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분노유발자

by 북도슨트 임리나


내 인생에 잠시 교차점이 있었던 '이름 모르는 사람'중에는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심지어 이름도 모르지만 '분노'를 경험한 상대가 있다. 대부분의 격렬한 분노는 아는 사람, 나와 관계를 이미 맺고 있는 사람, 깊은 관계인 가족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묻지마 살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를 '정신이상자'의 가능성을 많이 두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내가 잊지 못하는 '분노'를 느끼게 한 그 사람은, 어쩌면 그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오랜동안 그 사람에 대한 분노를 처리하지 못한 채 가슴에 안고 살았다.



갑자기 대학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의 병문안을 가려고 이제 20개월이 된 아이를 차에 태우고 '시간제 보육'에 맡기려던 중이었다. 운전 중에 남동생으로부터 '아버지가 암이래'라는 카톡을 받았고 내 마음은 더 급해졌다.


'시간제 보육' 건물에 도착했을 때 마땅한 주차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두자리는 있던 곳이었고, 행사가 있어서 차가 많은 경우에는 아예 조금 떨어진 공터에 안내를 하는 곳이었다.


나는 주차를 하고 빨리 아이를 '시간제 보육'에 맡겨야만 병원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주차 자리가 없자, 주차선이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절대로 다른 차에 피해가 안되는 곳에 주차를 했다. 나도 평소라면 그런 곳에 주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더구나 내 차는 기어를 중립으로 하면 사이드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차라서 이중 주차도 못하는(안하는) 차였다.


하지만 그 날만은 아이를 빨리 내려놓고 또 수원에서 인천까지 거의 2시간 가량을 아버지를 보러 가야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모른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를 1초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분노의 주차금지


그렇게 주차를 하고 내려서 카시트에서 아이를 내리려 하는데 한 여직원이 건물에서 나오더니 나에게 차를 세우지 말라고 했다.


차를 세우지 말라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대안이 없었다. 다른 곳에 주차할 곳이 없었다. 기다리거나 아니면 다른 주차 공간을 찾아야 했다.


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사정을 했다.


"저 평소에 주차칸 아니면 주차 안하는 사람인데 지금 너무 사정이 급해요. 아이만 맡기고 나오면 안될까요?"


정말 5분도 걸리지 않을 시간이었고 앞에서 설명한대로 그곳은 주차선이 없었지만 절대 현재 주차되어 있는 다른 차가 나간다고 해도 방해가 안되는 곳이었다.


여직원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돼요. 빼세요."



나는 그 때 아버지가 암선고를 받은 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에게 가정사를 얘기하기 싫었고 그 말로 부탁하기가 싫었다.


더구나 그 여직원의 태도를 보아서는 말을 한다해도


"그건 댁의 사정이죠."라고 할 것만 같은 포스이기도 했다.



나는 다시 사정사정을 했다. 무슨 말로 했는지는 모르고 아마 '제발, 제발....'이렇게 비굴하게 빌었던 것 같다.


그렇게 5분쯤 실갱이 아닌 실갱이를 했을 때 여직원은 이번만 다녀오라고 했다. 그 '이번만'은 정말로 그때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내가 그렇게 주차가 안되는 곳에서 누군가에게 사정할 일은 없었다.



나는 서둘러 아이를 맡기고 나와서 아버지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직원에게 앙심을 품은 것은 물론이고 마음 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었고 분노했다.


생사가 걸려 있는데 5분을 주차를 못시켜준다고?



그 후, 딱 한 달이 걸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인생 마지막에서 가장 원망스러웠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여직원이었다.


"왜 그 잠깐을 못봐주지? 그 주차가 뭐라고.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건가?"


그리고 나는 장례를 치르고 그 여직원을 찾아가


'그 때 우리 아버지가 위독했고 한달 후에 돌아가셨어요. 어쩔래요?'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말로 그랬다면 그 여직원은 뭐라고 했을까?



생사가 걸린 일이 아니라면...



나는 그 일로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면 원칙을 어기더라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내 강의를 듣고 싶은데 수강 기간을 놓쳤는데 들을 수 있냐는 문의를 받는다면 원칙은 안 되는 일이겠지만 나는 흔쾌히 오라고 한다. 사람들은 부탁을 할 때 이유를 밝히거 어렵거나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유도 묻지 않고 오로지 '가능한가'만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여직원이 주차 담당인지는 모르겠지만 윗선에서 주차를 엄하게 단속하라는 지시를 자주 받아서 나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바로 주차 문제로 골치거리 일이 생긴 직후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해하려 애쓰지만 내가 그때 느낀 '분노'라는 감정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나에게 강렬한 분노의 감정을 남겨준 사람, 그 사람을 이제는 잊을 수 있으면 좋겠다.



p.s: 상실의 슬픔은 '분노'로 시작한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슬픔'은 그저 눈물을 흘리는 슬픔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감정은 다소 복합적이다. 누군가가 슬프다고 생각될 경우, 그 사람 안에는 '분노'가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상실의 깊이만큼 '분노'도 높을 수 있다는 것, 나는 몸소 겪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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