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의 시작
어린 시절부터 동물과 식물을 키우고 관찰하는 것을 즐겼다. 그중 새에 꽂혔고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꿈은 조류학자가 됐다. 조류학자는 우리가 아는 그 비둘기와 닭을 포함한 새를 연구하는 과학자이다. 현시대에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박사학위가 필수적이다. 물론 학위가 없어도 연구는 할 수 있지만, 연구비 신청에 제약을 받으며, 동료과학자와의 협업도 더 어려워질 수 있는 등의 문제가 있다. 학위는 그 사람의 연구 능력을 어느 정도 검증해 주는 셈이다. 그렇기에 고등학생 때부터 공부가 길어질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했다. 대학 전공은 생명과학으로 골랐다. 조류학과 혹은 동물학과가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학과는 없었다. 있더라도 수요가 적어서 망했을 것이다.
대학의 생명과학과에서는 조류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주로 배우는 것은 최신 생물학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분자생물학, 유전학, 미생물학 등이었다. 제약회사를 포함한 다양한 생물전공자를 뽑는 회사들이 요구하는 전공과목으로, 해당 과목들이 커리큘럼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있더라도 야생동물 전체를 다룬다면 가능하겠지만 조류학만을 가르치는 수업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해 사라질 것이 뻔했다. 어차피 졸업 후에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기에 학부생 시절부터 일찍이 새들에 대해 공부하고자 했다.
대학의 교수님들은 연구실을 갖고 있다. 연구실에는 대학원생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지도교수님의 지도 아래 연구를 진행한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대학생들은 사전에 교수님께 연락을 하여 연구실 “인턴”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인턴 과정을 통해 해당 연구분야와 잘 맞는지 혹은 교수님의 지도방향성이 자신의 이상향과 맞는지 등을 판단하게 된다. 교수님 역시 대학원생을 뽑기 전에 그 학생이 연구실과 맞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동물의 행동생태와 진화를 연구하는 한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생 시절 과학전람회에 참가했다. 남해안에 도래하는 알락꼬리마도요의 먹이 찾기 행동이 연구 주제였다. 이 새는 봄가을 갯벌에서 볼 수 있는 나그네새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도요새들 중 가장 덩치가 크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물이며, 국제적으로도 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에서 발간하는 멸종위기종 리스트, Red List of Threatened Species에 등록돼 있는 조류이다. 나의 고향인 경상남도 남해군의 갯벌에도 봄가을에 적은 수의 알락꼬리마도요가 갯벌에서 사냥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멸종위기종이라는 점과 덩치가 커서 쉽게 눈에 들어온다는 장점을 고려하여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고등학생의 수준에서 그들의 생태를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일단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차도 몰랐다. 며칠을 고민했지만 딱히 정답이다 할 것은 떠오르지 않았고 평소에 잘하는 관찰부터 해보기로 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카메라와 쌍안경이 연구 장비의 전부였지만 그들을 관찰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기록양식지도 만들었다. 사전에 기록할 내용을 세분화하여 정해두면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더 많은 정보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알락꼬리마도요 무리는 예상일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점차 흘러가고 주제를 바꿔야 하는 고민이 드는 찰나에 도착했고 부랴부랴 관찰을 시작했다.
관학전람회 주요 발표 주제는 생각보다 금방 정할 수 있었다. 야생동물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먹이를 찾고 먹는데 소비한다. 최적으로 먹이를 찾고 먹어야 생존에 유리하기에 다양한 적응 행동을 보인다. 알락꼬리마도요의 경우에는 게를 주요 먹이로 삼는다. 부리를 갯벌에 넣고 빼면서 게를 찾아 먹는다. 그렇게 잡은 게를 바로 먹을 때도 있고 다리를 제거한 후에 먹을 때도 있었다. 며칠 관찰해 보니 다리 제거 여부는 게의 크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번에 삼킬 수 있는 작은 게는 손질 없이 삼켰다. 한 번에 삼키기 어려운 게를 잡은 경우 알락꼬리마도요를 관절을 잡고 흔들어 게의 다리를 몸통에서 제거한 다음 몸통을 삼켰다. 이 단계의 게들은 그 크기가 다양했는데, 알락꼬리마도요는 상대적으로 큰 크기 게는 몸통을 먹은 다음 잘랐던 다리도 찾아서 먹었고 충분히 크지 않은 게 들의 잘린 다리는 무시하고 계속 사냥을 이어갔다. 이를 최적화 먹이 찾기 이론 (optimal foraging theory)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크지 않은 게의 잘린 다리를 다시 주워서 먹기보다는 새로운 게를 찾는 것이 더 지출 에너지 대비 얻는 에너지 측면에서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적응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었다.
위 결과를 매우 단순하게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단 개체차이가 존재한다. 나와 내 친구의 행동이 양상이 같지 않듯이 동물에서도 차이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체별로 경험이나 몸의 크기 차이로 삼킬 수 있는 게의 크기가 다를 수 있는데 게의 몸통을 잘 돌려서 삼키는 개체는 다른 개체들보다 더 큰 게도 충분히 삼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개체별 성격 (personality)에 따라 행동 양상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무리와 떨어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멀리 먹이를 구하러 가는 개체는 먹이가 더 풍부한 장소에 노출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 잘린 다리를 다른 개체들보다 더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개체 안에서도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먹이를 손질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떠한 이유로 서식지 내 먹이가 귀해진다면 잘린 다리를 다 먹는 것이 생존에 적합한 행동일 것이다. 이렇게 환경의 변화에 따라 행동을 변화하는 “행동 가소성 (behavior plasticity)”은 많이 연구가 돼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결과를 과학전람회에서 발표했다. 내용을 정리한 대형포스터를 미리 발표 장소에 붙여야 했기에 발표자들은 심사위원들보다 일찍이 전람회장에 도착해야 했다. 발표 전,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 학생이 있었는데 묘하게 신난 표정이었다. 그 학생은 본인도 새를 좋아하는데 새 관련 포스터가 보여서 궁금하여 왔다고 했고, 동지를 만나자 나 역시 신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표가 끝나고 얼마 뒤에 그 동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남대학교에서 한 NGO가 넓적부리도요의 보전과 관련하여 세미나를 개최한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동지는 그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 사람의 페이스북 계정을 알려줬고 나는 그분께 연락해 참석여부를 허락받았다. 덕분에 나는 과학자들과 촬영 전문가들이 모이는 세미나에 갈 수 있었고 이는 고등학생 시절에 얻기 힘든 소중한 경험이었다.
세미나 이후에 해당 단체의 모임에 참가하여 같이 새를 보면서 회원들과 친분을 쌓았다. 새라는 공통 주제가 있어서 쉽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나에게 세미나 참석여부를 알려주신 분으로 대학생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 대학생형은 대학원생형이 됐다. 대학교 1학년의 봄을 만끽하던 나에게 형은 연구실에 한 번 놀러 오라고 하면서 본인의 지도교수님에 대해 알려주었다. 동물의 행동생태와 진화를 연구하시는 과학자로 주로 새와 곤충이 연구 대상이라고 했다. 새를 공부하고 싶었던 나는 크게 마음이 흔들렸고 그 교수님께 연구실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연구에 대해 배우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흥미를 가져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수락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첫 대학 방학에 연구실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