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도슨트 임리나 Oct 24. 2024

믹스 커피(3)

주문하신 커피와 천사가 나왔습니다

“VR은 길지 않아요. 왜냐면 제가 아직 기술이 없어서 5분도 안 될 거에요. 대신에 한번 재생한 내용은 다시 나오지 않으니까 딱 손님만 한 번 볼 수 있어요.”


VR. 유미는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이걸 쓰면 주변이 달라지고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 그러나 남이 볼 땐 우습다. 검은 안경을 쓰고 팔을 휘휘 내젓는 모습이나 느릿느릿 몸을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이. 

어차피 지금 혼자고, 점점 집안 일 하고 아이를 데려갈 시간이 줄고 있다고 생각하니 빨리 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VR을 머리에 끼려니 콩 매니저의 도움이 필요했다. 

콩 매니저는 희고 긴 손가락으로 유미의 머리에 맞게 VR을 조절해 주었다. 


“저 혹시 VR을 잘 모르실까봐 말씀드리면, VR 속의 사람을 보면 진짜 사람처럼 보여도 대화를 하거나 만질 수는 없어요. 당연하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드려요. 자, 이제 오른쪽 버튼을 누르세요.”


VR을 끼자 햇살이 비치는 창이 보인다. 돌이 지난 서호가 머리를 유미의 코앞에 두고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 알람처럼 참새가 다시 지저귄다. 몸을 뒤척이자 아이가 폴짝 폴짝거리며 좋아한다. 움직임은 서툴고 느리지만 웃음만큼은 최고다. 

저 미소를 매일 보기 위해 휴직서를 사직서로 바꿨었지. 예상하지 못했던 사직서는 회사를 술렁이게 했지만 아이만 건강하고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육아가 직장보다 몇 배 힘들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해가 떠있을 때는 활발한 활동가로, 해가 지면 발악가로 3시간 이상 울어대던 아이를 두고 매일 쩔쩔맸다. 50일의 기적, 100일의 기적을 믿었지만 돌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했다.


한 생명을 키우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아랫집에서 아이가 너무 우는데 어디 아프냐고  물어 왔다.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무능하다는 뜻이고, 청해도 도와줄 이는 없다. 나는 엄마 없는 아이다. 내 손으로 내 아이만큼은 잘 키워보고 싶었다. 땋은 머리 끝에 달린 방울을 볼 때나, 정갈한 도시락 반찬을 볼 때, 엄마가 그리웠다. 기다렸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에게 물었지만 머리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최소한 물어 볼 수라도 있었을 텐데. 세상은 나와 따로 흘러 가는 듯했다.


 아이가 잠에 들자 어두운 부엌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믹스커피. 완전히 혼자는 아니였네. 듬성 듬성한 머리카락마저 눕지 못하고 긴장하고 서있다. 떡진 머리, 퀭한 눈, 늘어진 셔츠, 무릎 나온 츄리닝. 세상을 향해 쩌렁쩌렁 우는 아이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손이 허공에서 느껴진다.


스산한 밤, 하루의 끝남에 허탈했고, 내일이 겁났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가장 불행한 시간과 함께 발화한다고 했던가. 열심히 하는데 제대로 못하는 내가 서러웠고, 아이는 아파서 서글펐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해 막막했다. 똑같은 하루가 지루하고 두려웠다. 

그럼에도 유미는 말하려 했다. 


‘이제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걱정마’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VR은 멈춰버렸다. 


유미는 방금까지는 못느꼈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VR이 아니라 쇳덩어리를 머리에 얹은 것만 같았다. 유미미가 VR을 벗으려고 손으로 VR을 잡아 올렸지만 잘 벗겨지지 않자 콩매니저는 희고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VR을 벗기며 말했다. 


“믹스 커피는 맛으로 마시는 게 아니죠.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한 그 시간이 중요해요. 혹시 오늘 조금 더 여유가 되시면 제가 한 잔 더 서비스로 드릴 수 있는데… ”

콩매니저의 후한 인심에 감탄하려는데 카톡이 왔다는 진동이 들린다.

대부분 이럴 때 연락은 유미를 필요로 하는 급한 연락이라 안좋은 예감으로 핸드폰을 봤다.


‘오늘 일찍 끝났는데 내가 서호 데리러 갈 게.’

유미 남편의 카톡이다. 

‘아 나만 종무식이 아니지.’

그랬다. 엄마 없는 아이에게도 남편은 있을 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좋아요. 딱 지금 이 맛으로 한 잔 더 주실래요?”

유미는 모처럼 연거퍼 두 잔의 믹스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리라 결심했다.  


‘어서 와. 새해!’

오늘의 커피 ‘믹스 커피’는 콩 매니저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메뉴였다. 콩 매니저는 카드매출 3만원을 보며 ‘커피 원두가 떨어진 게 다행인 걸까.’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별 다섯개의의 영수증 리뷰가 올라오기를 기대했다. 


-다음에 계속

이전 05화 믹스 커피(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