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석회 물을 처음 체험한 날
낡은 빗자루처럼 엉켜버린 내 머리카락
우리 집에서 10~15분 정도를 걸어가면 뮌헨의 젖줄인 이자르강(Isar)이 나온다. 코로나 봉쇄로 피트니스 센터를 갈 수 없어서 하루 1만 보 걷기를 목표로 산책을 시작했다 눈이 쌓인 겨울엔 정해진 산책코스로만 다니다가 날씨가 풀리고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부터 강가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에메랄드 빛의 강물, 이쁜 강물 색은 내가 외국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시켜주기도 한다. 사람도 별로 없고 경치도 좋은 이곳이 집 근처에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힐링이 저절로 되는 곳이다. 그러나 6년 전 뮌헨으로 이사 온 그해에,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강물의 정체를 알고 나서 받은 충격이란....
유럽의 석회 물
유럽의 물은 석회 물이어서 영국의 경우는 차(tea) 문화가, 독일은 맥주가 발달하였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왔다. 말로만 들었을 땐 석회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독일도 여행을 많이 왔지만, 물은 늘 사 먹었고 물 때문에 특별히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사 와서 처음 석회 물을 경험하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찰랑찰랑 윤기 나는 머릿결을 탐할 것이다. 난 비단결 머리 소유자는 아니지만 컨디셔너(린스)를 사용했을 때만큼은 비단결 머리를 가졌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샴푸 후 컨디셔너를 사용했을 때 머릿결이 부드러워지면서 손가락이 그 속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느낌은 정말 좋다. 행복 그 자체이다.
이사 후 처음 머리를 감은 날이었다. 처음 샴푸질에 머릿결이 뻑뻑해지면서 마구 엉켜 있는 게 꼭 낡은 플라스틱 빗자루 같았다. 컨디셔너를 사용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큰 효과가 없었다. 머릿결에 좋다고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가 받은 충격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모든 게 석회 물이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집에 연수기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석회를 100% 걸러 주진 못하는 듯했다. 제대로 작동은 되는지, 고장나진 않았는지 전문가를 불러 몇 번을 체크했는지 모른다.
며칠 후 애들 학교의 한국 엄마 모임에서 석회 물이 원인이라는 확답을 받았다. 그러면서 저마다의 경험담과 주의사항을 하나씩 내놓았다. 5년째 사는 한 엄마는 자기 피부가 엄청나게 건조해졌다고 했다. 성악을 하는 엄마는 수돗물을 마실 수는 있지만, 목에 뭔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있을 거라고도 했다. 하지정맥의 원인이 된다고도 했다. 한국 모임의 대표를 맡은 엄마는 가전제품 등 기계 고장의 원인이 되니 수시로 칼크 제거제를 사용해서 제거해 줘야 한다고도 했다. 모임 후 나를 데리고 브리타 정수기 쇼핑까지 도와줬다. 2개 구입해서 집으로 왔다. 독일 와서 주부습진 같은 게 생겼었는데, 난 안 하던 살림을 해서 그런가 했더니 그것 또한 석회 물이 원인이었나 보다. 라텍스 고무장갑도 골라줬다. 세탁기, 식기세척기, 커피머신은 정기적으로 석회(칼크 Kalk)를 제거해줘야 한다며 적합한 세제 구매법도 알려줬다.
3년 전엔 수도꼭지도 어느 순간 석회 때문에 막히는데 이땐 식초물에 수도꼭지를 하룻밤 정도 담가 두면 석회가 제거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의 정체
우리보다 한 달 정도 뮌헨에 먼저 도착한 남편이 멋진 장소를 발견했다며 드라이브 겸 피크닉을 가자고 했다. 가는 길에 샌드위치도 사서 가서 피크닉도 즐기자고 했다. 남편은 이삿짐 받는 일과 처리해야 할 서류 작업등으로 우리보다 한 달 정도 먼저 뮌헨에 왔었다. 침대도 없이 바닥에 침낭을 깔고 넓은 집에서 혼자 잤는데, 출장 때 편한 호텔에서 잘 때랑 달리 가족들도 보고 싶고 쓸쓸했었나 보다. 그럴 때마다 차를 몰고 근교로 드라이브하러 다녔는데, 그때 이 멋진 곳을 발견하고 꼭 우리를 데려오고 싶었다고 했다. 화창하게 맑은 여름 날씨가 드라이브하기 딱 좋아서 차에 타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30~4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이자르강의 상류지역으로 알프스와 더 가까운 곳이었다. 개인 소유의 땅이라서 5유로라는 비싼 통행세를 내야 했다. 이 땅 소유자는 통행료만으로도 돈을 꽤 벌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돈 버는 목적보다는 차량이나 오토바이의 잦은 출입으로 환경이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함일 거란 생각도 들었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강가의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눈앞에 잔잔히 흐르는 에메랄드빛 강줄기, 간간히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온 샌드위치를 먹고 있자니 참으로 평화로웠다. 주변 풍경도 멋졌고 유럽에 와있다는 느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은 아이들이 물에 살짝 발을 담가도 되냐고 물었다. 이렇게 이쁜 에메랄드 빛깔의 물엔 나도 발을 담가보고 싶었다.
허걱!!
강물에 시멘트 푼 거야?
강바닥에 깔린 게 모래도 자갈도 아녔다. 시멘트 가루처럼 감촉이 부드러웠다. 발에 닿는 감촉이 좋기는 했지만 색다른 느낌이라 이상하기도 했다. 발을 이동할 때마다 뿌연 가루가 폴폴 일어나더니 물과 섞인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석회가루인가? 이렇게 심했던 거야? 이 물을 우리가 마시는 거라고? 이 물을 우리가 씻고 마신다고 생각하니 정말 충격이었다. 에메랄드 색도 이 석회 때문이었다. 이 물을 우리가 식수로 사용하는 거구나 싶으니 더 이상 에메랄드 빛 물이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강물을 식수로 사용하진 않는다. 강물이 지하로 침수되는 과정에 여과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한다고 했다. 수돗물 관리도 엄격해서 안심하고 마셔도 된다고 했다. 물론 여기엔 관리가 잘된 수도관에서 나온 수돗물이란 전제가 붙는다. 대신 물을 끓이면 맛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12개월 이하의 아기들에겐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강변 여과수( 지하수)라 소독약 맛도 안 나지만 차게 해서 마시거나 탄산을 넣어서 마시면 맛있다.
내가 다니는 피트니스 센터엔 정수기가 있다. 그런데 요가나 줌바 수업을 하는 방이 있는 지하엔 정수기가 없다. 수업 중 휴식시간에 화장실로 뛰어가서 수돗물을 받아오는 독일 사람들이 많다. 친구네 집에 가도 수돗물을 주는 경우가 많다. 독일 수돗물에 대한 한국인과 독일인의 반응은 판이하다. 독일인은 왜 몸에 좋은 미네랄, 칼슘, 마그네슘을 걸러내고 마시냐고 의아해한다. 오히려 브리타 정수기를 사용할 때 필터를 제때 교환하지 않으면 세균이 더 많이 살 수가 있다고 했다. 의사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석회 물이 하지정맥의 원인도 아니며, 오래 마신다고 코끼리 발목처럼 굵어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하긴 한의학에서도 정수된 물이나 끓인 물은 죽은 물이라고 했다.
독일 수돗물은 안전하지만 피부와 머릿결엔 안 좋다고 했다
내 피부가 심하게 건조해진 게 석회 물이 원인이었나 보다. 너무 무심했었던 거 같다. 첫 몇 해까진 피부 건조는 느끼질 못했다(내가 좀 둔해서 그런 거 같다) 뮌헨 온 지 3년 정도 지나니 내 피부가 심하게 건성으로 변했다. 난 피부가 좋은 편이었는데, 겨울만 되면 건성으로 변해 간지럽기 시작했다.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긁고 나면 심하게 아프고 흉터가 생겼다. 웬만한 바디 크림으론 해결도 되지 않았지만 석회 물이 원인이란 생각을 하진 못했다. 건조한 이곳 날씨 탓으로 돌렸었는데 석회 물 때문이라고 했다. 피부를 건성으로 만들기 때문에 바디크림을 듬뿍 발라 줘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독일의 보습제가 발달이 되었나 보다. 진작에 신경을 좀 쓸걸 그랬다. 지금부터라도 원인을 알았으니 열심히 관리해볼까 한다. 얼마 전부터 샤워 후엔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대신 바디오일을 발라서 수분을 잡아준 후에 바디로션을 바르기 시작했더니 한결 나아지긴 했다.
겨울만 되면 찾아오는 건조증 때문에 독일 물에 적응됐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샤워나 머리를 감았을 때 부드러운 감촉에 깜짝깜짝 놀란다. 놀라는 순간이 뒤 바뀌어 버리는 걸 보면 이제 독일 석회 물에 무감감해진 건 확실하다. 이러면서 뮌헨가얏고는 오늘도 독일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