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생의 마루 Sep 13. 2022

계약에서 깨달은 약속의 의미

그해 마지막날의 해피엔딩


며칠 전 임대인분이 사무실에 찾아오셨습니다. 계약한 지 꽤 시간이 흘러 바로 기억하긴 어려웠지만, 특유의 유쾌한 성품으로 몇 마디 건네고 나니 서서히 기억이 났습니다. 오늘은 이 분과의  몇 해 전 12월 마지막 날까지 마음을 졸여야 했던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합니다.


계약하기 전 그해 초 아직은 추웠던 1월 어느 날 월요일 오전 한 임차인이 사무소에 찾아와서 문의할 게 있다며 근심이 어린 표정으로 본인이 원하는 때에 이사할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의 학군문제로 10월 이후 이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손님은 아직 10개월 이상 여유가 있는데  그에 비해 너무 앞서서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능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일단 장담했습니다.


내일의 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저이지만, 그 당시에는 10개월 동안 불안해할 임차인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저의 불확실한 마음과는 다르게 상담하고 손님을 보냈습니다. 그 후로도 손님은 가끔 한 번씩 사무실에 들러서 “제가 원하는 때에 집이 나갈까요?” 하고 걱정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해결해드릴게요.”라고 또 장담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가을이 되었고 이제는 손님에게 집을 브리핑해도 될 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적당한 분을 모시고 온 부동산이 있었고, 집을 본 손님이 기존임차인이 원하는 이삿날에 맞출 수 있다고 해서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계약할 때 집주인 아들을 대신해 아버님이 대리인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문제는 임차인분이 전세자금대출을 신청해야 하는데 당사자 본인이 외국에 거주 중이니 영사관 직인이 찍힌 위임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때부터 별 탈 없이 진행될 줄 알았던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임대인이 서류를 항공우편으로 보내려면 도착하는데 열흘 정도 걸리고, 대출 심사하는 시간은 최소 2주는 걸리니 잘못하면 원하는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나라 영사관은 연말 연초에는 대략 일주일 전부터는 종무를 하고 일을 하지 않아서 직인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임대인은 다시 미국으로 출장 중이었고 그곳에서는 항공우편으로 기한 안에 서류를 받는 것이 더욱 불가능했습니다. 참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계약을 이행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졌습니다.


그때 임대인의 아버님이 나서 주셨습니다.

“연말도 되었으니 한국에 들어와서 나 좀 보고 가라”

고 하셨답니다. 아버님도 대리인으로서 일종의 책임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임대인이 한국에 입국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한 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연말이다 보니 항공편이 없어서 예약을 못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예상을 벗어난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머릿속은 하얘졌지만 기다리는 일 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말일까지 입국을 못 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라 더욱 애가 탔습니다.


임대인은 간신히 항공편 예약을 하고 바로 12월 31일 아침에 입국하자마자, 바로 우리 사무소로 찾아왔습니다. 우선 계약서에 서명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출 상담사와 만나서 서류에도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대출은행에서 본인확인 전화까지 마치고 나서 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도 마음졸이다 대출은행 담당자와 확인했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긴장이 풀렸습니다. 일을 다 끝내고 나서 상담사분이 하신 말씀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중개사는 못 봤다고 하시면서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끝까지 책임지고 확인해 주신 대출 상담사님 덕분에 중개사고가 나지 않고 마무리되었음에 감사했습니다.

일단은 애써 손님을 모시고 온 부동산과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렇게 신경을 썼던 이유는 10개월 전부터 마음 졸여가며 “우리 집이 원하는 날짜에 나갈까요? ” 했던 그 임차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한 약속에 대한 저의 책임감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임대인, 상담사, 공인중개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움직였기에 힘들었어도 멋진 마무리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중 제일 감사한 분은 먼 곳에서 계약이행을 위해 비행기까지 타고 오신 임대인입니다. 만약 마지막 날 임대인분이 못 도착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타국에서 본인 일도 못 하고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셨을까요? 그런데도, 누구 탓이나 짜증없이 깔끔하게 확실히 매듭짓고 가신 임대인분에게 감동했습니다.


다시 한번 이 글을 통해서 임대인과 대출상담사분께 정말 감사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일을 진행하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해 마음고생은 있었지만, 마지막이 해피엔딩이었던 잊지 못할 그해의 마지막 날로 기억됩니다.      

심장이 전속력으로 방망이질하고, 진땀 났던 그 날의 하루에서 제가 배운 것은 약속이라는 두 글자의 의미입니다. 약속이라는 한자를 풀이해 보면 약(約: 묶을 약) 언약이나 약속, 속(束:묶을 속) 결국 묶인다는 의미입니다. 두 글자 모두 묶인다, 동여맨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약속은 묶인 것을 끝까지 책임져야 비로소 그 관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이토록 중요한 의미인 약속을 깨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약속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신뢰가 기본적인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약은 큰 재산을 움직이는 약속입니다. 한 번 한 계약은 이행되어야 하고 그런 이유로 더욱 신중한 결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생에서 가장 큰 소비 중 하나인 부동산계약을 책임지는 공인중개사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이런 책임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공인중개사가 많아질수록 중개업의 이미지도 점차 개선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전 15화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진심은 더 잘 보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