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맞춤 중독자가 하루아침에 벌거벗게 된 이야기
코로나 시대,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생존기
옛날 옛적 호랑이는 마늘을 먹다가 동굴을 나갔지만
이 시대의 호랑이는 마늘을 먹으며 꿋꿋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여기 동굴 속에 살아가는 한 호랑이가 있다.
599일의 재택시간 동안 호랑이는 마늘을 먹고 살아오고 있다.
동굴(집)에서 어떤 마늘(라이프)을 먹으며 어떻게 살아갈까?
세상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을까?
유치원에서 배운 단어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 의.식.주
정확히 단어의 의미는 몰랐지만,
그 때 이해한 건 먹는 거 입는 거 자는 거
이렇게가 필요하다는 것.
하루아침에 동굴에 갇혀
수백일을 살아오며
먹는 건 여러 진화를 거쳐오며
그럭저럭 먹어오고 있고
자는 건 동굴에서 자면 되는데
그럼 입는 건 어떨까?
입는 마늘에 대한 이야기.
크루엘라처럼 매일 옷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바깥에 나갈 때마다 옷을 어느정도
신경 써서 입는 편이었다.
정장을 입지 않는 회사에 다녀
주로 캐주얼을 입는데, 혹자는
캐주얼이 더 많은 옷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나만의 옷 입는 포인트가 있었더니 바로 깔맞춤
깔맞춤 중독자
주위 알만한 사람은 알만큼
유난히 옷입을 때 깔을 맞춰왔다.
어느 날은 버건디로
어느 날은 다크네이비
어느 날은 시크하게 올블랙
어느 날은 옐로우로
특별히 이유랄 건 없고
그냥 깔을 맞추면 심신의 평화가 찾아온다.
이너피스.....
반대로 3색이상이 몸에 들어가게 되면
한없이 불안해지고, 심장 박동수가 높아진다.
(뇌피셜)
그래서 동굴에 손님을 맞을 때도
미리 드레스코드로 깔 가이드를 주고
다함께 맞출 정도로 깔맞춤 중독자로 살아왔었는데
오랜 시간을 동굴에서 지내는 새
이 호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살아 있을까?
잠깐 생활비로 가보자.
먹을 건 밖에서 먹나 집에서 먹나
어쨌든 먹고 살아가야 하니 계속 들어간다.
마실 건 많이 줄어든다.
밖에서 사 마실 커피, 집에서 내려먹고
밖에서 사 마실 술, 집에서 마시니깐.
그런 옷은?
일단 옷을 안 사게 된다.
집에서 입는 옷은 누구가 그렇겠지만
가장 편안한 저마다의 루틴의 옷이 있다.
정성 들여 백화점 가서, 온라인으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리뷰 하나하나 봐가며 힘겹게
집에서 입을 옷을 사진 않는다.
하지만 한번 루틴복이 되면,
재벌이든, 가난한자든, 옷이 많은 자든
자기만의 편한 라인업이 생겨난다.
본업의 특성상, 집에서 입을 편한 옷들이
한가득 주렁주렁 있었는데
마침내 이들이 빛을 발하게 된 것!
그리고 바깥세상에 등장할
깔 맞출 옷들은 더 이상 사지 않게 된다.
루틴복, 집복 중에서도 저희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펼쳐
편한 놈보다 더 편한 놈이 승리를 차지하고
그렇게 루틴의 메인 드레스로 올라선다.
집에서는 깔을 맞추지 않는다.
왜? 깔맞춤 중독 말기 마스터였는데.
나의 깔은 결국 내 이미지를 만드는
나의 브랜딩이었을까?
나의 깔은 세상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나의 방식이었던 걸까?
그 답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599일의 시간 동안
재택을 하며 동굴에서 살아오는 동안
깔맞춤으로 고민하지 않게 되어 줄어든 시간이
상당하지 않을까 한다.
나체의 발견
그럼 일할 때는?
Zoom으로 종종 미팅을 하는데
그때도 평상복 차림으로 한다.
가끔 루틴복중에 목늘어난 녀석들
일부가 있는데 그럴 때만 살짝 피하고.
(목늘어난 옷은 조그만 온라인 화면에서도 귀신같이 발각된다.)
그러다 여름이 찾아왔다.
동굴 속 여름은 어떨까?
시원할까?
덥디 덥다.
특히나 뜨거웠던 여름,
이 열기에도 바이러스는 죽지 않는지.
이전에는 여름 한낮에 날씨에 대해
크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비를 걱정하면 걱정했지.
보통 에어컨 바람이 가득한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머무니깐.
외근을 가도 파트너사 사무실에서
전력을 아끼겠다고 에어컨을 꺼놓고
함께 열심히 땀 흘리며 미팅하지는 않으니깐.
그런데 집에서 머물며
온종일 에어컨 바람을 직방으로 맞으니
어느새 냉방병이 들고,
이따금씩 몸이 으슬으슬해진다.
생각해보면 사무실은 아무리 에어컨으로 뒤덮어도
일하는 자들의 뜨거운 열기? 여러 사람의 온기로
어느 정도 희석이 되고
또 밥 먹으러 미팅하러
종종 나가며 밸런스가 맞춰지는데,
재택러가 되면서 온종일
테이블과 소파에서만 머물다 보니
냉방병이 든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대안으로 선풍기를 선택하고 나니
다 괜찮은데 루틴복이 버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체로 있을 수만은 없지 아니한가?
그럼 팬티바람으로 일상을 지내는 건?
왠지 그 선까지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
(나 이바닥 깔맞춤러야!!!!!)
그러다 발견한 것이 회사에서 득템한 짧은 바지.
밖에서 보면 핫팬츠처럼 보여 부담될 그런 녀석.
그런 짧은 바지를 입고 나니 신세계가 열린다.
이래서 뭇여성들께서 여름에 핫팬츠를 입으시는구나.
동굴 속 핫팬츠의 남자가 되어
간혹 참지 못할 무더위에 찾아올 때는
이따금씩 한 번씩 상의탈의.
딱 달라붙는 핫팬츠에 상의를 벗은 모양새를
가끔 거울로 볼 때는... 가관이다.
벌거벗은 호랑이, 그 자체.
대다수의 남성들이 스스로 거울을 볼 때
흠... 이정도면 :)
이란 생각을 한다는데,
나의 비밀스런 핫팬츠 차림은 볼 때마다
결코 적응되지 않는다.
가끔 정줄 놓고 이채로, 택배아저씨를 맞이할까
혹은 온라인 미팅에 이 모양으로 등장할까 싶어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그렇게 핫팬츠와 상탈이라는 솔루션을 찾아
냉방병과 무더위를 이기며
무더위 여름날의 동굴생활을 버텨간다.
그래도 이따금 한 번씩 동굴 밖을 나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왠지 모르게 바깥옷을 입는 게 신난다.
오늘 뭐 입지? 오랜만에 어떤 깔을 맞춰볼까?
아무래도 깔은 ... DNA안에 새겨져있나 보다.
동굴에서도 사시사철 계절이 바뀌고,
한 번씩 옷을 뒤적거리는데
지난 1년 아니 599일 간 한 번도 입지 않은
바깥 옷들이 수두룩하다.
루틴복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정상전쟁을 벌이는 동안 바깥복들은
숨죽이며 지하세계에서 잠들어 있던 것.
그리고 드는 생각.
이 옷들이 이렇게나 필요했을까?
살 때는 괜찮아 보였으나
입고 나니 정이 안 가 고이 잠든 녀석.
한두 번 입다가 어느새 순위에서 밀려
언제가 입을 잠재적 순위권에 오래 머물던 녀석.
(이런 녀석은 이후에도 실제로 입혀질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그래도 낙이 있다.
봄과 가을, 두 계절에는
세상 바깥으로 나가 아울렛을 찾는다.
딱 한벌이나 두벌 정도를 사서
이따금 세상을 나갈 때의 즐거움을 대비한다.
세상엔 다양한 재미들이 있다.
먹는 재미, 이야기하는 재미, 꾸미는 재미
그중에서 꾸미는 재미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
동굴에서의 시간들.
쓸데없이 많았던, 옷가지에 대한 고찰
바깥세상에 나갈 때 입는 즐거움에 대한 발견
이것이 599일 동굴생활을 하며 알게 된
입는 마늘에 대한 이야기.
다른 마늘들은 어떻게 먹고 살아가고 있을까?
생필품이라는 마늘
잠이라는 마늘
말이라는 마늘
커피라는 마늘
몸이라는 마늘
놀이라는 마늘
호랑이의 동굴 생존기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