 이름만 아는 임원, 팀장들을 지나 낯익은 동기들 이름을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스물둘
22/45=49%, 45명 중에서 그래도 절반은 남아 있구나. '타노스의 핑거스냅'이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지, 패기 넘치던 입사 동기중에 딱 절반이 사라지고 절반이 회사에 살아남았다.
이과생 그리고 연구원인 나는 남아 있는 22명 중에서 또 숫자를 헤아려 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홉
살아남은 동기 중, 팀장은 9명이 있다. 어디 보자,입사 기준으로나누면 9/45=20%소름 끼치게 20으로 딱 나누어 떨어진다. 그 옛날 경제학자 파레토는 "전체 결과의 80%는 전체 원인 가운데 20%에서 비롯됐다"며 2080 파레토 원칙을 주장했었다.입사동기의 전배 메일 수신인 목록에서 난 파레토의 법칙을 마주했다. 우리 회사도 과연 20%의 리더들이 80%의 경영 성과를 올리고 있을까? 내가 확인하여 알 길은 없다. 다만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나는 20% 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입사 이후로 경기에 따라 규모는 달랐지만매년 신입 사원은 들어왔고 그중 20%는 리더가 되었을 것이다. 1년 후배였던 남편이 2년 후배였던 박 팀장이 그랬던 것처럼 사번이 느린 그들은 나를 지나 먼저 팀장이 되었다. 이제 나는 팀장은 입사 순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3년 전 처음으로 예비 리더십 평가를 받았다.내가 맡고 있는 파트 리더는 팀장과 팀원들의 가교 역할을 해주는 자리이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회사에서 파트 리더는장차 리더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후보로서 중간 관리자 또는 예비리더라 불려지기도 한다.예비 리더십 평가는 중간관리자의 리더십 평가를 미리 해봄으로써 장단점을 미리 알게 하여 리더가 되기 전준비하게 하는 취지라 생각했다.
첫해 나의 리더십 점수는 78.7점이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회사 평균의 점수. 이 점수로 리더를 뽑는 건 아니지만 결과를 열어 볼 때 첫 모의고사 점수를 펼치는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과연 내 점수는 얼마일까?' 높은 점수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평균의 점수를 받아 들고 뭐랄까약간의 허무함과 씁쓸함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도 리더십에 대한 욕심은 있었나 보다. 평가 결과를 출력해서 손으로 끄적인 A4 용지 몇 장을 회사 서랍장에서 발견했다. 상사, 동료, 후배 3가지 그룹의 개별 점수를 확인해 보고, <사람, 변화, 일, 관리> 4가지 영역에서 내가 취약한 부분은 어디 인지 분석한 흔적들이 보인다.
내가 가장 취약한 영역은 '창의/자율'이었고 이를 향상하기 위한 추천 도서 목록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을 할 때 책으로 먼저 알아보는 습관이 있던 나는 추천 목록에 있는 책을 몇 권 주문했었다. 대부분의 책은 '리더는 이래야 한다', '리더가 갖추어야 할 5가지 원칙' 등 리더의 자리가 되었을 때 고민해야 할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너무나 뻔한 내용이 나열되기도 했고 워킹맘인 내가 따라하기에는현실과 동떨어진 것들이 많아 실망스럽기도 했다.그래도 5권 중 한 권 정도에서는 보석 같은 글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책 읽기를 놓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 바로 따라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울리는 글귀를 만났을 때는 가슴이 뛰기도 했다. 그때 샀던 책과 이후로 계속 이어진 책들은 나의 책장 한편을 차지하고있다.
리더십 책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나의 리더십 점수는 변함이 없었다.나는 그 뒤로 2번의 리더십 평가를 치렀고역시평균의 점수를 받았다. 나는 참 한결같은 사람인가 보다. 한 때는 '리더십 책을 다 중고서점에 팔아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아직도 팔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지금도 서점에 가면 '리더십, 자기 계발' 코너에서 책을 뒤적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회사에서 리더가 되기 힘든 걸 알면서도 나는 왜 리더십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는 걸까?
후배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은 마음
리더가 되지 못하더라도 회사에서 좋은 선배가 되고 싶었다. 작지만 한 파트의 리더라는 역할이 나에게 주어졌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와 후배들을 위해 파트의 성과를 최대한 끌어올려 상위자로부터평가도 잘 받고 싶었다. '그러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들은 항상 나를 따라왔고 리더십 책을 쉽게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 팀장이 못되면 어때, 하지만 부끄러운 선배는 되지 말자' 리더가 되지 못해도 민폐를 끼치는 선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 한 두 개 정도는 닮고 싶은 선배, 좋은 영향을 주었다면 바랄 나 위 없다.
내 인생에서는 리더가 되고 싶은 마음
회사뿐 아니라 그 어떤 곳에서든 2 사람 이상이 모이면 리더라는 개념은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무리 안에서, 동네 아줌마 또는 학부모 모임에서도, 우리 엄마가 다니는 수영장 반 할머니 가운데서도 누군가 대표가 되는 리더의 자리는 생겨난다. 회사에서 리더가 되지 못했다고 영원히 리더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범위를 좁혀 나의 가족, 나의 인생에서는 어떠한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나의 인생에서는 나는 확실한 리더가되고 싶다. 책만 읽는다고 가는 길이 훤히 밝아지지 않겠지만 최소한 길을 잃지는 않게 해 주리라 믿는다.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기 위해 나의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기 위해 나는 당분간 리더십 책을 팔지는 못할 것 같다.
18년 전 무지개팀 리더, 그의 메일 내용 화답으로글을 마친다. 어쩌면 나에게 하는 말인지도
'다시 마주치게 되면 내가 그 이름 잊지 않고꼭 불러 줄게요. 그동안 참 고생 많았어요.'
인연이 되어 길거리에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날 기회가 있으면, 저를 모른다 하지 마시고 부디 OOO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입사 동기의 메일 그의 마지막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