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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워킹맘 May 13. 2019

11월에 임신하고 싶어요

임신 vs. 고과

"언제쯤 아이를 가지는 게 좋을지 고민이 돼요. 인사고과 때문에... 지금은 때가 아닌 거 같아요. 딱 11월에 임신하면 좋을 텐데."


얼마 전, 회식자리에서 결혼한 지 막 2년이 지난 여사원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90년생이다. 나와 띠동갑이 넘는 후배 이야기를 들으며 소름 끼치게 놀랐다. 일하는 여자들의 고민이 20년이 지나도 어쩌면 이렇게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삼신할머니가 11월에만 일하라는 이야기다. 하늘이 점지해 주는 임신의 적당한 때를 누가 정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 회사의 인사고과 시즌은 11월 말에서 12월 초다. 약 11개월 동안의 업무 성과와 태도, 향후 발전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상사가 결정을 하게 된다. 앞서 여사원의 말에 부연 설명을 하면 11~12월 쯤 임신을 해야 그 다음 해 10월 경에 출산 휴가를 들어가서 한 해의 업무 성과 반영에 피해를 입지 않게 된다. 업무 성과나 태도를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그 객관성에 대한 팩트 체크가 모호하기 때문에 항상 말이 많은 것이 인사고과다. 11월이 가까이 오면 팀장님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수년간 보아왔고, 파트 리더인 나 또한 후배들 고과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다.


임신과 출산은 축복이다. 하늘이 내려주신 천사와 만나는 시간! 육아에 지치고 스트레스받아 힘들다가도 지금 내 옆에서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아~ 내가 그때 왜 이 아이를 낳는 것을 고민했을까?'라는 미안한 마음을 엄마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느껴 봤을 것이다. 인사고과 평가에 11개월이라는 절대적인 시간 잣대가 있기 때문에, 축복의 시작을 언제로 할 것이냐를 두고 임신을 하기 전부터 예비 워킹맘의 고민은 시작된다. 인사고과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정확성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 평가를 하고 평가를 받는 사람들, 결국 우리는 회사의 돈을 받는 월급쟁이 들이니 닥치고 받아들일 수밖에 


출산휴가로 8개월 일했지만 성과가 있는 예비 워킹맘 A

vs.  11개월 일했지만 뾰족한 성과가 없는 사원 B


이 두 사람 중에서 한 명에게 최악의 인사고과 'C'를 줘야 할 경우, 당신이 상사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 성과가 있지만, B 대비해서 3개월을 일하지 않은 예비 워킹맘 A

- 뾰족한 성과가 없는 사원 B


여기서 '성과가 있는'이라는 말이 상당히 애매하다. 어느 누가 봐도 탁월한 성과라면 주저 없이 A의 편을 들어주겠지만, 성과가 적당(?) 하다면 3개월이나 더 일한 수고를 생각해 사원 B의 손을 들어주는 상사도 분명히 있다. 성과에 대한 모호한 판단 기준이 인사고과 근본에 깔려있기 때문에 일단 11개월 채우는 놈이 유리하다. 


하늘이 주시는 축복을 인사고과와 맞물려 그 시기를 고민하는 후배를 보면서 안타까웠다.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이런 고민(20년 전 선배들이 했던 고민)을 하다니라는 울분이 튀어나왔다. 10년 전 둘째가 나를 찾아왔을 때가 생각이 났다.




'아~ 회사에 어떻게 이야기하지?' 

'출산 휴가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출산 휴가 간다고 하며 싫어할 텐데.' 


첫째를 낳고 3개월 출산 휴가 후 복직한 지 6개월이 지나 찾아온 아이였다.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아이를 갖은 기쁨보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결국 나는 임신 5개월이 될 때까지 회사에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숨기고 다녔다. 하던 일은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우주복 같은 옷을 입고 라인에 들어가서 시커먼 BM 재료를 글라스에 붓고 코팅하는 일도 했다. 화학약품이라 일부 좋지 않은 solvent(솔벤트)가 섞여 있어 임산부라면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을 무식하게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둘째한테 너무 미안해 진다. 요즘 '90년생이 온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워킹맘의 세계는 아직 나와 같은 70년생이 살고 있다.


지금의 여사원 후배들은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한다. 축복의 시간을 즐기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으면 한다.

"자기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서 왜 후배들은 그렇게 하라는 거야?" 분명 이야기할 수 있다.

지나고 보니 정말 후회가 된다. 내가 그때 왜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시대가 변하여 남자들도 의식이 바뀌고 있다. 격려하고 축복해 주는 상사, 남사원들이 분명히 있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들도 누군가의 남편이며 임신과 출산의 기쁨을 함께 축복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이다. 


예비 워킹맘들이여~ 당당해 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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