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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도슨트 임리나 Aug 17. 2023

제목이 영감이 되고 길이 된다

제목부터 써라 5


제목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필수다.
제목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

제목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제목을 처음부터 붙인다면. 글을 쓰는 작가가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 즉 제목이 한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무조건 쓴 다음에 나중에 제목을 붙이는 것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목을 건너뛰어 쓰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제목을 처음에 정하고 쓴다는 것은 이와 정반대의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제목이 있어서 더 영감이 확산될 수 있고, 또 제목이 있어서 글이 마지막까지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제목이 다르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1955년 개봉한 로마의 휴일 포스터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고전  <로마의 휴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앤 공주(오드리 햅번)가 로마 순방 중에 궁전을 탈출하여 신문 기자인 조 브레들리(그레고리 팩)과 하루 동안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벌어지는 해프닝과 로맨스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로마의 휴일>이 아니다. 


이 영화의 각본가 이언 매클렐런 헌터는 1953년 아카데미에서 원안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진짜 작가는 돌턴 트럼보다. 돌턴 트럼보는 그 당시 공산주의자로 낙인이 찍혀서 본인의 이름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공주와 평민>이라는 제목의 각본을 틈틈이 썼다. 그리고 동료인 이언 매클렐런 헌터가 읽어 보고 맘에 들어 하자 그의 이름을 빌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언 매클렐런 헌터는 <로마의 휴일>로 제목을 바꾸었고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영화가 되었다.

<공주와 평민>에서 <로마의 휴일>로 제목을 바꾼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공주와 평민>이었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 히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제목을 바꾸어 성공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트럼보가 처음 정했다는 제목 <공주와 평민>을 생각하면 조금 더 주제가 명료하다는 생각이 든다. <로마의 휴일>이란 제목이 멋있고 로맨틱 코미디의 느낌을 더 살리기는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를 생각하면 <공주와 평민>이라는 제목은 그 시대로서는 획기적인 설정이다. 

그동안의 흔한 설정인 신데렐라 스토리, 즉 평범한 여자가 왕자를 만나는 신분 상승의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와중에 <로마의 휴일>은 남녀가 바뀌었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물론 '좋은 추억'이라는 관점에서는 해피 엔딩이지만. 

<공주와 평민>이란 제목이 최종 제목이 되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데는 탁월한 제목이었다고 생각한다. 트럼보는 <공주와 평민>이라는 제목에서 영감을 얻고 마지막까지 길을 잃지 않았다. 

1956년 개봉한 <서울의 휴일> 포스터

그리고 1956년에 개봉한 <서울의 휴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로마의 휴일> 1년 후에 개봉을 했고, <로마의 휴일>에서 제목을 차용했음은 자명하다. 

서울 시내의 휴일(일요일)의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은 공통적이나 이야기는 많이 다르다. <로마의 휴일>이 앤 공주와 조브레들리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라면 <서울의 휴일>은 제목 그대로 '서울'이 중심이다. 

산부인과 의사인 여주인공이자 아내, 신문 기자인 남편(직업은 <로마의 휴일>과 똑같다.)그러나 이야기는 그 둘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이미 결혼했다.) 부부가 모처럼 휴일에 낭만적인 계획을 잔뜩 짜고 외출하려다 일이 꼬여서 그 당시 서울의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남편의 신문기자 동료, 공장에 취업을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성폭행과 임신을 한 여자, 살인범, 도박꾼 등이 등장해서 서울의 군상(群像)을 보여준다. 영화의 끝도 휴일의 저녁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그 당시 서울의 저녁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서울의 휴일>이란 제목에 충실했다. 


이렇듯 <로마의 휴일>과 <서울의 휴일>이 같은 제목이지만 이야기가 달라졌던 것은 작가가 처음 주제를 생각하고 붙인 제목의 차이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공주와 평민>에서 시작한 이야기와 <서울의 휴일>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작가에게 주어지는 '제목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길을 안내해 주는 '뮤즈'는 바로 스스로가 가장 먼저 생각한 '제목'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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