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아무도 없지?
밤마다 엄마는 엄마를 찾는다
우리 집에는 홈 CCTV가 있다. 하루 종일 홀로 집에 있는 엄마가 걱정되어 달아 놓은 것이다. 하지만 바쁘게 살다 보니 cctv를 들여다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다 문득 우리 집에 홈 cctv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휴대폰으로 확인해 보았다. 볼록렌즈처럼 불룩하게 휘어져 보이는 화면에 비치는 거실 풍경이 낯설었다. 렌즈의 화면 속 거실은 유난히 휑하게 커 보였고 한 켠의 소파는 유난히 작아 보였다. 작아져 버린 소파에 더 작아져 버린 한 사람이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목석처럼 작은 미동 하나 없이.
그 작은 한 사람인 엄마의 모습이 내 가슴속에서 뜨거움으로 쌓였다.
엄마의 눈빛은 보이지 않지만 어떨지 느껴졌다. 우두커니 앉아 텔레비전 화면과 요란한 음향 사이의 공간을 헤매는 촛점없는 눈동자 속 의식과 무의식의 조각들.
그렇게 몇 분째 미동도 없이 흐르는 고요함. 아니 적막함.
새벽 4시 부근이 되면 일주일에 몇 차례는 엄마의 슬픈 외침이 모두가 잠든 집안을 울린다.
"엄마아! 엄마아!"
예민한 남편은 그 소리에 항상 먼저 깨서 나를 깨운다.
나는 허겁지겁 엄마 방으로 달려간다.
"엄마 왜 그래?"
" 왜 아무도 없노?"
"다 자기 방에서 자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아무도 없노?"
" 내가 있잖아."
"..........."
잠깐 적막 같은 정적이 흐른다.
잠시 후 엄마는 아까의 격앙된 목소리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린다.
" 들어가 자라. "
삶을 멀리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인생의 외연은 아름답고 특별하고, 찬란하다. 아니, 그렇게 보이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생명과 인간의 숭고함을 찬양한다. 하지만 인생의 속살을 열어보면 한없이 얄팍하고 애달프다. 우리는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웃고 마시고, 즐긴다. 하지만 삶의 속살이 드러나는 새벽이 되면 외로운 영혼이 몸을 일으켜 자신의 존재를 부르짖는다. 엄마를 찾으며. 나를 찾으며.
그러다 환한 아침이 밝아오면 외로운 영혼은 육체의 옷 속으로 숨어버리고 껍데기 같은 육체는 활기찬 인생을 노래하며 허우적거린다. 영혼과 분리된 채.
엄마가 밤마다 외치는 그 '엄마'가 오래전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이신 당신의 어머니인지, 당신 손자의 엄마이며 당신의 딸인 나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에 몇 번 소리쳐 부르는 그 구슬프고 절박한 외침 속 엄마는 분명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를 찾는 것일 게다. 그런 엄마에게 내가 나타나면, 엄마는 자신이 찾던 엄마가 누구였는지 혼란스러워진다.
'이 사람은 나의 엄마인가? 딸인가? 아니면 낯선 누구인가? 그럼 나의 엄마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그때 새벽잠에서 깬 것이 불만스러운 퉁퉁한 표정의 낯선 여자가 대답한다.
"모두 자고 있잖아."
순간 현실로 돌아온 엄마는 망연자실, 기억과 시간의 틈에 갇혀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혼돈의 바다에 빠진다.
그리고 외친다.
" 나는 왜 아무도 없노?"
그리고 그 외침은 몇십년뒤 내가 외칠 외침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자식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물어보겠지.
"왜 세상은 이렇게 낯선가?"
"내가 익숙했던 세상은 어디로 갔는가?"
" 나에게는 왜 아무도 없는가?"
나의 엄마와 함께 했던 익숙했던 지금 세상이 그리워 다시 아이로 돌아간 미래의 나는 떠나버린 나의 엄마와 나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새벽잠을 잃고서 거실을 서성이며 그렇게 엄마를 찾겠지. 목놓아 부르겠지. 그때 나의 앞에 누가 나타나 내 손을 어루만지며 내가 여기 있으니 편히 자라고 말해 줄까? 아니면 낯설어져 버린 세상 속에서 오로지 혼자 남아 나의 엄마를 찾으며 흐느끼게 될까?
내 삶의 끝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지금 나의 삶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지금 내 연극 무대의 주인공이 언제까지 나일까? 엄마의 연극 무대는 왜 소파 하나와 tv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은걸까? 우리는 왜 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