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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로 떠난 여행

제주 밖 그림일기 20

by Lara 유현정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여러 가지 일로 서울 체류 기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친정아버지 제사와 대학병원 진료 등 큰일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리로는 상황을 받아들였데, 음은 꽤 힘이 들었나 보다. 는 이제나저제나 제주 갈 날을 손꼽으며 안절부절못하고, 날이 갈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져들다. 만사가 귀찮 집에만 틀어박혀 웅크리고 있었다. 두가 제주에서 보내던 건강하고 규칙적인 일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외 마스크 착용이 해제된 걸 계기로 그동안 자제하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하지만 부족이었다. 미진한 나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라도 서울을 탈출하여 자연을 마주하는 것이 답 듯하였다. 렇게 돌파구로 찾아낸 것이 육지의 호수 다. 제주살이의 아쉬운 면이 늘 육지 여행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를 역이용하면 될 성싶었다. 옆에서 나를 딱하게 여기던 남편이 따라나섰다.


우리는 춘천했다. 이른 시간 집을 나서 경춘가도를 달렸다. 젊은 날의 낭만을 간직한 국도를 따라 달리자 추억이 퐁퐁 솟아올랐다. 그러나 동안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대성리와 강촌을 지나 의암호에 다다를 때까지 변변한 페 하나 만날 수가 없었다. 과거에 번성했던 휴게소는 모두 문을 닫고 폐허로 남아 있었다. 구불구불 강을 따라 달리며 만끽하던 여유는 속도를 자랑하는 고속도로가 모두 앗아가 버린 것이다.


우리는 의암호 주변의 한 야영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춘천호를 향해 달렸다. 과연 춘천은 호반의 도시웠다. 호수는 멈춰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물이 들고 며 숨을 쉰다. 모아 가두었기에 흐르는 강보다 표면적이 어서 득한 을 바라보는 나의 가슴 어느새 빨간 불에서 파란 불로 바뀌고 있었다. 주변의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쳐진 풍경은 그림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우리의 여행은 화천으로 이어졌다. 파로호 아래로 흐르는 강에서 물 위를 걷는 데크 산소길을 걸었다. 푸르른 호수와 강물을 하루 종일 실컷 보고 나니, 그야 살 것 같았다.




<그림> 충주호 종댕이길


나는 점점 호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불현듯 충주호가 보고 싶어진 나는 다시 남편을 재촉했다. 이번에는 제천의 박하사탕 영화 촬영지를 찾아가 전원마을을 구경하고, 덤으로 충주 호반을 바라보며 민물 매운탕을 먹는 것이 목표였다. 아침부터 고속도로가 많이 밀렸다. 거의 세 시간 가까이 걸린 제천의 애련리는 지명은 무척 맘에 들었으나, 위치가 너무 외지고 기대만큼 풍광이 시원하게 나오질 않아 실망스러웠다.


우리는 제천을 뒤로하고 한 시간 거리의 충주호를 향해 달렸다. 호반을 따라 달리는 드라이브 길에서 전망대를 발견하고 들어섰으나 공사 중이었다. 활옥동굴과 휴양림도 찬가지였다. 맛집을 찾아 달려간 당마저 문을 닫은 건지 아무도 보이질 았다. 간간이 들어선 전망 좋은 펜션도 문이 굳게 닫힌 하였다. 주호는 마치 한때 난리를 치며 몰려들던 관광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쓰레기만 가득 남은 철 지난 바다와 같았다. 코로나까지 덮쳤으니 사람의 온기가 사라져 그 썰렁함이 극에 달했다.


허전해진 마음으로 돌아 나오는 길, 다행히 괜찮은 밥집을 발견했다. 호수 전망을 반주 삼아 오랜만에 쏘가리 매운탕을 맛있게 먹었다. 배가 불러 한결 여유가 생긴 우리는 충주호를 두르는 종댕이길을 걷기로 하였다. 벚나무 가로수가 적당하게 그늘을 만들고, 색색의 연등이 달려있는 예쁜 길이었다.


걷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호수 위를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다가와 우리의 기분을 띄우며 실망을 날려 보냈다. 길은 흙 위에 잔디가 자라거나 가끔씩 자갈을 깔아 변화를 주고,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걷기에 알맞은 폭이었다. 멀리 호수를 왕복하는 유람선이 하얗게 포말을 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연두가 녹음으로 짙어가는 앞산은 모양이 대칭을 이루어 안정감과 균형미가 돋보였다. 겹겹이 이어지는 산세가 아득하게 꿈결처럼 쳐졌다.


내가 원한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라 조금은 아쉬지라도, 모든 실망을 보상하고도 남는 멋진 순간 말이다. 든 영혼에 단비를 뿌리 알 수 없는 기쁨까지 솟아나는 시간들, 나도 모르게 가슴 가득 차오르는 행복감에 미소가 담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면 더 이상 랄 것이 없는 찰나, 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오로지 지금 현재만이 존재하는 시간, 살다 보면 렇게 잠시 천국을 맛본 것 같은 강렬한 순간이 있기에 토록 지난한 시간들을 견딜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돌아갈 시간에 맞춰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종댕이길을 복했다. 으로 달리는 길은 영락없이 다시 막히기 시작했지만, 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미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마치 박하사탕을 한 움큼 집어삼킨 것처럼 청량감이 나의 핏줄기를 타고 달리며 잠자던 세포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 나는 서울에서의 일상을 버틸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자연에서 에너지를 충전한다. 나약한 나는 위대한 자연이 아낌없이 나눠주는 사랑으로 살아간다. 늘도 나를 숨 쉬게 하고, 가슴 뛰게 만들어주는 자연에게 사한다. 역시 자연이 답이다.


충주 호반의 종댕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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