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과 한국관을 보고서...
아티스트가 작품을 구상할 때 작품이 놓이게 되는 상황까지 고려하게 되는 경우는 많이 없다. 특히 회화 작업을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전시를 염두에 두고 작품 여러점을 동시에 완성하는 개인전의 경우에는 전시 환경까지 고려할 수 있고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네의 '수련'연작 같은 경우가 전형적이다. 모네는 오랑주리 미술관의 구조, 낮에 미술관을 비치는 빛의 변화, 예상되는 관객의 동선 등을 관찰하고 예단하기 위해 지베르니와 파리를 몇 번이나 왕복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다고 한다. 사실 아티스트가 개인전을 열 정도로 유명해야 하며, 개인전에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려는 아티스트의 의지도 반영되어야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다. 유럽 지방 소도시에서 나오는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공고(오픈 콜)에 지원하는 경우에도 아티스트는 작품이 놓일 상황까지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프랑스 옥시타니 지방의 어느 소도시에서 도시 환경에 어울리는 작품을 새로 할 아티스트를 찾는 경우가 그렇다. 공고가 나면 아티스트는 소도시의 역사, 문화, 환경, 주민 등을 공부하여 도시가 처한 맥락에 맞는, 환경과 어우러지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지원하는 식이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방식의 인시튜 작업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 중 하나는 각 나라들이 자신들이 뽑은 아티스트(꼭 그 나라의 국적일 필요는 없다)를 자기 국가관에 전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뽑힌 아티스트는 한 명일수도 있고 여러명일 수도 있다. 물론 큐레이터가 따로 있지만 국가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국가관을 대표하는 아티스트이다. 선정된 큐레이터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지 않은 이상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건 아티스트이며 전시되는 작품 또한 아티스트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국가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이상 나라별 뽑힌 아티스트는 작업을 할 때 다른 국가관의 작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물론 다른 국가관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경우 인사도 하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큰 행사에 상대의 작업을 보고 내 작업을 바꾸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을까?
베니스 비엔날레의 경우 국가관은 두 종류로 구별할 수 있다. 곧 소개하려는 일본관이나 한국관처럼 비엔날레의 주 전시가 열리는 큰 두 공간(지아르디니, 아르세날레) 안에 여러 국가관이 몰려있는 경우가 있다. 그 중 지아르디니에 있는 국가관들과 아르세날레의 몇 국가관(이탈리아, 중국 등)은 예외적인 상황이 있지 않은 이상(2024년 비엔날레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관은 아예 전시를 할 수 없었으며, 이스라엘관은 전시를 했지만 폐관했다.) 매번 참가하는 국가들이다. 이들 국가관 건물에는 각 국가 이름이 적혀있을 정도이다. 소위 말하는 강대국이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나라들이 많다. 그 밖에 다른 국가관들은 아르세날레 내부, 혹은 베니스 시내 여기저기에 자리를 마련한다. 매번 참석하는 나라들도 있지만 참석이 불규칙한 나라들도 더러 있으며, 그 나라를 위해 정해진 건물이나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매번 참석하는 나라일지라도 전시 장소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순수하게 관객, 그러니까 비엔날레만을 보러 온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두 번째 종류 중 베니스 시내에 산재한 국가관들을 방문할 때는 한 국가관만을 다소 독립적으로 볼 수 있다. 국가관들이 한 장소에 몰려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띄엄띄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관객은 한 국가관을 방문하고 몇 십분 후에 다른 국가관을 방문하고 하는 식이다. 물론 비엔날레 주전시 주제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가 많은 국가관 전시를 관통하지만 그래도 국가관 전시 자체는 독립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지아르디니, 아르세날레의 국가관들의 전시는 다르다. 한 국가관을 갔다가 일분 걸어가면 다른 국가관이 나오고 또 몇분 걸어가면 다른 국가관이 나오는 식이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만에 아르세날레의 모든 국가관을 다 볼수도 있다. 관객이 바로 앞에서 본 국가관의 전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새로운 국가관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일종의 잔상이라고 해야할까? 때로는 방금 본 전시의 잔상이 지금 보고 있는 전시를 압도하기도 한다. 여러 와인을 시음할때, 그래서 한 와인을 맛 본 후 다른 와인을 맛 볼 때 새로운 와인을 정확히 맛보기 위해 물로 입을 헹구는 걸 본적이 있다. 혹은 향수 전문가들이 여러 향을 시향 할때 방금 맡은 향의 여운(잔향)을 없애기 위해 커피 냄새를 맡는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전시는 다르다. 어떤 관객이 한 전시를 보고 다음 전시를 보기까지, 혹은 한 작업을 보고 다음 작업을 보기 전에 눈을 씻을까 ?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린버그 생애 당시와 지금의 미술계는 패러다임이 다르다.) 만일 감각적인 작업보다는 개념적인 작업이 계속 전시되는 경우에는 마음의 눈을 씻어야 하는 것일까 ? 사실 두 국가관의 전시 방식이 아예 다르면 오히려 상관없다. 문제는 전시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질 때이다. 이번 한국관의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 한국관은 지아르디니안에 있어 매 비엔날레때마다 동일한 장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를 선보인다. 올해는 구정아 작가가 선정되었다. 작가는 공고를 통해 모은 한국의 향으로 작업을 할 거라고 미리 이야기를 한 바 있다. 현대 미술이 시각 이외의 감각에도 열려 있다고는 하지만 촉각(운동 감각), 청각 외에 다른 감각을 찾긴 힘들다. 간혹 관객이 참여해서 먹는 작업(예를 들면 티라바냐)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미각'에 호소하거나 '맛'이 중요한 작업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후각' 자체도 현대 미술에서는 많이 사용하지 않는 감각이다. '시각'은 언제나 (서양)미술사, 사상사를 이끌어 온 주된 감각이었고, '촉각'은 관객의 참여라는 문제의식과 더불어 미술의 틀안으로 들어왔다. '청각'또한 '비디오 아트'의 시작과 '시각' 중심, 즉 '지식'중심의 서양 사상사에 대한 반성에서 현대 미술이라는 틀 안으로 들어왔다면, '청각'만큼 아니 그 보다 더 동물적인 감각인 '후각'은 현대 미술에서는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다. 그 '후각'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얼마 안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바로 구정아이며 이번 비엔날레 한국관에서도 '후각'을 주제로, 그것도 '한국'의 '향기'를 주제로 하겠다니 여러가지 호기심과 기대가 생겼다.
지아르디니 내부에서 한국관은 일본관 바로 옆에 있다. 일본관이 지아르디니 큰 길의 말끈한 건물에 위치해있다면 한국관은 일본관 안쪽에 있다. 부주의한 사람은 한국관을 못 보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대부분의 방문객은 하나라도 더 보려고 지도를 들고 다니기에 실제로 한국관을 못보고 지나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이 공간은 원래 화장실로 쓰이던 곳이었다. 한국관은 1995년 지아르디니에 마지막으로 생긴 국가관으로 한국측은 이 공간도 겨우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엄밀히 말하면 공간이 처한 상황이 한국관의 역사에 대해 어느정도 알려주는 셈이다.
방문객은 러시아관건물(일본관 바로 옆)에서 열리는 볼리비아관 혹은 북유럽관(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가 모여서 만든 전시관 - 일본관 맞은 편)을 방문한 뒤 일본관으로 들어간다. 볼리비아관은 국가,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전시했고, 노르딕 관에서는 세 나라의 아티스트들의 거대한 설치 작업이 관객을 맞이했다. 두 국가관후에 맞이한 일본관에서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가 관객을 맞이한다. 몰입을 강요하는 거대한 설치작업 혹은 도덕적인 마음을 가져야할 것 같은 국가 정체성을 나타내는 작업을 보고 들어간 일본관은 화려하지만 피곤하지 않은, 그럼에도 시각, 청각, 후각 그리고 지성마저 충족시키는 작업으로 가득 차 있다. 일본관은 화려하게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코 모리라는 아티스트의 작업을 소개한다. 한번쯤은 겪었거나, 목격했을 법한 '누수'를 주제로 한 작업(누수)와 과일에 전극을 꽂은 작업인 '분해'(Decomposition)가 우선 시각적으로 특이한 느낌을 준다. 익숙한 사물들이 특이한 방식으로 조합되어 무언가 낯익으면서도 어색한 형태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수'에서 들리는 기계음은 관객들이 모여내는 웅성거림과 섞여 신선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분해'때문에 전시관 안에는 아주 옅지만 달콤한 과일향이 가득차있다. 시각, 청각, 후각의 경험은 하나씩 봤을때는 엄청 강하진 않지만 각 감각이 뒤섞여 독특한 경험을 만들어내어 일본관 자체가 말 그대로 다른 세상과는 격리된 공간인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런 미적 경험은 일본관 건물 중앙에 나 있는 건물에서 중단된다. 건물 중앙에는 커다란 구멍, 우물같은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에 기대어 보면 건물 지하가 보인다. 건물 자체는 지아르디니 중앙 길보다 한 층정도 높이 있으며, 건물 지하는 외부 공간과 연결이 되어 있어, 건물 지하가 지아르드니 큰 길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여하튼 이 건물 중앙 구멍에는 수직으로, 건물을 따라 건물 지하까지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전구가 설치되어 있다. 일 종의 인시튜 작업이다. (이 전구는 외부에서도 보이고 내부에서도 우물 구멍같은 큰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다.) 이윽고 텍스트를 읽어본 관객은 깜빡이는 전구도 '분해'작업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되고, 다시 한 번 돌아 '분해'전시를 관찰하게 된다. 경험은 순진한 감각 놀이를 넘어 스스로 발전하게 되는 셈이다.
일본관을 나와 한국관으로 들어가면 익살스러운 만화 캐릭터 모형같은 것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게 뭐지?' '팝아트 같은 건가?' 하고 돌아다니다 보면 조각의 코부분에서 연기가 나온다. 내가 한국관을 들어갔을때는 구정아 작가가 '향기'로 작업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향'이 어디있는지 찾아다니다가 도저히 못찾겠어서 다시 나왔다. 모든 전시를 다 본 후 지아르디니를 나가기 전 일본관을 한 번 더 들렀다가 나가는 길에 우연히 한국관의 모형 코에서 연기가 나오는 걸 보고 다시 한국관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하지만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아서 연기에 코를 대고 있었는데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다른 외국인 관객도 코를 대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동료 관객(?)이 나를 보며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처음 일본관을 나온 순간부터 한국관으로 들어와서 나가기까지의 느낌을 더 자세히 반추해보겠다. 일본관에서의 시원, 상큼한 느낌을 한껏 담고 한국관에 들어오면 친숙한 느낌의 모형이 도약을 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처음 봤을 때 놀라운 건 작품 설명앞에 있는 사람들의 수와 전시관에 있는 사람들의 수의 불균형이다. 이 불균형 자체가 놀라운 건 아니다. 관객들은 생각보다 너무 친절해서 어떻게든 아티스트의 의도를 이해하고자 하며 그게 안되면 설명서(?)라도 보고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한국관의 이 불균형은 너무 심했다. 전시관 안에 있던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한 명밖에 없었던 반면 전시 설명 앞에는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있었다. 두번째로 놀라운 건 일본관과 한국관에서 느끼는 긴장도의 대비감이다. 일본관에서는 감각적인 유희와 지적인 긴장도가 적절히 섞여있었다면 한국관에서는 감각적인 유희는 전혀 없고, 그런 이유로 지적 긴장감만 감돈다. 이윽고 작품 설명을 읽어 보니 으례 그렇든 추상적이며 작품 설명과 작업 사이의 괴리가 너무 심하게 느껴진다. 나야 한국 사람이니 작품 설명을 읽고 다시 한 번 들어가봤고 설명에 나온 놓친 부분을 다시 한 번 보려 노력했지만 비엔날레에 오는 사람들은 바쁜 사람들이 많다. 설명부터 읽고 대충보고 가는 사람도 있고, 대충 본 다음 설명보고 그냥 나가는 사람도 있고, 대충 보고 마음에 들면 다시 보는 사람도 있고, 너무 좋아서 나중에 다시 한 번 들르는 사람도 있다. 일본관 전시 설명이 다시 한 번 작업을 볼 수 있도록 유도했다면 그건 전시 작품 자체의 감각적인 유희가 너무 즐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일본관 전시에서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설명을 읽는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
앞에서는 시각부터 묘사했지만 일본관을 처음 들어갔을 때 다른 어떤 감각보다 강하게 날 맞이한 건 은은한 과일향이었다. 사실 미각을 제외하면 후각보다 더 직접적인 건 없을 것같다.(하물며 미각도 많은 부분을 후각에 의존한다.) 일본관에서 보이고 들리는 건 냄새보다 뒤에 전달될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관에서도 '향'을 주제로 하는 작업을 한다는 걸 알고 았는데 거기서 아무런 냄새도 맡아지지 않았으니... 한국관의 전시가 실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갔을 때 우연히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원래 작업이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일시적으로 기술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이며(전적으로 '개념'적인 작업이 아닌 이상 미술의 꽃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아이디어의 물리적 완수이지 않은가?) 원래 작업이 그랬다고 했으면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구현하려 했던 '향'이 기술 문제때문에 재현하지 못했던, 그래서 내가 못 맡았던 향이었다면 ? 그 향이 어떤 것일지 전시 설명만 읽고는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랬다면 일본관에서 느낀 인상을 덥어버릴만큼 강한 작업이 될 수 있었을까 ? 사실 어떤 향이 그 정도의 향이 될 수 있을지 전혀 상상되지 않는다. 그만큼 일본관의 작업은 너무 강렬했으며 그래서 한국관 전시의 빈약성은 더 크게 다가오며 반대로 그만큼 일본관 전시는 더 강렬하게 각인된다.
물론 누군가는 취향의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취향과는 별도로 어떤 작품을 언제, 어디서 봤냐하는 문제는 관객의 감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관객의 이런 입장때문에 큐레이팅이라는 기술(!)의 방법론도 계속 제기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네는 현대 미술의 선구자이다!!! 모네는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본 것들을 기억한 다음 지베르니로 돌아와 그 큰 수련 그림을 바퀴달린 수레위에 끌고 다니며 위치에 따라 바뀌는 느낌을 시험했다고 한다.) 물론 비엔날레 국가관 전시같은 경우는 이런 관객의 동선을 다 신경쓸 수 없다. 국가관 자체는 국가별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국가관을 가로지르는 큐레이팅도 있을 수 없다. 게다가 관객들도 국가관이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각 전시를 따로 감상하려한다는 점에서 앞에 했던 분석은 사실 어느 정도 인위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관객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앞 국가관들의 전시를 뒤섞지 않으려 노력한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현대미술 올림픽이라고도 불린다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순위를 매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건, 그래서 각 국가를 비교, 대조하는 게 목표가 아니란 건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앞 전시의 인상은 계속 남아있으며 이 인상이 지금 전시관 전시를 감상, 평가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런 건 국가관 전시를 진행하는 큐레이터나 작업을 선보이는 아티스트에게는 단점일 수도 있지만, 글쎄...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다. 물론 대부분의 관객은 어떻게든 아티스트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그 의도에 동감하거나 의도대로 이해, 해석하고 행동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좋은 작업인지 그냥 그런 작업인지 판단하려고 하고, 때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때로는 아티스트, 큐레이터의 권위를 넘어 비판적 자세를 취하려고도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전시가 굳이 다양한 해석에 열려있지 않거나 그 형식이 독립적이라고 해도 전시 기획자의 의도를 찾지 않고 여러 전시로 자신만의 도정을 구축하는 것도 관객이 가진 멋진 권리이자 항상 포기하지 않아야 할, 그래서 때로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적 감상을 만들어내는 계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