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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Aug 26. 2022

이번 여름 많이 더우셨나요?


 숨 막히던 올여름도 이제 한 발 물러난 느낌이다. 교사로서 이번 여름방학을 좀 더 알차게 보내고자 나름 계획을 세웠건만, 지금 돌아보면 그 성적표는 우수하지 못했다. 그 주범으로 나는 이 여름의 더위를 지목하고자 한다.  나이가 든 탓인지 이번 여름은 유독 나를 나태한 인간으로 만들어서 자괴감에 빠뜨렸다.


  이 여름이란 놈은 후끈거리는 열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는 괴물의 뜨거운 입과 같다. 그 열기의 샤워를 맞고 있노라면 도저히 이성의 끈을 잡고 있을 수 없다. 머리끝에서 수증기처럼 정신의 인자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신체는 점점 아래로 가라앉다가 결국 방바닥에 널브러진다. 멍한 눈을 한 채 드러누운 신체는 천정을 맴도는 몽롱한  이성을 붙잡으려 손을 몇 번 휘젓다가 결국은 잠들어 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진득한 땀이 몸 구석구석에서 꿈틀대면 미약하나마 이성을 되찾은 신체가 겨우 눈을 뜬다.

 그렇게 더위가 버거운 내 몸뚱이는 정신을 잡았다 놓았다 하며 텁텁한 공기 속에서 버둥대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수시로 에어컨을 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름 한낮의 열기는 덜덜거리는 에어컨의 냉기마저 무력하게 하는 나른함으로 나를 결단코 주저앉혔다.  


 그렇기에 소파와 침대, 넓은 창을 가진 집은 한낮 무더위와의 싸우기에 너무 열악한 곳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도서관으로의 도피였다. 그곳은 탁 트인 넓은 공간, 적당한 온도로 여름의 열기를 벗어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하지만 신기하다. 쾌재를 부르며 도서관에서 30분쯤 책을 읽으면 뭔가 익숙한 노곤함이 슬금슬금 내 주위를 감싼다. 그리고 책을 읽고 있는 내 어깨와 머리 위에 슬며시 내려앉는다. 그러면 당당하던 나의 어깨는 조금씩 무너지고 팔은 힘이 스르륵 빠진다. 어느새 나의 정신은 그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또 잠식당한다. 분명 내 손은 책을 쥐고 눈은 글자를 읽고 있으나, 정신은 조금씩 조금씩 부서져 가고 있다. 오수의 침범을 거부하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한 시간을 뻗대다 보면, 이렇게 졸고 있을 바에는 그냥 집에서 한숨 자는 쪽을 택하는 게 낫다 싶은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서고야 만다. 그리고 이건 엄연히 나의 잘못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외친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무더운 지방 사람들이 한낮의 잠이 필수라 한 것은 자연의 이치였던 것이야.  그걸 거스르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닌 거지.’


 그렇게 여름의 열기에 굴복한 후에는 나름 새로운 방법을 선택하였다. 정신이 맑게 깨어있는 아침 시간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최대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여름 열기가 지상으로 내려오기 전에 나의 할 일을 서둘러 마무리한다. 그리고 열기가 나의 온몸을 엄습하는 오후 시간에는 주로 휴식과 잠을 취했다.


  그래도 멀쩡한 오후를 통으로 멍한  보내는 나의 나태함을 바라봐야 하는 여름이 나는 상당히 불편하다. 이성적 인간으로서 시간을 계획적으로 쓰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교양인이며 현대인이라 믿는 나의 이성을 이처럼 쉽게 무너뜨리는 여름이 싫을  밖에 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광복절이 지나면서부터는 나라를    정신의 힘도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후로는 더위의 힘이 나의 이성을 굴복시키는 경우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나의 소중한 오후 일상을 지킬  있게  것이다.


 얼마  40도를 넘나드는 물류창고 작업장에 에어컨도 없고, 제대로  휴게시설과 휴식 시간도 없이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뉴스를 보았다. 그들 앞에서 이런 나의 더위 타령이 내심 부끄럽기도 하지, 정작 부끄러워야  사람은 누구일까? 청소 노동자, 마트 노동자, 건설 노동자들은 여름이 되면 일과 함께 더위와도 싸워야 한다. 여름의 불더위 속에서 일하는 그들에게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노동의 가치나 신성함 따위가 한낱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21세기에 이런 비인간적 환경이 가능한 이유는 뭘까? 일은  받는 것처럼 견뎌야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체는 힘들어도  속에서 기쁨도, 보람도, 자부심도 있어야 한다. 그게 없는 일은 황량한 삶일 뿐이다. 오히려 쾌적한 장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쾌적한 휴게시설이 구비되어 있곤 한다.  아이러니한 이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보는 세상에는 직업의 귀천은 을 수밖에 없.  하는 일은 달라도 작업 환경의 질은 비슷할  있도록 기꺼이 투자하는 사회가 진정한 문명사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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