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되면서 날은 더욱 화창해졌다. 햇살이 정말 화사하다. 꽃들이 피어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인 것이다. 집안에만 있기에는 날이 너무 아까운지 딸아이는 친구와 강아지호두를 핑계 삼아 매일 밖으로 쏘다녔다.하긴 젊을 때 잘 놀아야 늙어서도 잘 놀고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꽃잔치가 날마다 펼쳐지는 것도 아니니 아직은 벚꽃이 달려있을 때 노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덩달아 나도 시간이 될 때마다 함께 동행하며 봄날을 만끽했다.
제주에서 봄꽃 1번지를 꼽으라면 어디가 좋을까?
그동안 나는 늘 가시리를 제일로 치켜세웠다. 녹산로10km에 이르는 유채와 벚꽃의 이중주는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왠지 시들하다. 딸아이가 유독 번잡한 걸 싫어해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가시리는 벚꽃이 반도 피기 전부터 상춘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사실 녹산로는 난산리 밭으로 가는 길목이라 나는 가끔씩 지나치며 손바닥처럼 훤히 꿰뚫고 있으니 굳이 날을 잡을 이유도 없었다.
문득 예래생태공원이 떠올랐다. 대평리로 들어가는 올레길 8코스를 걸을 때 매번 통과하던 길인데, 잘 조성된 공원이 너무나 한적해서 무척 아까워하던 곳이다. 벚나무가 많이 심겨 있었으니 강아지 데리고 소풍 하기에도 안성맞춤일 듯했다. 피크닉 바구니에 바케트와 유부 초밥, 당근 주스와 강아지 간식을 넣었더니 제법 묵직하다. 천으로 만든 예쁜 돗자리도 챙겼다. 벚나무 그늘 아래서 꽃눈을 맞으며 소풍을 즐길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중문에서 대평리로 진입하는 도로에 들어섰다. 벚나무 터널이 좌악 펼쳐졌다. 우리는 잠시 가로수 길을 걸으며 즐기기로 하였다. 마침 한편으로 주차장도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어 편리했다.아이들이 길가에 소복하게 쌓인 꽃잎을 날리며 놀고 있었다. 우리도 호두에게 꽃눈을 뿌렸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적당한 세기로 불어주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꽃잎이 바람을 타고 샤랄라 흘러내렸다. 와, 판타스틱!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고맙게도 바람은 몇 번이고 꽃눈을 뿌려주었다.
함박눈처럼 꽃눈이 휘날려요~
<그림 1> 리틀 가시리
신나게 꽃눈을 맞고 흡족해진 우리는 원래의 목적지 예래생태공원으로 차를 돌렸다. 그런데 오 마이 갓!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아무리 벚꽃 시즌이라지만 정말 예전의 그 한적했던 공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와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길가 도로가 다 주차장이었다. 어쩐지 요즘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문이 불길하긴 했다. 그래도 옛날 생각으로 길을 나섰는데, 이건 도저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언제나 한적한 걸매 생태공원으로 가자꾸나!
인생은 참 오묘하다. 크게 기대했던 것이 실망을 줄 때 그것이 끝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뜻밖에도 법환에서 리틀 가시리를 만났다. 길이 자연스럽게 조성된 탓에 오히려 소담스럽고 다정했다. 녹산로에서 볼 수 있는 핑크와 노랑과 연두의 칼라가 지천이다. 예쁜 구름에 하늘까지 맑아서 세상이 온통 파스텔 톤이 아닌가.어릴 적 크레파스 통에서 제일 먼저 집어 들던 색들을 만나 동심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쉼터에 차를 세웠다. 딸아이가 호두랑 앞서 걷고 내가 뒤를 따랐다. 차들은 무심히 지나쳤다. 이토록 심쿵한 길이 모두 다 우리 차지라니 흐뭇했다. 더할 나위 없이 쾌적했다.
걸매 생태공원에도 계곡을 따라 커다란 벚나무가 만개하였다. 바람에 날린 꽃잎이 계곡 물살을 타고 두둥실 떠내려갔다. 벚꽃잎은 이제 곧 천지연 폭포와 서귀포 바다를 만나 세상 구경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벤치에 식탁보를 깔고 앉아 늦은 점심을 꿀처럼 달콤하게 즐겼다.
법환의 리틀 가시리
<그림 2> 신례리 목장 풍경
날이 계속 화창했다. 딸아이는 벚꽃을 좀 더 즐기려 제주에서의 체류 기간을 일주일 연장했다. 나는 딸아이에게 제주의 숨겨진 멋진 경관을 보여주고 싶었다. 봄 햇살에 마음이 들뜬 딸아이는 나의 제안을 선뜻 수용하였다. 우리는 먼저 점심을 먹고 오름에 가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찾아간 식당은 여전히 손님이 많고 음식 맛도 좋았다. 고소하지만 약간은 느끼한 치즈 돈가스와 매콤한 비빔 막국수는 딸아이의 까다로운 미각을 한방에 만족시켜 주었다. 오늘 외출의 반은 성공한 것이다.
기분 좋은 드라이브가 이어졌다. 한적한 시골길이 주는 여유를 즐기며 이승이 오름(이승악)을 향해 차를 달렸다. 곧 이정표가 나타났고, 산록도로에서 이승이 오름으로 진입하는 길에는 신례리 마을에서 운영하는 방목장이 넓게 펼쳐졌다. 멀리 한라산을 배경으로 2km에 이르는 벚꽃길이 목장을 가로질렀다. 활짝 핀 벚나무 사이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였던가? 처음 이 오름을 찾았을 때, 나는 우연히 맞닥뜨린 평화로운 풍경에 넋을 빼앗겼다. 소들은 하나같이 털에 윤기가 반지르르 흘렀고, 다들 행복해 보였다. 한라산과 서귀포 바다가 보이는 멋진 풍경 속에서 날마다 신선하고 맛있는 풀을 배불리 뜯어먹는 게 일이니 근심 걱정이 있을 리 만무하다. 우리나라 소들 중에 아마 가장 행복한 소들이지 싶었다. 나는 마침내 제주에서 비밀의 정원을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러나 이곳도 빠르게 전파를 탄 것 같았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렌터카들이 들락거렸다. 여기도 조만간 관광객들의 차지가 될 모양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피해 목장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제주에서 고사리라는 걸 처음 꺾던 날, 뻐근해진 허리를 펴고 주변을 바라보다 감탄사가 흘러나왔던 바로 그 풍경이 펼쳐졌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불쑥 솟아오른 작은 오름들을 거느린 한라산 자락이 할머니의 품처럼 넉넉해서, 대자연의 품에 안겨 충만해지는 느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딸아이도 연신 감탄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호두는 풀밭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급기야는 소똥에 접근하여 냄새를 킁킁 맡더니 점점 행동이 이상해졌다. 온몸을 비벼대며 드러눕기까지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내게 딸아이는 강아지들이 좋아하는 냄새를 몸에 묻혀 집에 가져가려는 습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두는 차 안에서 신체가 경직되는 마비증세를 일으켰다. 너무 무리해서 그렇다는 수의사의 설명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에 와 목욕을 시키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뽀얀 호두가 되었다. 그래도 안된다. 이제부터 호두는 오름 금지다! 알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