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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품여자 May 30. 2021

2. 몰타 일상(2)

2-10. 최고의 휴식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조식을 건너뛰고 아점으로 라바게트 집 샐러드를 사 먹었다. 저녁형 인간인 나는 아침잠이 많다. 신청해 둔 조식은 이미 물린 지 오래라 가볍게 패스다.(돈이 너무 아까웠지만 달콤한 아침잠과 바꿨으니 그러려니 한다.) 이렇게 돼버린 이유는 영어학원을 1대1 과외형으로 바꾸면서 수업이 오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에 굳이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자 나는 금세 내 생활의 패턴대로 저녁형 인간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늘어지게 실컷 자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하루 종일 기분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샐러드에 커피나 주스를 한잔 곁들이며 읽는 인터넷 기사들은 여유로운 나만의 '아침'을 더욱더 풍성하게 해 준다. 그렇게 느릿느릿 아점을 다 먹으면 어느새 밖은 한낮의 더위가 시작된다.


필요한 먹을거리들을 사러 숙소 앞 마켓에 갔다. 가는 길에 현금도 뽑는다.(혹시 모를 상황에 현금을 조금씩 가지고 다녔다.) 현금 지급기도 처음 사용할 땐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혹시 기계가 내 카드를 먹어버리는 건 아닌지, 영어를 잘못 해석해서 이상하게 돈이 나오는 건 아닌지 등등. 그래도 여태껏 큰 실수 하지 않고 돈을 잘 뽑았다.


간식과 음료수를 소량 사서 숙소에 온다. 그리고 학원에 갈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골목길을 따라 요리조리 난 지름길을 쭉 따라가 보면 학원에 빨리 갈 수 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학원 분위기에 긴장하지 않고 교실에 입성! 선생님과 함께 즐겁게 대화한다. 영어로 말하는 것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여전히 내가 쓰는 단어는 수능 영어 그 이상을 넘지 못했지만 제스처와 단어, 간단한 문장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참 재미있었다. 영어가 주는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기분이랄까.


내가 사랑한 몰타 앞바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지름길이 아닌 바다를 보며 천천히 가기로 했다. 몰타 앞바다는 여전히 아름답다. 실컷 눈에 담아본다. 거리에는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있고, 노천카페에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가득하다. 출출하다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식당들은 브레이크 타임이라 문을 닫았다.


'그래... 여행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돈을 아껴야지. 좀 있다 저녁을 잘 먹어보자.'


세끼를 다 사 먹기엔 시간도 애매하고 돈도 많이 들어 매일 이렇게 두 끼만 챙겨 먹게 된다. 숙소로 돌아오니 이제는 내 집같이 편안한 방이 나를 반긴다. 간식거리를 입에 물고 텐션이 업되는 저녁을 뭐하면서 보낼지 고민해본다. 이것저것 검색도 해본다. 몰타에 토끼고기 요리가 유명하다 들었던 것 같아서 그걸 먹어볼까 하여 세인트 줄리앙으로 가기로 했다.


음악을 들으며 해안길을 따라가는 길이 참 예쁘다.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런 여유로운 일상이 참 행복하다. 하지만 이곳에 온 지 3주가 훌쩍 넘어가면서 여러 장소가 익숙해지자 처음 느꼈던 긴장 서린 행복감과 기대감에서 평범한 일상의 안정된 행복감으로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한참을 걸으니 해가 조금씩 지고 있다. 가로등 불빛도 켜지고 식당들도 저녁 영업을 시작했다. 저 멀리 노을에 반사된 라임색 건물들은 점차 황금색이 되어갔다.


토끼 고기 요리를 먹으러 어딜 들어갈까 하다 어느 카페에 토끼 라비올리 메뉴가 있기에 들어가 보았다.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처음엔 이걸 먹어도 되나 싶었는데 기왕 몰타에 온 거 도전은 해보고 싶었다.)


짜잔~ 드디어 나온 음식! 비주얼은 합격이다. 포크로 찍어 한입 먹어본다.


'오호. 생각보다 맛있는데?'


맛은 닭고기와 비슷한데 더 쫄깃쫄깃하고 맛있다. 하지만 토끼 고기라고 생각하니 자주는 못 먹겠다 싶었다.(갑자기 소, 돼지, 닭, 오리에게 미안해졌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가로등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났고, 밤바다는 불빛에 환히 빛나는 건물들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다. 해가 없는 밤은 꽤 쌀쌀했다. 미리 준비해 온 옷을 두툼하게 입고 고요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가끔씩 들려오는 잔잔한 파도소리 말고는 들리는 소리가 없다. 세상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 한참을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제법 쌀쌀한 날씨에 몸이 언 것 같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개운하다. 오늘도 여지없이 가계부를 정리하고 다음 여행지를 위해 폭풍 검색을 한다. 그리고 가고 싶은 나라와 도시를 정하고, 비행기 티켓과 기차 예약을 한다. 숙소 검색해본다. 물가가 비싼 서유럽 쪽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한인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를 이용하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물가가 좀 저렴하니 별 3개짜리 호텔을 이용해서 푹 쉴 생각이다.


이것저것 검색하고 예약하니 많이 진행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벽 2시다. 더 알아볼까 하다 내일을 위해 자기로 했다. 가만히 누워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더없이 만족스럽다. 한국에서 백수가 되었을 때 이렇게 생활했었는데... 그런데 그땐 몸은 편하나 마음이 불편해서 쉽사리 잠을 잘 이루지 못했었다. 어서 빨리 취업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이 곳 몰타에서는 이렇게 생활하는 게 너무나 편안하고 즐겁기만 하다.


하지만 나중엔 이런 생활이 좀 지루해졌는데 그땐 나의 몰타 한 달 살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동생들이 몰타는 한 달만 살면 딱 좋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만약 몰타에 한 달 더 있었다면 학원도 땡땡이치고(실제로 학원 가기 싫은 날도 더러 있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자고, 먹고 싶을 때만 먹는 등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겐 푹 쉬는 것도 한 달이 넘어가면 그저 게으른 일상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시간들이었다. 몰타를 한 달만 있는 게 내겐 정말 다행스러웠다.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 기분도 좋은데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휴대폰 인터넷을 이것저것 보며 노닥거리니 참 즐거웠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내일도 늦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없이 행복하게 해 주었다. 아이 좋아라!(아직 어린 두 아이 덕분에 지금은 밤에 통잠 4시간을 자보는 게 소원이다. 그날은 언제쯤 올까? 아니 오긴 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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