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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도슨트 임리나 Oct 24. 2024

믹스 커피(2)

주문하신 커피와 천사가 나왔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행사가 길어져 서울에 갈 시간이 지체되는 건 아닐까 조금은 은아를 걱정하며 뒷정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산타 옷을 입은 채로 은아가 카페에 들어가는 걸 본 기억이 났다. 그 때 따라가서 커피 한 잔이라도 사줄까 생각했지만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이 빠듯해서 외면했었다.  


이런저런 생각도 잠시, 갑자기 한기가 몰려왔다. 종무식 준비로 아침부터 바빴더니 긴장이 이제 풀리나 보다. 당장 따뜻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2시간 집안 일을 하기로 했다면 그 중 1시간은 차를 마시고 싶었다. 그 정도 여유는 누려도 되겠지. 크리스마스 행사 덕분에 그래도 고가는 챙겼으니 말이다. 


한 겨울의 바람 때문인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잘 열리지 않아 힘껏 밀자 띵동 카우벨 소리가 났다. 유미의 눈에 보인 것은 텅빈 메뉴판이었다. 아니다. ‘오늘의 커피’ 다섯 글자였다.


“오늘의 커피는 무슨 커피에요?”

유미가 물었다.

“그게…….”


‘콩매니저’란 이름표를 단 남자가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유미는 사장이 아니라 직원이라 답을 못하나 싶어서 그냥 무시한 채 물었다.


“믹스 커피 되나요?”

유미에게 커피는 ‘믹스 커피’였다. 맛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힘들고 지칠 때 뜨겁고 달달한 것을 위장에 넣는 느낌으로 들이키는 노동음료였다.


“마침 잘 됐네요. 주문한 원두가 아직 안와서 오늘의 커피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오늘은 믹스 커피만 가능한 날인데 잘 됐네요. 하하하하.”


원두가 없다는 게 자랑도 아닌데 웃는 이 남자는 뭔가 싶었지만 믹스 커피만 준다면야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격을 모르고 마실 수 있나 싶어서 묻기로 했다.


“그럼 얼마에요?”

“저희 카페는 후불제에요.”

후불제? 요즘 키오스크로 계산하는 시댄데 후불제라니, 싶으면서도 커피를 다 마시고 계산하면 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믹스 커피가 비싸면 얼마나 비쌀까 싶었다.   


 “커피와 천사가 나왔습니다.”

유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커피는 그렇다치고 천사?


 “저희 집 오늘의 커피는요. 천사가 같이 나와요.”

“천사요?”

“아, 이 VR 이름이 천사예요. 제가 만들었거든요. 제가 공대생인데….커피를 좋아해서…”


왜 얼마 전 자신이 속였던 은아가 떠올랐을까. 뭔가 속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 VR을 쓰라고요?”

“네네. 제가 카페에서 일하다보니 혼자 오는 손님들이 많은데 다들 핸드폰만 들여다 보는 거에요. 그래서 핸드폰 대신 우리 집에서만 볼 수 있는 VR을 만들어 보자 했어요.”


유미는 고개를 들어 콩매니저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봤다. 진지한 표정으로 보아 거짓말 같지 않았다.  

“VR엔 뭐가 있어요?”

“그게….아직 개발중입니다. 그래서 가격을 정하지 못했고요. 오늘의 커피에 끼워 팔기로 했지요.” 

유미는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만 일찍 끝나신 거죠?”

어떻게 유미의 스케줄을 알고 있나 깜짝 놀라는 순간.

“제가 이래뵈도 머리가 좀 좋아요. 그래서 동네의 차 번호와 차종을 어떻게 하다보니 외우게 되었어요. 아까 차 세우시는 거 창문으로 보였는데요. 보통 이 시간에는 가족센터에 있는 거 봤어요. 그래서 거기 직원차라고 생각했었어요.”

직원. 유미는 계약직이라 정식 직원이 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남이 보긴 직원이다. 그런데 왜 유미는 이 직원이란 말이 꼭 정직원이란 말로 들려 귀에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유미는 구태여 정식 직원이 아니라고 정확히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지 않고 VR을 껴보라는 콩매니저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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